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a Sem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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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01, 2013

에디터 고성연(파리 현지 취재)

이 시대 최고의 키워드 중 하나인 ‘창의성’을 둘러싼 이론은 다양하지만 타고난 ‘창조적 자아’가 일에 대한 꾸준한 열정,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는 시대와 주변의 조력자들을 만나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다는 데는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소프트 리더십’이 빛을 발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재능을 키울 줄 알기에 행복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앞뒤로 문을 열어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고, 위로 쌓아 올릴 수도 있어 유용한 다용도 수납장, Armoire Souple(Moustache, 2009).
“알파우먼들이 CEO가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알파맨과 결혼하고 마는 치명적인 실수를 공통적으로 저지르기 때문이다.”


수년 전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의 유명 칼럼니스트 루시 켈러웨이는 이러한 주장을 내세운 글을 실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많은 직장 여성들이 처음에는 탄탄대로를 걷다가도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건 자녀가 많아서가 아니라(구미 지역의 성공한 비즈니스 우먼들을 보면 의외로 자녀를 많이 두고 있다는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아내보다는 자신의 커리어를 훨씬 더 중시하는 ‘알파맨(실력을 갖춘 데다 야심도 큰 ‘능력자’를 의미)’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담았다. 당시 FT의 ‘재계 파워 우먼 50인’ 명단을 보면 대부분 가족을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어느 정도는 희생하고 조력자 역할을 맡는 소위 ‘베타맨’을 남편으로 둔 여성 리더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이 칼럼은 필자가 오래전에 읽은 독일 학자 잉에 슈테판의 저서 을 되짚어보게 한다(지금은 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된 상태다). 아인슈타인, 톨스토이, 마르크스, 헤르만 헤세 등 창조적 거장의 아내로서, 젊은 시절에는 남편 못지않게 출중한 재능을 드러냈지만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고 ‘들러리 인생’을 살면서 괴로워했던(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공을 세우고도 배우자의 그늘에 철저히 가려지기도 한) 여성들의 얘기를 담은 책이다.
솔직히 이 책의 주인공들이 실제와는 반대로 창의적인 재능의 날개를 실컷 펼쳤다고 가정했을 때에도 그들의 남편에 버금가는, 혹은 그 업적을 뛰어넘는 결과물을 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반드시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성과물을 내야만 행복했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지 않을까. 세계적인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박사가 말했듯이 ‘창의성’이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완전한 구현’이라고 보았을 때, 이들은 (저마다의 주변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자신의 끼와 열정이 향하는 분야를 발견했음에도 사회적인 제약과 주변의 압박에 둘러싸여 ‘자아실현’을 향해 도전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것이니 말이다. 재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 모를까, 내 안에서 뭔가 꿈틀거리는데도 ‘묻혀야 하는’ 느낌은 헛헛함과 패배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작금의 ‘알파 논리’로 해석하면 베타맨의 남성상은 그 비슷한 개념조차도 존재하기 힘들었던 시대에 불꽃 튀는 알파우먼과 알파맨의 성향을 지닌 남녀의 만남이었던 셈이다. 사실 요즘은 능력녀, 능력남을 배우자로 둘 수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베타맨, 베타우먼이 될 용의가 있다며 서로 ‘밀어주겠다’고 다투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던가.
이처럼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성이 자신의 커리어에서, 특히 창의적인 일의 영역에서 주도권을 잡으며 뻗어나가기란 여전히 녹록지 않다. 평생에 걸쳐 창의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온 하버드대의 교육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이러한 현실의 불균형에 대한 답의 단초를 제시했다. 그는 심리학과 생물학의 연구를 토대로 볼 때 빼어난 ‘창의적 혁신’은 대개 성인기(adulthood)의 전반부에 이뤄질 확률이 높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한창 일에 매진할 때가 여성이 육아에 시간을 할애해야 할 시기와 겹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물론 부분적인 원인을 따지자면 베타맨을 짝으로 만나지 못했거나 누가 뭐래도 알파맨만 원하는 알파우먼이 많아서일 수도 있겠다. 혹은 잠재적인 베타맨의 성향을 지녔는데도 사회의 편견 어린 눈총이 따가워 선뜻 나서지 못하는 남성이 은근히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인터뷰 시리즈에서는 잉에 슈테판의 저서에 등장하는 비운의 여인들과는 달리 ‘재능이 있기에 행복한 여성들’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중엔 ‘솔로 맘(mom)’부터 아이를 몸소 지켜보고 싶어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양육과 작업을 병행하는 열혈 엄마, 최고의 베타맨과 더불어 일과 가정을 꾸려가는 이, 그리고 거칠 것 없이 사는 ‘자유로운 영혼’도 있다. 저마다 자라온 배경도, 타고난 분위기와 성향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의 창조 영역에서는 확실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그녀들의 또 다른 교집합은 운명을 탓하지 않고 의연히 걸어가는 자세일 것이다. 일과 가정, 성공에 대한 경험담을 담은 베스트셀러으로 주목받고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페이스북의 셰릴 샌드버그 최고 운영 책임자(COO)가 강조하는 메시지처럼 마냥 완벽한 기회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가능성에 도전하는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이들의 행보는 유연하면서도 강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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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men Who Inspire Us_ interview 01

