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다카시와 마우리치오 카텔란을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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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 2023

글 심은록(Sim Eunlog Meta Lab 연구원)·챗GPT 공동 집필 Edited by 고성연

+챗GPT와‘맞짱 토론’


팬데믹을 거치며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미술을 향한 대중의 관심이 부쩍 커졌다는 사실은 때때로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수준으로 붐비는 전시장 풍경을 보면 알 수 있다.그 열기를 더 힘차게 이어가듯, 올 초부터 미술계에서 ‘동시대’를 상징하는 동양과 서양의 스타 작가를 각각 내세운 두 전시가 문화 예술계를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관람객을 불러들일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부산시립미술관의 <무라카미 다카시: 무라카미좀비>展(2023. 1. 26~4.16, 1백60여 점), 그리고 리움미술관에서 매번 예약 창이 열리자마자 매진되는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WE>展(2023. 1. 31~7. 16, 38점)이다. 흥미롭고 풍부한 커리어를 아우르는 개인전답게 둘 다 규모가 크고 다양한 콘텐츠를 선사하는 데다 무료 관람이라 화제성이 더 만발한 듯싶다. 한국 관람객 입장에서 놓치기 아까운 전시다. 하지만 그 자체로 ‘미디엄’이 되는 전시의 실험성과 창조성이라는 잣대로 보자면 두 전시 모두 아쉬운 점도 분명 있다. 새로운 화두나 의제를 날카롭게 던지는 작가의 ‘동시대적인 신무기’를 ‘한국 전시’에서 꺼내 들기를 기대하는 건 과도한 바람일까? 특히 ‘악동’이라 불릴 정도로 재기와 파격이 넘치는 작가들 아닌가. 우리 미술계를 둘러싼 담론이 보다 활발하고 다채롭게 전개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전시 비평과 함께 요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대화형 인공 지능 챗GPT(ChatGPT)와의 대화도 시도해봤다. /편집자 주


Takashi Murak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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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Q로는 정점에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
1990년대, 오타쿠를 자처하던 무라카미 다카시 (Takashi Murakami, 1962~)는 독특한 일본 문화 현상과 미술을 합체해 ‘니폰 팝(Nippon pop)’을 이끌었다.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슈퍼플랫(Superflat)’ 은 2001년 열린 미국 순회전의 제목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게임과 예술, 저급문화와 고급문화, 전통과 현대 등을 한데 모아 유압 프레스로 누른 듯, 계급이나 취향도 해체해 평평하게 만든다. 나라 요시토모(Yoshimoto Nara) 같은 작가들이 합류해 귀여우나 기스럽고, 순수한 아이지만 인간의 사악함을 표출하는 등 평면적 분열 증세를 창출한다. 미술 평론가 사와라기 노이(Noi Sawaragi)는 일본의 네오팝(neopop)이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 정신분열증)적이라고 규정한다.
진정한 MZ 세대 벤처 투자자로 꼽히는 나탈리 프라토(Natalie Fratto)는 TED talks(2019)에서 중요한 건 I. Q나 E. Q가 아니라, A.Q(Adaptability Quotient,적응 지수)라고 강조했다. 변화하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말한다. 무라카미는 A. Q에 있어 아시아 미술계에서 단연 독보적이다.이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태에, 사와라기 노이는 ‘전후(戰後) 미술’이 더 이상 기준이 아닌, ‘재후(災後) 미술’(2011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말했으며, 지질학과 관련해 대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흔들린다고 한다. 이제는 ‘재후 미술’도 지나 ‘NFT-AI미술’로 넘어갔다. ‘전후 미술’과 ‘재후 미술’에도 잘 적응했던 무라카미는 자신은 “NFT 미술계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고 있으며… 1, 2세기 뒤에도 내 작품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NFT 예술을 창조하겠다”고 선포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1백6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번 부산 전시의 ‘정신분열적인’ 키워드 중 2개는‘귀여움(가와이)’과 ‘기괴함(기카이)’이다. 공교롭게도 현재 NFT의 주류 중의 하나가 ‘귀엽거나 기괴하거나’다.2022년 그가 1백8개의 NFT ‘플라워(Kaikai Kiki) 씨앗’을 오픈씨(NFT 거래 플랫폼)에 내놓자마자 거래 규모 상위 5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사실 요즘 현대미술계에서 AI나 컴퓨터에 대한 의존이 과하게 느껴질 정도의 표현 방식이 비판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솔직히 무라카미 다카시를 선배로 둔 일본 후배 작가들이 부럽다. 그는 철저히 일본적인것을 세계화했다. 그 성공의 이유를, 그는 자신의 저서 <예술기업론(芸術企業論)>에서 일본적인 것을 서양 미술사의 문법으로 말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주변에는 동료 작가는 물론 후배 작가들까지 함께 세계적인 +챗GPT와 ‘맞짱 토론’ 작가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전통은 귀히 여기나, 바뀌는 시대에 적응할 수 있고(A. Q), 개인 플레이가 아니라 동료, 후배 작가들과 함께 성장하는 대가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힘이 더해지면서 전쟁터 같은 현대미술 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무라카미 다카시의 말처럼, ‘NFT는 어쩔 수 없는 미래’인데,한국 대가들 중에는 그 누구도 이 흐름을 끌어주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쉽다.


