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erie perrotin in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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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1, 2016

에디터 고성연

단색화 열풍이 뜨겁다지만 여전히 아트 경영에서는 갈 길이 먼 한국 미술계에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손님’이 찾아왔다. 파리에 본점을 둔 세계적인 화랑인 페로탱 갤러리(Galerie Perrotin)가 홍콩, 뉴욕에 이어 지난 4월 말 서울에 갤러리를 연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미술 시장의 잠재력을 꾸준히 눈여겨봤다는 이 갤러리의 설립자 엠마뉘엘 페로탱은 40대 후반에 불과하지만 이미 아트 딜러이자 경영자로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구축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아트 경영에 대한 그만의 철학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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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Birthday, Galerie Perrotin!’
지난 2013년 가을, 프랑스 북부 도시 릴이 자랑하는 비영리 문화 단체 릴3000은 ‘Happy Birthday, Galerie Perrotin’이라는 문구를 내세우면서 81명의 내로라하는 글로벌 아티스트를 아우르는 현대미술전을 개최한다고 알렸다. 1989년 파리에서 출발한 세계적인 화랑 갤러리 페로탱(Galerie Perrotin)의 탄생 25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그동안 페로탱과 인연을 맺어온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6,000m2에 이르는 넓은 공간에 펼쳐놓은 것이다. 일개 상업 화랑의 창조적 여정을 공공성이 강한 전시 공간에서 집중 조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파리가 예술과 문화를 이끄는 글로벌 허브라는 타이틀을 뉴욕에 넘겨줬다지만 여전히 국제적인 명성과 안목을 뽐내는 프랑스 갤러리가 존재한다는 자부심이 그 촉매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본인의 생일 파티를 스스로 마련하는 건 슬픈 일이지요. 그래서 친절하게도 우리를 릴에 초대했을 때 도저히 그 근사한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페로탱 갤러리 설립자 엠마뉘엘 페로탱(Emmanuel Perrotin)은 당시 릴3000의 제안에 이렇게 화답했다. 유머 감각이 넘치고 사교적인지라 유난히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데 익숙한, 그래서 노련한 그다운 대답이다. 엠마뉘엘 페로탱은 한 세대에 가까운 긴 세월을 아트 딜러로 활약해왔지만 아직 40대 후반이다(1968년생). 열여섯 살에 갤러리에서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고, 학교를 중퇴하고는 스물한 살에 자신의 아파트에 갤러리를 열면서 줄곧 한곳만 보고 달려온 자수성가형 CEO다. 현대미술계의 기린아이자 가장 몸값이 비싼 작가로 유명한 영국 아티스트 데이미언 허스트의 해외 첫 개인전(1991년)을 개최한 이력을 필두로 그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파리를 기지로 삼아 자신의 이름을 딴 갤러리 페로탱을 국제적으로 도약시킨 그는 2012년 홍콩에 직영 갤러리를 열었고, 이듬해에는 뉴욕에도 진출했다. 그리고 2016년 봄,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대림미술관 등 미술관과 갤러리가 밀집한 종로구 팔판동에 터를 잡은 갤러리 페로탱 서울의 아담한 전시 공간에서 그를 만났다.
서울을 네 번째 거점으로 택한 이유, ‘가능성’
사실 갤러리 페로탱의 한국 진출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드디어 서울도 아트 시장에서 국제도시 대접을 받는다며 반기는 반응도 있었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진정한 교류를 모색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저 막강한 외국 브랜드가 먹잇감을 노리고 한국에 불쑥 밀고 들어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불거진 것이다. 최근 한국 미술 시장은 단색화 열풍 덕에 활기를 띠고 있다. 하지만 경매 회사와 소수 갤러리만 승승장구할 뿐 업계 전반을 아우르는 성장은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더구나 글로벌화 차원에서는 갈 길이 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쟁을 해야 하는 국내 갤러리들 입장에서는 탄탄한 시스템과 네트워크를 갖춘 글로벌 강호에 경계의 날을 세울 만도 하다. 엠마뉘엘 페로탱은 이런 해석을 거둬달라고 당부했다.
“한국 시장을 눈여겨본 건 이미 4~5년이나 됐습니다. 급작스러운 결정은 아닌 거죠. 홍콩에 있는 우리 직원들이 귀띔을 해줬는데, 그걸 계기로 꾸준히 지켜보다가 단색화 작가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됐고요.” 실제로 갤러리 페로탱은 2014년부터 단색화 진영을 이끄는 박서보, 고 정창섭 작가의 개인전을 파리와 뉴욕에서 개최해오고 있다. 이미 한국 갤러리들이 꾸준히 소개해온 페로탱 소속 작가들을 둘러싼 ‘중복’ 이슈도 논쟁 거리로 꼽힌다. 그중에는 프랑스 출신 아티스트인 자비에 베이앙(Xavier Veilhan), 장-미셸 오토니엘(Jean-Michel Othoniel)처럼 한국에서 인지도가 꽤 높은 스타 작가도 있다(유명 작가들은 국가나 지역마다 소속 갤러리를 달리하는 경우도 많다). 그는 ‘지나친 걱정’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미 작가들이 잘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제가 끼어들 이유는 없어요. 한국 갤러리들이 잘해줬죠. 게다가 페로탱 작가 포트폴리오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에 새롭게 소개할 흥미로운 작가도 많아요. 페로탱에 소속된 작가가 50명 가까이 되는 걸요.” 창조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아트 딜러답게 그는 자신의 취향이 다분히 ‘절충적(eclectic)’이라면서 기회가 되면 ‘단색파’로 분류되는 거장 말고도 새로운 한국 작가들을 해외 무대에 소개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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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작가 사랑’을 바탕으로 쌓은 인맥
실제로 페로탱 소속 작가 명단을 훑어보면 꽤나 다채롭고 흥미롭다. 앞서 언급한 베이앙과 오토니엘을 위시해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무라카미 다카시(Murakami Takashi), 파울라 피비(Paula Pivi), 헤르난 바스(Hernan Bas), JR, 엘름그린 & 드라그셋(Elmgreen & Dragset), 파하드 모시리(Farhad Moshiri) 등 현대미술을 아는 이라면 귀를 쫑긋할 만한 작가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중 페로탱이 아시아 작가들에 별 관심이 없던 시기인 1990년대 초 유럽에 알려진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와 파격적인 작품 세계로 유명한 이탈리아 행위 예술가이자 조각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그와 20년 넘게 인연을 지속해오고 있다. 그가 별다른 밑천도 없이 미술계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다져온 ‘우정’이다.
