Zoe´ Ouv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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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 2017

글 고성연

모든 예술 작품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떤 맥락에서든 자신을 잉태시킨 아티스트를 닮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런데 아주 꼭 닮는 경우도 있다. 나무를 깎고 다듬고 그 위에 형상을 새기면서 삶을 채워가고 예술가로서의 영혼을 가꿔가는 조에 우브리르(Zoe´ Ouvrier). 땅속 깊이 뿌리를 뻗었기에 가느다란 줄기로도 모진 바람과 세찬 비를 꿋꿋하게 견뎌내는 심근성(深根性) 강한 나무를 닮은, 서정성 짙은 작가다. 가녀리고 섬세한 듯하지만 강인한 목가적 영혼이 느껴지는 그녀가 창조해온 매력적인 예술 세계를 소담스러운 꽃과 나무가 가득한 작은 정원이 있는 파리 자택이자 작업실에서 직접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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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나 각지에서 온 이민자가 많이 모여 사는 파리 북동쪽 20구. 여행자들의 발길이 잘 닿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은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가 사는 동네인 벨빌(Belleville)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바로 이곳에서 뿌리 깊은 나무를 닮은 목공예 조각가 조에 우브리르(Zoe´ Ouvrier)를 만났다. 사실 그녀를 만난 계기를 제공한 건 아티스트이자 디자이너인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를 인터뷰한 자리에서 우연히 조에가 마침 그 근처 자택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즉흥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며칠 전 우연히 조에의 작품집을 보고는 강하게 끌렸던 터라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어린 딸을 태우고 모터사이클로, 필자는 우버 택시를 타고 각각 목적지에 도착했다. 화창한 봄날, 눈이 시릴 정도로 강한 코발트 블루빛 페인트가 돋보이는 건물.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이 오래된 건물에는 그들의 오붓한 보금자리는 물론 조각칼, 끌, 붓, 망치, 물감 등 각종 연장과 재료로 가득한 그녀의 아담한 스튜디오, 그리고 다른 ‘이웃’ 아티스트의 작업 공간도 자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봄기운으로 짙어져가는 녹음이 싱그럽게 느껴지는 소박한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주인을 닮은 듯한 정원이었다. 큰 키에 허리 근처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다소 수줍은 표정과 느린 말씨의 소유자인 조에는 딱 봐도 전형적인 파리지엔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남프랑스 몽펠리에 출신으로 파리에서 오래 살기는 했지만, 자신은 결코 ‘도시 사람’이 못 된다고 했다. “콘크리트보다는 지렁이에 얽힌 경험담이 더 많거든요. 사실 제 작업도 어린 시절 저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으로 이끄는 소중한 매개체나 다름없어요. 온통 대자연을 느낄 수 있었던 환경으로요.”
자연을 벗 삼아 자란 남프랑스 소녀, 나무 조각으로 정체성을 찾다
조에 우브리르의 부모는 1970년대에 몽펠리에 근처의 시골 동네로 이주했는데, 도처에 관목이 널려 있고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극작가이자 영화 제작자 마르셀 파뇰의 소설 <마농의 샘>에 나오는 야성미 넘치는 전원을 떠올려도 돼요. 사람들과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았고요.” 조에의 부모님은 당시 경작을 했지만, 자투리 시간에는 예술 작업도 했고, 그 덕분에 그녀 역시 자연을 담는 스케치를 일삼게 됐다고. 그렇다고 딱히 아티스트가 되기를 꿈꾼 건 아니었다. 그저 울창한 나무와 바람, 햇빛 속에서 20년 가까이 자연의 힘찬 생명력을 느끼며 성장했을 따름이다. “냉동식품이나 방부제 든 음식 같은 건 구경도 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하고 숲을 거닐거나 강에서 헤엄을 치는 등 풍요로운 자연환경을 누리면서 자란 건 정말 행운이었죠.”
만 18세가 되자 그녀는 인생의 다른 챕터를 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파리로 상경했다. 경제적인 원천이 필요했던 그녀는 타고난 장신에 늘씬한 몸매 덕분에 패션 모델로 활동하게 됐고, 수년간 유럽 도시들을 다니면서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여행 가방을 집으로 삼은 듯한’ 시기였다. “나름 좋은 경험이었지만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은 여정이었죠.” 그러다가 문득 동구권에서 물밀듯 밀려 들어온 아름답고 더 젊은 소녀들을 보면서 미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그러고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늘 들고 다니던 스케치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파리의 국립 예술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후 그림을 그리고, 마침내는 나무 조각 작업을 파고드는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그리 속도감 넘치는 도약을 펼친 건 아니었다. 2002년에 졸업한 그녀가 런던과 파리의 갤러리에서 어엿한 작가로서 전시를 연 것이 10년 뒤인 2012년이었으니 말이다. 두 아이 엄마로서 가정도 꾸려오다 보니 다소 느렸을지는 모르지만, 꾸준하고 한결같은 그녀의 행보는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빛을 발했고, 유럽은 물론 중동,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게 됐다.