Maurizio Catte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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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훈과 준호’에게 동전을…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1960~)은 너무 바빴던 것일까, 아니면 아이디어가 부족했던 것 일까? 후자는 아닌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아이디어가 없거나 게을러서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할 때마다,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사례 중 하나가 ‘일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1993)라는 작품이다(그래서 그가 위와 같은 말을 할 때는 ‘선전포고’같이 느껴질 정도다). 2011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회고전이라는 이번 리움 미술관 전시에서는 199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 화제작 등 작가의 커리어를 관통하는 주요 작업을 접할 수 있다(총 38점). 그런데 새로운 작품은 없었다. 카텔란이 제2의 샹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신개념 미술(Neo-conceptual Art)’의 대표 주자여서다. 개념 미술가는 새로운 개념을 전시해야 신작을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2019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행위 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가 평범한 바나나를 덕 테이프로 벽에 붙인 카텔란의 작품인 ‘코미디언(Comedian)’을 먹어버리는 퍼포먼스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이 작품은 리움 전시에서도 선보이고 있다). 그는 시든 바나나를 먹었을 뿐이지, 1억4천만원짜리 개념을 먹어치운 건 아니다. 그래서 ‘코미디언’을 판매할 때는 바나나가 아니라 작품의 개념이 담긴 ‘인증서’를 준다. 이번 리움 전시를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는 ‘노숙자 시리즈’가 있다. ‘동훈과 준호’라는 제목의 작품이지만, 오리지널 버전은 1996년 작 ‘안드레아스와 마띠아 (Andreas e Mattia)’다. 당시 이를 진짜 노숙자로 오해해 경찰에 신고했고, 그 뒤 또 다른 버전들에는 다양한 시위에 이 노숙자를 참여시켰다고 한다. 작품과 관련된 이 같은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마도 ‘동훈과 준호’는 다시 전시되지도, 언급되지도 않을 것 같다. 카텔란 어머니의 밀랍 모형이 냉장고에 들어 있는 ‘그림자’도 2023년 작이지만, ‘벳지(Betsy, 1999)’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앞으로는 세계적인 외국 작가들이 한국에서 전시할 때, 전시를 위해 제작한 작업이 그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 전시를 할 때, 한국 미술관의 해당 전시가 언급됐으면 좋겠다. 늘 세계 미술계에 새로운 논쟁 거리를 제공한 카텔란의 행보를 지켜봐왔기에 기대가 컸던 때문일까? 왠지 작년에 서울에서 열렸던 프리즈(Frieze) 아트 페어를 보듯, 김이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동훈과 준호’로 돌아가보자. 이 시리즈 중 하나는 외부에서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다른 하나는 전시장안 1층 로비의 커다란 원기둥 앞에 설치되어 있다. 노숙자는 겨울에도 날씨가 따뜻한 남부 유럽에 많다. 리움의 노숙자는 서울역 주변에 거주하는 대표적인 한국형 노숙자들과 뭔가 달라 보인다. 그가 한국 노숙자를 만나는 봤을까? 개념 미술이기에 더더욱 그들의 생각을 알아야 했던 건 아니었을지…. 이렇게 의구심이 쌓이는 와중에 ‘노숙자’가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로비 기둥에 입혀진 이미지가 시야를 잡아끈다. 거대한 코르크 마개로 입을 틀어막은 화이트칼라의 남성 이미지(Untitled, 2000)는 ‘숨 막히게’ 다가왔다. 마치 내 입도 코르크 마개로 막아버릴 듯 말이다. 한데 기둥 바로 앞에 노숙자, 즉 사회적 약자가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두 작품이 연결된다. #MeToo 운동, 10·29 참사, 학교 폭력 등이 스치고 지나간다. 두 작품의 생경스러운 배치가 자아내는 효과라니. 갑자기 카텔란한테 허를 찔린 것만 같았다.