“제게 성공 비결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이 많은데, 일단은 작가를 최우선으로 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돈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작가들이 원하는 걸 실현하도록 지원하는 거죠. 1990년대에는 제작을 지원하는 갤러리는 거의 없었는데, 저는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있으면 서슴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어요.”
그는 단지 잘 팔린다는 이유로 아티스트를 선택하는 갤러리는 쉽게 잊힌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많은 이들이 가치 상승을 기대하고 ‘투자’ 목적으로 작품을 사지만 그런 경우에는 후회로 이어지는 일이 많고, 그저 그 작품이 품고 있는 메시지나 의미가 마음에 들어 산다면 나중에 한숨지을 일이 없다는, 어쩌면 단순한 진리다. “데이미언 허스트나 바스키아의 작품을 몇백, 몇천 달러에 거래하던 시절도 있었어요. 그들의 가치가 그렇게 올라갈 것이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요. 그저 좋아서 사고파는 거죠.” 이처럼 아트에 대한 애정이 유난히 뜨거운 그이기에 작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 후원자이자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례로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1990년 자신의 사진집 ‘진정한 토끼, 에로탱(Errotin le Vrai Lapin)’을 만들 때 엠마뉘엘에게 분홍색 토끼 의상을 입혀 외설적인 동작으로 뛰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덕분에 그는 아트 딜러가 아니라 ‘모델’로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또 다른 이탈리아 출신 아티스트 파울라 피비가 자신의 사진 작품을 위해 가짜 카푸치노가 담긴 잔 5천 개와 살아 있는 표범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도 그는 그저 눈만 꿈벅거리고 있지는 않았다.
아트 경영의 정수는 시스템과 창의성
물론 애정과 열정만 쏟는다고 일이 잘될 리는 없다. 더구나 아트 비즈니스는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기 쉬운 ‘외화내빈’형이자 잘되는 곳만 잘되는 ‘빈익빈 부익부’ 성향이 큰 사업이다. 아트 경영의 허허실실을 파헤친 한 경제학자는 전 세계 주요 갤러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수익성 있는 블루칩 작가를 보유한 곳은 소수에 불과해 절반이 넘는 갤러리가 간신히 버티고 있고, 30%는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갤러리가 제대로 된 전략과 비즈니스 모델을 갖추기는커녕 기본적인 조직 관리나 순발력 있는 대응에 취약한 면모를 보이는 등 전반적인 경영 마인드가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엠마뉘엘 페로탱도 “아트 경영은 6개월만 손을 떼도 망가져버리기 십상인 ‘까다로운’ 비즈니스인데도 정작 많은 갤러리들이 경영이라는 단어를 낮춰본다”면서 장기적으로 내다볼 수 있는 전략적 비전부터 고객·작가 관리, 마케팅, PR에 이르기까지 단단한 시스템을 갖춰나가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시스템을 잘 가동시키는 데는 무엇보다 ‘창의성’이 요구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런 역량은 위기가 닥쳤을 때 드러나는 법.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지구촌을 휩쓸었을 때 그는 창조적인 리더십의 본보기가 됐다. 당시 모든 갤러리가 처참할 정도의 판매 상황에 벌벌 떨었고, 그 역시 6백만달러 규모의 매출이 취소되는 등 위기에 직면했지만 위축되지 않고 투자를 계속했다. 베르사유 궁전을 예술의 무대로 삼은 그자비에 베이앙의 대형 프로젝트도 이 기간에 탄생했다. 또 2009년 스위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에서 할리우드 스타인 퍼렐 윌리엄스와 무라카미 다카시의 협업 프로젝트를 발표해 세간의 이목을 쏠리게 만드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렇듯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행보를 보여온 그가 서울 갤러리의 개관전을 장식할 주인공으로 선정한 작가는 프랑스 출신의 작가 로랑 그라소(Laurent Grasso).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방식으로 초자연적인 현상부터 정치 권력, 집단 공포 같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영상, 조각, 회화, 사진 등 다양한 작업을 하는 이 범상치 않은 작가는 아마도 최근 한국에서 전시를 개최한 아티스트들 중 가장 우아하면서도 지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세계를 지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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