Inga Sempe

은은한 분위기에 감각적인 ‘한 방’을 살짝 곁들인 매력적인 디자인. 그리고 실용적이면서도 기능 과다에 함몰되지 않는 편안함. 중용의 미덕을 다룰 줄 아는 잉가 상페의 디자인 세계를 일컬어 “우아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매력을 담고 있다”고 표현한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수줍은 소녀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디자이너로 성장하다
사실 잉가 상페는 까다롭게 보일 정도로 내향적이고 수줍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말수도 적다. 하지만 직설적이다. 세상사에 시시콜콜 관심의 촉수를 뻗치지 않고 자신의 세계에 몰두하는 게 천성적으로 편한 유형인 듯하다. ‘내 일’을 해야 행복한 것이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한 탓에 2000년, 서른두 살이 돼서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뭐, 그렇게까지 늦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짝 후회했다고 한다. “솔직히 처음부터 나 자신의 브랜드에 도전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원하는 바였거든요. 그런데 자신감이 부족했죠. 그래도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하면서 배운 것도 참 많아요.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려면 제작 과정을 속속들이 파악해야 하니까요.” 데뷔 전에 그녀는 산업 디자인계의 거장 마크 뉴슨(Marc Newson),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던 앙드레 퓌망(Andre´e Putman) 밑에서 일을 배우며 기초를 탄탄히 쌓았다. 그렇지만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데는 그에 해당하는 걸림돌이 생기기 마련이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듯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도 자신의 몫일 테고 말이다. 그녀 역시 난제를 맞닥뜨렸다. 스튜디오를 열었지만 뭔가 답답했던지 이듬해 2001년 프랑스 정부 차원에서 재능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을 선정해 각종 활동을 지원하는 VIA 프로그램의 수혜자로 로마로 건너갔는데, 당시 디자인의 요소로서 주름(pleating)과 솔(brush)에 대한 프로젝트에 몰입했다. 이 과정에서 주름을 활용한 합성섬유 소재의 커다란 조명 갓을 만들었는데, VIA에서 지원한 전시회에서 이 램프의 프로토타입을 본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거장이자 ‘매의 선구안’으로 유명한 줄리오 카펠리니가 관심을 보였다. 여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굵은 주름을 잡아 2m에 가까운 완제품으로 만들어낼 방도를 누구도 알지 못했다. “카펠리니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아서 정말 기뻤지만, 주름에 대해서는 별 해결책이 없었어요. 그래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누비며 ‘주름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죠. 정말 힘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2년 정도 뒤에야 카펠리니 브랜드로 시장에 선보일 수 있었죠.”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큰 용기를 발휘해 잇따라 낚아챈 인생의 기회들
또 하나의 연구 대상이었던 ‘브러시’는 본인으로서는 자못 용감한 시도를 감행해 기회를 낚아챈 계기로 작용했다. 그녀는 브러시를 활용한 자신의 아이디어가 원초적이고 전위적인 감성으로 잘 알려진 가구 브랜드 에드라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정식 데뷔도 하지 못한 햇병아리 디자이너에게 에드라는 손쉽게 넘볼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러다 한 전시회에서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인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티나 모로치를 보자 용기를 쥐어짜내 그녀의 남편이자 에드라의 아트 디렉터인 마시모 모로치의 연락처를 물어봤다. “당시 극도로 부끄러움이 많았던 저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낸 셈이었어요. 사실 마시모는 처음엔 제 작품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마음을 바꿔 연락을 해왔지요. 이때도 제가 원하는 수준의 브러시를 구현해줄 전문가를 찾느라 참 고생했죠(웃음).”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브로스 컨테이너(Brosse Containers, 2003)’. 윤기 나는 긴 솔이 커튼처럼 드리운 디자인이 인상적인 장식장이다. 이를 계기로 30대 중반에 디자인계에 두각을 나타낸 잉가 상페는 파리 시에서 디자인 상을 받아 장식미술관에서 소규모 개인전을 개최하는 영예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 뒤의 활동은 그녀답게 차분하면서도 왕성하게 이어져오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프리미엄 가구 브랜드 리네 로제(Ligne Roset)와의 만남은 그녀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은근하게 강단이 느껴지는 디자인 언어를 발산하는 계기를 제공해준 듯하다. 세련된 타원형의 탁자 중앙에 장착한 동그란 고리를 활용해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루나티크 테이블(Lunatique Table, 2006)’, 그녀에게 확고한 명성을 안겨준 ‘루셰(Ruche´)’ 소파와 침대 시리즈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퀼트 느낌이 나는 패브릭 소재인 루셰 시리즈는 편안한 소재와 은은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색깔의 감각적인 배합이 돋보인다. 