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trich Klinge in Weidelb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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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 2016

글 고성연 | 015년 뉘른베르크의 한 교회에서 보데 갤러리 주최로 열린 디트리히 클링에의 <ET-und-auch> 전시. 사진 Martin Frischauf.

과감한 생략과 절제미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감성과 품격. 한 평론가는 자아의 심연을 관조한 듯한 디트리히 클링에의 조각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우아한 기품은 정신적이며, 심지어 종교적이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시대와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폭넓은 스펙트럼과 내적 성찰의 깊이를 지닌 이 걸출한 조각가의 인생과 철학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바이델바흐의 집을 소개한다. 대구에 전시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뉘른베르크의 보데(Bode) 갤러리 덕분에 이미 그의 작품 세계를 접하는 행운을 누린 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년 5월 중순 대구 인당 뮤지엄에서 열릴 그의 전시를 기억해두면 좋을 듯하다. 예술의 본질과 시대를 초월하는 조각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값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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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이라 하면 자주 연상되는 나라인 고대 그리스에는 사실 오늘날 우리가 순수예술이라고 부르는 작품 세계를 일컫는 단어가 따로 없었다고 한다. 목공예든 조각이든 시 짓기든, 심지어 구두를 만드는 일이든 그리스어로 ‘테크네(techne)’의 영역에 포함됐다는데, 이 단어는 요즘 같으면 좋은 솜씨가 뒷받침되는 ‘수공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저명한 미국 철학자 래리 샤이너는 설명한다. 단지 단어의 유무가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순수예술의 범주가 존재하지 않았고 회화, 조각, 건축, 음악 등이 별도의 범주로 나누어지지도 않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그리스 조각을 봐도 영혼의 울림을 느끼는 경우가 꽤 많고, 그 이름 모를 조각가를 ‘예술가’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작품에는 단지 빼어난 손재주만 담긴 게 아니라 아니라, 본질적 성찰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자 끝없이 성찰하다
독일 조각가 디트리히 클링에(Dietrich Klinge)는 이런 울림이 있는 유서 깊은 조각 작품이나 오브제를 지긋이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는 걸 좋아한다. 적막 속에서 가만히 응시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그 대상은 말을 건넨다고 했다. “누가 만든 건지는 모르지만 의미 있는 건 그 작품 자체예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아티스트가 누군지 전혀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저와 대화를 하고 관계를 맺는 건 그 작품이니까. 그게 본질이니까요.” 그는 오늘날에는 ‘누구인지’가 몹시도 중요해지는 바람에 작가가 ‘스타’로 떠올라 인기를 얻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작품 값을 비싸게 받으려 하는 현실이 때로는 안타깝다고 했다.
의 말에 심히 동감하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그가 ‘클링에’라는 사실을 알아서 좋았다. 나무의 표면 질감이 드러나 마치 숲의 정령이라도 품은 듯 그의 신비스러운 청동 조각상을 보면 작가명이 붙어 있지 않더라도 의심할 여지없이 ‘클링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담아내는 모티브는 꽤 다양하지만, 구상인데 마치 추상 조각 같은 느낌이 들고 기품과 절제미가 흐르는 동시에 왠지 유쾌하고 기분이 편안해지는, 특유의 조형적 언어와 오라가 공통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의 어느 예술가처럼 클링에가 ‘무명’이나 다름없었다면 우연히 작품을 접했다 하더라도 ‘작가 미상’이라 그저 그 존재를 못내 궁금해하기만 했을 게 아닌가. 하지만 유럽에서 이미 ‘대가’로 여겨지는 그의 존재를 몇 년 전부터 알게 돼 좋았고, 첫눈에도 끌림이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팬심과 호기심이 솟았던 덕에 마침내 직접 찾아가 만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목수와 대장장이의 일상을 꾸려가는 철학자
물론 그 여정은 꽤 멀고도 험(?)했다. 그의 자택이자 작업장이 독일 뉘른베르크에 도착해서도 자동차로 2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바이델바흐(Weidelbach)라는 외딴 마을에 있어서다. 조각가들은 크고 거친 재료를 다루는 일이 많은 데다 조용한 사유의 삶을 추구해서인지 도심에서 벗어난 한적하고 널찍한 공간에서 작업하기를 선호하는 듯하다. 프랑코니언 지방의 색채라는 따스한 노란색 벽, 붉은 지붕,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밭에 놓인 클링에 특유의 커다란 조각 작품들. 내부에는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아니, 외려 너덜너덜해진 카펫과 낡은 가구를 보노라면 ‘매끈한’ 인테리어와는 거리가 멀지만 누가 봐도 아티스트의 공간임을 짐직할 수 있는 그림과 조각, 고서, 안목이 느껴지는 소품이 어우러져 있다.
