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역사는 실패와 재기의 교훈과 현재의 영광을 그대로 투영하는 거울이다. 2백여 년의 유서 깊은 하우스에서 전통과 혁신의 테마를 일궈낸 인간의 욕망과 위대함은 시계 기술력의 현재가 역사 안에서 비로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과거’라 쓰고, ‘현재’라 읽어도 좋을 만큼.
2 뤼 드 라페 13번지의 까르띠에 주얼리 살롱을 재현한 스케치(약 1910년으로 추정).
3 매혹의 까르띠에 컬렉션(Sortilege de Cartier Collection)은 당대의 여신으로 모니카 벨루치를 꼽았다.
5 1915년 제조된 산토스 손목시계. 광택이 우아한 8개의 스크루로 고정한 18K 옐로 골드 베젤과 카보숑 장식의 크라운이 현재 산토스 워치가 계승한 부분이다. 이 밖에도 로만 인덱스, 기찻길의 형태를 도입한 레일로드 분 트랙이 클래식한 정취를 머금고 있다. 당시 모델은 예거 르쿨트르의 무브먼트를 장착했다.
6 까르띠에의 시계 제조 술력이 응축된 스위스 라쇼드퐁의 매뉴팩처 전경. 2005년부터 인하우스 무브먼트 제작을 목표로 3만㎡의 부지 위에 세워진 이 거대한 매뉴팩처 안에는 평균적으로 총 1백75개 분야의 정밀한 시계 제조 과정이 테크니션들에 의해 매일 이루어진다.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자신의 스승이자 보석 세공자인 아돌프 피카르 드로부터 보석 사업을 인수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고,1847년 당시 프랑스는 아프리카 북서부의 알제리아를 정복한 덕분에 매년 축제 분위기였다. 마스터급 주얼러인 아돌프의 도제로 폭넓은 보석 제조술을 연마해온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당시 파리가 원하는 보석 장신구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실물과 똑같은 형태를 재현하는 카메오(cameo) 인그레이빙 기술을 바탕으로 섬세한 세공력을 보여주는 보석은 특히 귀부인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의 아들 루이 프랑수아 알프레드는 1874년부터 손목시계와 클락을 제조하며 아버지의 보석상 일을 도왔다. 그는 귀족의 손목에 화려하게 안착할 체인 손목시계를 제조하는 일에 열의가 대단했다. 1888년 3개의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여성용 손목시계가 까르띠에 보석상 쇼윈도를 장식했다. 두 번째 손목시계는 12년이 지난 뒤에나 선보일 수 있었다. 제작 속도도 문제였지만, 주인을 찾는 시간 역시 더뎠다. 주인을 만나는 데 7년
이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성공의 신은 까르띠에의 편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긴 소매 드레스가 점차 사라지고 손목을 드러내는 슬리브리스 드레스가 붐을 이뤘다. 긴 드레스 장갑을 끼는 것 역시 철 지난 유행이었다. 여성들은 글로브 없이 우아하게 연출할 수 있는 방편으로 주얼 손목시계를 착용했고, 파리의 보석상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성공의 기류에 편승해 1898년 당대 파리 최고의 패션 가문의 후계자였던 앙드레 캐롤린 워스와 알프레드의 아들인 루이 까르띠에가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까르띠에는 본격적인 로열 소사이어티에 입성해 진정한 로열 패밀리의 고급문화와 우아함을 보석에 정착시켰다. 워치 메이커로 유명한 에드몬드 예거(예거 르쿨트르의 창시자)의 기술력이 까르띠에의 명성과 조우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둘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수동 무브먼트(zero-one-zero)를 장착한 여성용 브레이슬릿 워치를 까르띠에의 이름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배가 볼록한 토노형 케이스 시계를 개발하기도 했고, 카보숑 컷으로 화려한 빛을 발하는 크라운도 제조해냈다. 이 화려한 전성기에 루이 까르띠에는 쾌활한 성격의 플레이보이, 알베르토 산토스 듀몽과 친분을 쌓게 된다. 브라질 태생의 산토스 듀몽은 모험가 취향의 취미 생활을 즐겼는데, 그중 하나가 열기구나 비행기를 제조하거나 조종하며 여행을 즐기는 일이었다. 1906년 11월 12일, 횡단 비행 기록에 도전하는 그를 위해 루이 까르띠에가 선물한 것이 최초의 남성용 손목시계로 알려져 있다. 바로 ‘산토스’ 워치다. 1911년 공식적으로 출시된 산토스는 회중시계 일색이던 남성 시계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산토스의 출현으로 비로소 시계의 맥박과 남자의 맥박이 그 거리를 좁혔고, 이는 회중시계를 보관하던 수트의 포켓에 변화 를 가져오기도 했다.
