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ddaeus Ropac 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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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3, 2021

글 고성연

interview with_타데우스 로팍 대표


지난 10월 초, 서울 한남동 포트힐 건물 2층에는 유럽의 명문 화랑으로 꼽히는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서울이 문을 열었다. 이 갤러리의 첫 아시아 진출지. 메이저 갤러리들의 몸집 불리기와 국제화 추세가 이어지고 있고, 서울이 아시아 지역의 문화 허브로서 점차 잠재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홍콩이나 상하이를 제치고 먼저 낙점되다니 살짝 놀랍기도 했다. 독일 신표현주의 거장인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를 내세운 개관전을 앞두고 서울을 찾은 갤러리 설립자이자 대표 타데우스 로팍을 만나봤다. ‘왜 서울’인지보다는 그의 경이로운 ‘예술가 스펙트럼’이 못내 궁금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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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트 열풍’이 심심찮게 불고 있다지만, 사실 갤러리나 갤러리스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엄청난 건 아니다. 고가의 미술 작품을 소비하는 소수의 고객 위주로 돌아가고,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촘촘히 얽힌 ‘개인적 관계성’이 중요한 비즈니스인지라 상업 화랑의 세계는 ‘그들만의 리그’ 같은 이미지가 있다. 게다가 매출 규모와 상관없이 아트 페어 등의 주요 판로를 둔 갤러리들은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판’을 벌리지 않는 편이다. 작품 한 점에 수십, 수백억원짜리를 다루고 미술관 수준의 공간을 꾸리는 현대미술계의 거대한 존재 가고시안(Gagosian)이나 하우저 앤드 워스(Hauser & Wirth) 같은 갤러리도 할리우드의 메이저 스튜디오처럼, 혹은 명품업계 파워 브랜드처럼 대중에게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40년 가까운 업력에 70명가량의 다국적 아티스트를 거느린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역시 국내외 주요 아트 페어를 즐겨 찾는 이들이 아니라면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필자에게는 쟁쟁한 현대미술가들을 소속 작가로 둔 명성 높은 갤러리지만 유럽 혈통의 점잖고 우아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국제 무대에서 호평받는 이불(Lee Bul) 같은 한국 작가와도 일하길래 눈길이 좀 더 간 정도였지만, 워낙 앤터니 곰리, 알렉스 카츠 등 연륜 있는 거장들이 작가 목록을 차지해서 그런지 그다지 진취적인 인상을 품게 되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장-미셸 바스키아의 다큐멘터리를 본 것을 계기로 우연한 관심이 생겼다. ‘요절한 천재’, ‘자유와 저항 정신의 아이콘’ 같은 수식어가 달린 바스키아의 생애 마지막 갤러리 전시를 진행했던 인물이 바로 타데우스 로팍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바스키아는 그의 이름을 딴 라이선스 브랜드나 컬래버레이션 상품이 나올 정도로 영웅 대접을 받지만 당시만 해도 유럽에선 호평받지 못했다.


요절한 천재이자 동갑내기 작가인 바스키아와의 만남

“저랑 바스키아는 나이가 똑같아요. 둘 다 1960년생이죠. 저는 바스키아 전시를 네 차례 했는데, 그의 생전에만 세 번을 했죠.” 다큐멘터리나 과거 사진 자료를 봐도 알 수 있듯 그들은 당시 팔팔한 20대였다. 바스키아는 뉴욕에서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유명세를 누리긴 했지만 주류 미술계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유럽에서는 더 인정을 받지 못했고, 소수의 추종자들이 있을 뿐이었죠.” 동갑내기 작가와 갤러리스트는 1988년 잘츠부르그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이것이 바스키아의 생애 마지막 갤러리 전시가 됐다. “바스키아는 당시 유럽에 머무르다가 파리를 거쳐 뉴욕으로 돌아갔는데, 그해 여름에 세상을 떠나버렸죠. 우리 전시는 그가 사망했을 당시에도 진행 중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타데우스 로팍 대표는 바스키아에 얽힌 기억만큼은 얼마 안 된 일인 양 꽤 뚜렷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급작스럽게 세상을 뜨기도 했고 훗날 유수 경매에서 ‘뉴욕의 피카소’라는 별칭에 걸맞게 1천억원대가 넘는 가격에 작품이 거래되는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된 인물이기도 하지 않은가(로팍 대표는 당시 잘 팔리지 않는 바스키아 작품을 은행 대출까지 받아 자신이 거뒀다고 한다).
물론 바스키아와 친한 갤러리스트나 미술계 인사는 한두 명이 아니다. 그런데 경력도 많지 않은 20대의 패기 넘치는 오스트리아의 젊은 갤러리스트는 어떻게 당시 ‘악동 예술가’로 통했던 바스키아와 대서양을 거치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백남준의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던 현대미술계의 거목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가 등장한다. 로팍 대표는 청년 시절 스스로 아티스트가 되기를 꿈꾸면서 잠시 업계에 발을 담가 경험을 쌓아보기로 했다. 경제학을 공부하기를 바랐던 부친을 설득해 유예 기간을 얻어낸 그는 당대 미술계의 구루인 요제프 보이스를 찾아가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했다. 원래 비엔나에서 그가 한 강연을 듣고 편지도 보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가 아예 뒤셀도르프로 가서 그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호기로운 청춘의 패기를 보였던 로팍은 ‘인턴’으로 보이스를 돕게 된다. 1981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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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보이스가 건넨 냅킨 한 장이 만든 인연,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딴 갤러리