그런데 노숙자 옆에 누군가 작은 바구니를 가져다놓았다. 물론 이 바구니는 작품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 옆에는 동전이 몇 개 놓여 있다. 아마도 먼저 놓여 있던 바구니가 혹시나 작품의 일부일까 싶어, 바구니 밖에다 살짝 놓아둔 듯하다. 어느 관람객의 행위는 서구의 적극적인 반응과 다른, 한국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카텔란에게 허를 찔려 아프기는 했지만, 이름 모를 관람객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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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가 펼친 두 작가의 가상 논쟁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챗GPT와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무라카미 다카시에 대해 지속적인 대화를 전개해봤다. 챗GPT의 사전 학습된 데이터가 2021년 9월까지 한정되어 있던 터라 두 전시의 정보를 습득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최종적으로 필자는 챗GPT에 카텔란과 무라카미, 두 작가가 펼치는 가상 논쟁을 요청했다.그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카텔란 : 당신(무라카미 다카시)의 작업은 우리가 사는 허황된 소비문화를 반영합니다.
무라카미 : 나는 우리 현대사회의 거울이 되는 예술을 하고 있습니다.그것은 어떠한 위대한 의미나 메시지를 가지기보다는, 즐기고 감상하기 위한 것입니다.
카텔란 : 그게 문제입니다. 당신의 작품은 실질적인 깊이나 영향력이 없습니다.
무라카미 : 그러는 당신의 예술은 충격적인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주목받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내용이 부족한 싼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텔란 : 나의 예술은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주변 세계를 의심하도록 도전하게 합니다. 사람들의 불편함을 통해서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깨닫게 합니다.
(…) 내가 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을 뒤엎고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당신의 작품은 그저 현대사회의 플래시적인 면만 보여줍니다.
무라카미 : 마우리치오, 내 작품은 현대 세대가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입니다.
카텔란 : 나는 예술이 경계를 넘어서고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도전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계속되는 논쟁)



챗GPT는 필자에게 “당신의 해석도 다양한 해석 중 하나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격렬한 논쟁 뒤에도 챗GPT는 항상 외교적인 결론을 도출하는데,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챗GPT :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자신의 예술을 통해 사람들이 주변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하고,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무라카미 다카시는 예술이 현대 세계와 그 모든 복잡성에 대한 찬사가 되어야 한다고믿었습니다. … 결국 카텔란과 무라카미의 논쟁은 예술은 주관적이며, 이를 접근하고 해석하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카텔란과 무라카미 같은 예술가들이 있는 한, 예술의 세계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성장하며 경계를 허물고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탐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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