루이 까르띠에의 창조력은 마이더스의 능력에 가까웠다. 거북이 등을 모티브로 한 토르투(Tortue)와 둥근 욕조 모양에서 영감을 받은 베누아(Baignoire) 모두 까르띠에의 화려한 서막을 장식했다. 전시 중이었음에도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해방되는 그 순간을 기념할 시계를 만들 궁리를 하던 루이 까르띠에는 1916년 9월 15일, 솜(Somme)강 전투에서 영국군이 적진을 향해 몰던 최초의 탱크에서 영감을 받아 결국 탱크 워치를 완성했다. 1933년 마라케시 왕국 파샤 왕자의 주문에 맞춰 방수 기능을 적용한 최초의 파샤 워치를 왕가에 헌정했다. 이처럼 전 세계를 여행하며 당대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석과 시계에 두루 반영해낸 루이 까르띠에는 1942년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까르띠에가 진정한 워치 메이커로서 성장한 것은 1976년, 레머스트 드 까르띠에 컬렉션을 출시하면서부터다. 2년 후 골드와 스테인리스스틸 케이스의 산토스 워치를 선보였고, 1985년 파샤 워치가 그 뒤를 이으며 까르띠에는 그동안 제조되었던 시계 모델을 연대순으로 다시 세상에 선보였다. 과거의 유산 안에 가야 할 미래가 존재함을 일찍이 깨우쳤던 것이다.
이처럼 까르띠에는 묵묵히 시간의 영속성(timeless)을 몸소 보여주었다. 현재 까르띠에는 뛰어난 기계식 시계 제조 기술로 크로노그래프를 비롯해 투르비용, 애뉴얼 캘린더 그리고 미니트 리피트 등 복잡한 기능을 탑재하며 하이 컴플리케이션 워치의 반열에 올라섰다. 근현대사를 같이하며 최고의 워치 메이커로 우뚝 서기까지 까르띠에는 그유산을 심장 밑으로 내려놓은 일이 없다. 까르띠에가 왕의 보석상, 보석상 중의 왕인 명백한 이유 중 하나다.
1, 2 피아제의 라코토페 매뉴팩처 변천사.
3 오팔 다이얼의 신비로운 색채가 일품인 1970년대 빈티지 워치. 미세한 링크가 통합되면서 다채로운 아르데코 장식을 표현한 브레이슬릿은 오팔의 화려한 색채와 조화를 이루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4 2010년에 선보인 피아제 알티플라노 핑크 골드. 4시 방향에 스몰 세컨즈를 배치해 셔츠 소매에 가려지는, 드레스 워치의 기능을 강조한 남성 손목시계다.
5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하드 스톤 다이얼과 옐로 골드의 독특한 텍스처로 완성된 아방가르드한 커프 워치. 1980년대.