그런데 사실 클링에의 집은 25년 전인 1991년, 폐가나 다름없던 건물을 사들여 그가 ‘회생’시켰단다. 그것도 장장 7년이란 시간에 걸쳐 직접 공사를 했다. 심지어 금고가 달린 서랍장이나 책상 같은 가구까지 제작했다. “당시 무너져가는 건물과 땅을 사두기는 했지만 제겐 공사를 할 만한 목돈이 없었고, 일하느라 바빠서 시간도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주말 같은 휴일에만 들러 열심히 집을 재건했죠. 은행에서는 젊은 아티스트에게 대출을 잘 해주지 않거든요.”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뭐든지 알아서 뚝딱 만들어내는 습관은 어릴 적부터 지녀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클링에의 부모는 1960년대 동독에서 슈투트가르트로 이주해온 터라 아무런 밑천 없이 가정을 꾸려야 했고, 그는 형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번다거나 원하는 게 있으면 아예 스스로 만드는 법을 배우는 식으로, ‘자체 조달’하는 삶에 익숙했다고.
그가 예술 학교를 나와 작가로서 처음 전시를 하게 됐을 때도 이런 ‘메이커’ 면모가 빛을 발했던 일화도 있다. 당시 그의 동판화 시리즈를 보고는 베를린의 한 갤러리가 전시 제안을 했는데, 클링에는 카펫 대신 마룻바닥이 깔린 전시 공간을 마련해달라는 요청만 했다. 도록을 프린팅하는 일이나 작품을 포장·운반하는 일 등은 스스로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시일이 다가와 그가 차에 작품을 싣고 그곳에 갔을 때 목재 바닥은 준비돼 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솜씨를 발휘해 직접 공사를 했고, 원하는 방식으로 성공리에 데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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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링에를 예술 세계에 바짝 다가가게 한 인물은 뉘른베르크 출신의 판화가이자 조각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였다. 수백 년 앞서 살다 간 인물이지만, 르네상스 미술 등을 연구하면서 이론가로도 큰 자취를 남긴 뒤러의 자취에 클링에는 큰 감명을 받았다.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도 알아야 합니다. 아티스트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뭔가 새로운 걸 해냈다고 뿌듯해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미 예전에 있었던 게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창조된 건 그저 속이 빈 또 다른 껍데기일 수 있어요.”
그의 소속 갤러리 대표이자 친구인 보데 갤러리의 클라우스 보데는 클링에의 창조 철학에 대해 대상을 응시하고(seeing), 내적 깊이를 꿰뚫고자 성찰하고(reflecting),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뭔가를 더하면서(adding), 탈바꿈시키는(transforming) 수순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뭘 새롭게 더하려는 걸까? “대상을 관찰할 때 제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를요.” 순간, 아는 만큼 보인다는 평범한 진리가 뇌리를 스쳤다. 마침 다양한 인간 군상이 한데 모여 있는 듯한 클링에의 작업장 한편에 놓여 있는, 아직은 형체가 불분명한 커다란 나무 상태의 작업을 가리키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저기에선 뭐가 보였나요?” 그러자 그는 진지한 어조로, 그러나 살짝 장난스레 답했다. “여인이죠. 아니, 그게 안 보였단 말인가요?” 그러고 보니 그건 그의 뮤즈와도 같은 ‘다프네(Daphne,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로, 자신을 사랑하는 아폴로에게서 도망치다가 월계수로 모습을 바꾼다)’ 시리즈를 닮았다. 함부로 가늠하기 힘든 애틋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클링에의 다프네를 미완성 상태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여정은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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