평범한 합판이 다시 ‘나무’로 거듭나다, 생명의 근원과 맞닿은 작업
섬세하고 유려한 나무줄기와 껍질, 뿌리, 자유롭게 뻗어나간 나뭇가지의 실루엣, 레이스처럼 촘촘하게 짜인 아름다운 잎새…. 주로 평평한 칸막이나 판에 새긴, 팔딱거리는 숲의 생명력을 연상케 하는 ‘조에 우브리르표’ 무늬와 이미지는 분명 나무나 그 일부분을 닮았지만 나무의 초상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의 근원을 이루는 대자연의 정수를 정제된 감성으로 담아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의 산실일 따름이니까(난자와 정충, 새 같은 소재도 활용한다). 그래서인지 다분히 추상적이고, 정적인 생명력이 느껴진다. “어릴 때는 언어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 애를 먹기도 했어요. 나중에야 그게 성인의 난독증과 비슷한 증상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는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죠.”
조각 작업은 그녀에게 삶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나무의 살을 파고 깎는 작업은 제게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예요. 고통받는 영혼처럼 저를 나무와 동일시하게 되죠.” 그렇게 조각 작업을 하노라면 생명의 모체인 여성성으로, 그리고 인간애(humanity)로 인도되는 느낌이라는 게 조에의 설명이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에요. 하지만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 그러니까 생명을 잉태시키는 여성성 없이는 지상의 어떤 것도 살아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조각 작업으로 구현해내는 (제 마음의) ‘풍경’은 저를 근원적인 단순함, 여성성으로 이끌고 결국 내적인 평온함을 찾게 해줘요. 그렇게 해서 삶에 대한 에너지와 사랑을 되찾는 것 같아요. 따라서 제 작업은 탄생, 삶, 여성성에 대한 일종의 선언문 같은 것이기도 하죠.”
그녀가 주로 쓰는 재료는 저렴한 합판(plywood)이다. 굳이 비싼 목재를 고집하지 않는 건 그녀의 소박한 성격과 닮았다고 언뜻 생각했는데, 단순히 그런 의도만은 아니었다고. “일종의 항의나 자기주장 같은 선택이었어요. 합판은 인간이 자연에 손상을 가해 만든 재료잖아요. 저는 원래는 위풍당당한 나무에서 비롯된 흔하디흔한 널빤지를 골라 본연의 아름다움을 회복해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미모’를 복구해 나무의 영혼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니, 그녀다운 생각이다.
일관된 철학 안에서의 자연스러운, 그리고 사랑스러운 진화
조에 우브리르의 예술 철학과 감성을 사랑하는 팬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고무된 덕분일까. 그녀의 창조적 스펙트럼은 다채롭게 진화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금속을 활용하는 횟수도 늘어났고, 오브제만이 아니라 커다란 인테리어 월(wall), 수납장 등 다양한 품목에 도전하고 있다. 물론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자연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시도다. 특히 요즘에는 시멘트, 브론즈, 가죽, 심지어는 패브릭 등 갖가지 재료를 활용해 화석화(fossilization) 개념을 풀어내는 작업에 흥미롭게 임하고 있다고. 어쩌면 이런 창조적 진화는 신기술, 신소재를 자신만의 ‘미니멀한’ 방식과 감성으로 출중하게 녹여내 ‘세계 3대 산업 디자이너’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녀의 남편, 아릭 레비(Arik Levy)에게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마도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 부분이 있겠죠. 특히 제가 디자인과 미니멀리즘의 세계에 제대로 눈을 뜨게 해준 건 아릭이에요. 이스라엘 출신인 아릭과 저는 서로 너무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지라 기본적으로는 다르긴 하지만요.” 실제로 둘의 작품 스타일은 한눈에 봐도 다르다. 아릭 레비는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 비대칭의 기하학적 이미지를 차용한 구조적 조각물을 빚어내고 사진, 비디오 아트, 첨단 신기술을 적용한 제품 디자인 등 여러 분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천후 크리에이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크리에이터 부부에게는 확실한 공통분모가 하나 있다. 바로 ‘서정성’이다. 아릭 레비는 언뜻 첨단을 걷는 아티스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연과 소셜 코드, 감정, 기술적인 영역을 연결 지으려는 시도 속에 그만의 운율이 담긴 서정성이 묻어나는 작가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테크노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을 테고, 조에 우브리르에게는 목가적인 서정성이 담뿍 배어 있다.
작가 홈페이지 www.zoeou vri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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