조르주 피아제는 자신의 농장이 있는 작고 아름다운 산기슭에서 정밀하면서도 장인적 기품이 살아 있는 포켓 워치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쥐라 산맥에 자리한 라코토페(La Cote-aux-Fees)는 요정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봄이면 천지가 튤립으로 뒤덮이는 아름다운 산골이다. 조르주 피아제가 평화로운 이 언덕에서 만든 포켓 워치의 명성은 뇌샤텔 지역까지 알려졌다. 1911년 조르주 피아제의 아들, 티모시 피아제는 가업을 매뉴팩처로 확장하며 손목시계를 제조하기 시작했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진 피아제 매뉴팩처는 조르주 피아제의 손자인 제랄드 피아제와 발렌틴 피아제 시대에 최고의 성장기를 맞이한다. 1957년 두께가 2mm에 불과한 무브먼트가 개발된 것이다. 바로 칼리버 9P.
수동 무브먼트인 9P의 출시는 당시 울트라 신 무브먼트 개발에 한창 열을 올리던 스위스 시계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1960년에는 오토매틱 무브먼트로 울트라 신을 확장한 12P를 출시했는데,이 칼리버의 두께는2.3mm에 달했다.
초박형 무브먼트 제작을 위해서는 모든 부품이 초박형이어야 함은 물론이고 얇은 부품들이 연동하며 충격을 견디게 하는 제조 기술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얇은 무브먼트 조립, 금과 은, 플래티넘과 같이 귀한 금속만으로 시계를 완성한다는 고집, 기술력을 바탕으로 최대한 우아한 시계를 만들어낸다는 피아제의 철학은 울트라 신 워치 외에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폴로 워치의 창창한 계보, 하이 주얼 워치의 화려함 또는 절제와 독창성으로 이어졌다. 1970년, 쿼츠 시계의 압도적인 양산으로 스위스 기계식 시계는 총체적인 위기를 맞이했다. 피아제는 당시 더욱 화려하고 진귀한 스톤으로 다이얼을 완성한 쿼츠식 시계를 제조하며 이위기를 무난하게 넘겼다. 당시 재키 케네디와 지나 롤로브리지다, 앤디 워홀까지 피아제의 예술적 가치를 탐미한 유명인들이 피아제의 익셉셔널 피스를 착용했고, 피아제는 달리의 자유로움을 담은 아트피스를 시계에 접목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록펠러와 같은 대자본가가 뉴욕의 현대 미술주류를 지배하던 1970년대, 오닉스와 타이거 아이, 아름다운 청록색 터키석과 군청색의 청금석 등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다양한 컬러의 스톤으로 완성된 엘로 골드의 쿼츠 시계들은 예술가들의 눈에 먼저 띄었다. 1988년피아제는 방돔 그룹, 지금의 리치몬트 그룹에 입성했다. 이후 포제션을 비롯한 타나그라, 라임라이트, 미스 프로토콜과 같은 하이 주얼 워치를 비롯해 알티 플라노와 엠페라도를 비롯한 블랙 타이 컬렉션의 남성 시계를 진보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전통적 라인의 계보를 따라 다양한 기능을 탑재하며 하이 컴플리케이션 워치도 제조해 거대한 워치 메이커로서 풀 라인업을형성했다. 현재 라코토페와 플랑레와트에 심장을 둔 피아제 매뉴팩처는 무브먼트 개발을 인하우스로 완성하는 워치 메이커 중 고도의 기술력을 갖추고 탄탄한 연식과 전통을 기반으로 한 몇 안 되는 워치 메이커라 할 수 있다. 이는 “가능한 한 더 잘하라, 그것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말을 남긴 조르주피아제의 공명과 함께 남아 있다.
1 2004년 재현된 화이트 래커 다이얼과 화이트 골드 케이스의 PA49 워치.
2 에스텔 아펠과 남매인 루이 아펠은 1911년 반클리프 아펠의 가업 비즈니스에 합류했다. 루이는 그의 아내 헬레네와 당대 최고의 우아한 커플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루반 워치를 손목에 찬 루이 아펠의 모습.
3 붉은색 모로코 가죽의 파우치에 장착된 셔터 워치. 양쪽의 피봇을 돌리면 셔터가 열리듯 다이얼이 모습을 드러낸다. 당시 우아한 여성들의 여행용 파우치에 사용되었다(1931년).