“당시 요제프 보이스는 그의 커리어에서 중요했던 <시대정신(Zeitgeist)>전과 카셀 도쿠멘타(5년마다 독일 카셀에서 치러지는 미술계의 가장 권위 있는 행사) 출품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굉장한 경험이었죠. 보이스 같은 위대한 예술가가 어떤 사고를 하고 작업하는지 지켜보고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실제로 보이스는 1982년 카셀에서 열린 도쿠멘타 7에서 그 유명한 ‘7천 개의 현무암 기둥과 나무 심기’를 시도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생태학 운동의 면모를 지녔던 이 작품은 ‘사회적 조각’이라는 작가의 개념도 대변하고 있다. 청년 로팍은 그야말로 ‘인생 경험’을 한 셈인데, 한편으로는 자신의 진로를 다시금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아티스트로서의 재능은 없다고 판단했지만 이 세계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자신과 전시를 하겠냐고 보이스에게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머뭇거렸지만 그는 결국 나중에 로팍과 전시를 했다).
보이스는 로팍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인생을 바꿔놓은’ 은인이다. 이듬해인 1983년 팝아트의 심장 같은 앤디 워홀을 만나는 디딤돌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그 연결을 가능케 한 ‘마패’는 한 장의 냅킨이었다. 요제프 보이스는 종이 냅킨에 ‘이 재능 있는 젊은이를 만나보게(Dear Andy, Please meet this talented young man)!’라는 짧은 글귀를 써서 로팍에게 건넸다. “그 종이 냅킨은 미국으로 가는 티켓이었죠.” 로팍은 미소를 지으며 회상했다. 워홀은 아마도 유럽에서 건너온 이 패기 넘치는 젊은 초짜 갤러리스트를 마냥 뿌리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어린 친구(장-미셸 바스키아)를 소개해줬을 테고 말이다. 그렇게 로팍은 워홀이 아꼈던 바스키아를 비롯해 키스 해링, 로버트 메이플소프 등 당시 미국 아트 신을 여러모로 달군 당대의 아티스트들, 그리고 저명한 미술계 인사들도 만나게 됐다. 그야말로 1980년대를 (여러 의미로) 들썩이게 했고, 후세에 저마다의 뜻 깊은 자취를 남긴 이들과 놀며, 일하며, 연대를 다진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여름 잘츠부르그로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내건 갤러리를 정식으로 열었다. 무려 38년 전 일이고, 이제 그는 60대에 접어든, 노련하지만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갤러리스트로 ‘아시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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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잘 떠나지 않는 갤러리를 만든 ‘신뢰’의 협업

갤러리스트를 우리말로 화상(畫商)이라고도 하듯, 그저 미술품을 사고파는 장사꾼으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어차피 같은 직업이라도 다른 마인드로 일하는 차별된 일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미술관 같은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이 강한 기관의 관점에서 놓치는 신선한 재능을 알아보고 연결해주며, 빼어난 마케팅으로(가끔은 ‘거품’도 만들어지지만) 작가를 스타덤에 올려놓는 아트 경영의 귀재도 있다. 뛰어난 갤러리스트를 만나보면 이것이 단순히 전략이나 마케팅 차원만이 아니라 정말로 ‘보는 눈’과 ‘감’, ‘촉’이 있는 데다 작가와 미술을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사령탑이자 친구라면 단순히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연’이 오래 유지될 수밖에 없다. 타데우스 로팍이라는 인물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의 갤러리 소속 작가들이 거의 그를 떠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보면 ‘신뢰’도 ‘실력’도 인정받고 있음을 미뤄 짐작해볼 수는 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의 서울 입성 프로젝트를 맡은 황규진 디렉터는 갤러리의 일을 작품 판매가 아니라 ‘플레이스먼트(placement)’로 여긴다고 설명했다. 정말로 작가의 가치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기관(미술관이나 아트 센터), 그리고 컬렉터의 손에 작품이 놓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역할과 사명에 따라 일하는 게 좋은 갤러리스트의 자세라는 얘기다. ‘클리셰’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들 자신을 포함해 유난히 들뜬 작금의 미술 생태계에서 곱씹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의 포문을 연 80대의 독일 작가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그 역시 로팍 대표와 35년 우정과 파트너십을 다져온 인물이다. 머리가 아래 있고, 발이 위에 있는 ‘거꾸로 된’ 인물을 담은 반(半)추상 회화로 유명한 바젤리츠는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에서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두 번째 개인전이자 타데우스 로팍 서울의 개관전에 남다른 의미를 두고 12점의 회화와 12점의 드로잉 신작을 보낸 바젤리츠에게 올해는 여러모로 뜻 깊은 해다. 얼마 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시작됐고, 프랑스 아카데미 데 보자르의 회원으로도 선정된 ‘영예’를 얻었기 때문이다. 작가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역대급’ 전시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 로팍 대표의 기쁨에 응답하듯 바젤리츠의 퐁피두 전시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관객이 찾을 만큼 초기 반응이 좋다고 전해진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의 다음 전시 작가는 내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을 앞둔 알렉스 카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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