조명으로 출발한 그녀답게 잇따라 선보이는 다양한 램프도 눈길을 끈다. 카펠리니와의 협업에서 활용했던 주름 디자인을 진화시켜나가면서 물주머니나 조개 모양의 풍선을 연상케 하는 부드러운 느낌의 ‘증기 시리즈(Colored Vapeur Lamps)를 프랑스의 신성 브랜드 머스태시(Moustache)와 함께 내놓았고, 버섯 모양의 귀여운 디자인에 알루미늄 소재를 채용한 ‘w103’ 시리즈(Wa˙˙stberg)로도 주목받고 있다. 2010년 탁상 램프로 시작한 w103 조명 시리즈는 최근엔 단독으로도 쓸 수 있지만 작은 레일을 활용하면 여러 개의 제품을 예쁘게 연결할 수 있는 펜던트 조명(천장에서 늘어뜨리는)으로 이어지는 등 하나의 컬렉션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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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금자리이자 작업장, 그리고 양육의 전당이기도 한 스튜디오
이렇듯 줄기차게 달려온 커리어 여정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스튜디오이자 자택에서 두 아이를 길러냈다. 역시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남편과의 사이에 거의 열 살 터울이 지는 아들과 딸을 두고 있는데, 다섯 살짜리 딸은 유치원에 갔다 오면 작업실 옆방에서 통통거리며 놀다가 가끔 엄마를 찾는다(다른 가정의 아이 2명을 돌보게 하는 ‘보모 공유[nanny sharing]’ 시스템을 활용해 딸과 딸의 친구가 함께 놀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작업에 방해를 받기도 하지만(실제로 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는 인터뷰 중에도 달려와 인사를 했다) 집을 스튜디오로 삼으면 절약이 될 뿐 아니라 아이를 가까이 둘 수 있기에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집안일에 성심껏 임하는 든든한 남편도 있다. “우리는 서로 조력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요. 그런 배우자를 찾는 게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육아와 가사 문제를 공유하려는 의지가 없는 이와 함께 살려면 왜 결혼을 할까요? 여성 스스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녀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여성의 의지와 자유’에 대한 문제에는 강경하다. 화가이자 동화 삽화가로 활동하며 딸에게 많은 영감을 준 모친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녀가 젊은 시절 자주 받았고, 또 무척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던 질문은 몹시도 유명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의 생부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통하는로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팬을 거느린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 장 자크 상페. 하지만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잉가는 성장기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파리에서 자랐지만 원래 덴마크 혈통인 어머니 메트 이베르(Mette Ivers)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도 메트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아들 이름도 스칸디나비아풍인 코르넬리우스라 지었다. 그녀는 딱히 창조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누구나 어떤 특정한 분야에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해요. 단지 관심을 갖고 꾸준히 연마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죠. 저는 스케치를 참 좋아했어요. 지금도 제 아이디어의 원천은 드로잉이에요. 하지만 제 이복 남동생 같은 경우엔 그림에 영 재능이 없었죠. 어차피 부모님은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거나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냥 지켜만 보셨죠.”
‘소녀적인 맥가이버’ 성향이 농후한 그녀의 흥미로운 도전
그녀는 그리기와 만들기를 좋아했지만 예술가를 꿈꾼 적은 없단다. “예술 작품 구경보다는 바퀴나 스크루를 만지작거리는 게 훨씬 더 좋아요. 디자인도 좀 더 일상적이고 소탈한 물건을 선호해요. 이를테면 소품, 문구류, 나무 화덕 같은 것이죠.” 실제로 그녀는 필자가 들고 있던 손바닥 세 뼘만 한 앙증맞은 필기 노트와 얇은 휴대폰을 포착하더니 요모조모 뜯어보며 감탄하기도 했다. 이제는 점차 이 같은 ‘소녀적인 맥가이버’ 성향을 좀 더 반영한 프로젝트에 주력하려고 노력한다는 그녀의 결심이 반영된 흥미로운 결실이 있다. 2년 전쯤 프랑스의 가전 기기 업체인 르그랑(Legrand)이 무대 디자인을 의뢰하자 잉가 상페는 전기 소켓과 스위치 디자인을 같이 할 수 있다면 받아들이겠다고 ‘역 제안’했고, 소켓의 두 구멍을 돼지 코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부조 작품같이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프로토타입을 비롯해 참신한 시리즈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별다른 공구나 부품을 이용하지 않아도 벽에 부착시킬 수 있는 작은 선반이나 간단한 소품을 다루는 프랑스의 리빙 브랜드 머스태시와의 작품 활동을 상당히 흡족해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10대에 가장 즐겨 찾던 곳은 온갖 신기한 오브제로 가득 찬 벼룩시장이었다는 그녀의 고백(?)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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