4 2011년 출시된 반클리프 아펠의 엑스트라오디너리 다이얼 컬렉션. 소설 <기구를 타고 5주일> 속 남아프리카 대륙 여행을 에나멜링과 젬 세팅으로 다이얼에 옮겨놓은 마스터피스다.
5 옐로 골드 케이스의 슬라이딩 워치 컬렉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여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반클리프 아펠은 에스텔 아펠과 알프레드 반클리프의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에스텔은 다이아몬드 상인의 딸이었고, 알프레드는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보석 세공사였다. 에스텔의 오빠인 찰스 아펠과 알프레드 반클리프는 두 가문의 명예를 영원히 유지할 묘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1906년, 파리 방돔광장 22번지에 반클리프 아펠의 최초 부티크를 열었다. 초기에 제조된 시계는 대부분 주얼 피스로 우아함을 추구했다. 우아한 신사와 귀부인은 시간을 말해주는 방식조차 우아하기를 원했다. 1934년 제조된 미노디에르(Minaudiere)는 립스틱이나 손수건, 퍼프와 열쇠등을 소지할 수 있도록 개발된 보석함으로 오늘날 파우치와 같이 외출 시 이용했다. 당시 철도업계 거물의 부인인 플로렌스 제이 굴드(Florence Jay Gould)의 주문을 받아 완성한 것으로, 출시 이후 귀부인들의 요청이 쇄도했으며, 손잡이 끝 부분에 부착된 시계는 개폐 방식의 다이얼을 달아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시계를 보호했다. 아르데코 문양에 사용된 보석은 오닉스, 사파이어, 루비 등 경계가 없었고, 보석 사이에 틈이 없이 세팅하는 기법인 미스터리 세팅을 접목한 것도 있었다. 이 미스터리 세팅은 오랜 시간 반클리프 아펠의 보석 제품에 사용되어오다가 1990년 특허를 획득하기도 했다. 주문 제작의 보석과 브레이슬릿 워치로우아함의 극치를 이루던 1938년, 알프레드 반클리프가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딸 르네 레이첼 퓌상을 비롯한 2세대들은 1942년 미국 이민을 떠났고, 뉴욕 5번가에 첫 부티크를 열었다. 이로부터 1999년 리치몬트 그룹에 입성하기까지 반클리프 아펠은 줄곧 가문의 후손들이 경영했다.
반클리프 아펠이 최초로 가죽 스트랩의 손목시계를 출시 한 것은 1923년의 일이다. 그러나 당시 귀족들은 반클리프 아펠이 진귀한 보석으로 화려한 아르데코 문양이나 자연을 형상화한 브레이슬릿 워치를 제조해주길 바랐다. 1949년 제작된 반클리프 아펠의 PA49는 1944년 가업에 동참한 피에르 아펠이 탄생시킨 남성용 드레스 워치다. 라커드 다이얼에 연약한 듯 섬세한 블랙 라인의 인덱스와 핸즈가 묘하게 교차하는 이 드레스 워치는 순전히 파티를 즐기는 자리에서 턱시도에 어울릴 시계를 갖고 싶어 제조한 모델이다. 향후 이 시계는 큰 반향을 일으켜 많은 남성들에게 크게 어필했으며, 2004년 반클리프 아펠은 PA49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반클리프 아펠은 창조에 뛰어난 프렌치 감각을 발휘했다. 네오리얼리즘의 대가인 영화감독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는 자신의 영화 <워먼 타임즈 세븐 Woman times seven> (1967)을 제작하며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의상을 담당해 일약 스타일링의 거장으로 떠오른 루이스 알렉산드르 레이몬(Louis Alexandre Raimon)의 솜씨를 빌렸다. 비토리오는 영화에서 당시 가장 매혹적인 파리지엔의 스타일을 리얼하게 완성해야만 했다. 루이스는 여배우들의 옷장을 펜디와 피에르 가르댕으로 가득 채웠으며, 그녀들의 목과 손목을 반클리프 아펠의 보석과 시계로 장식했다. 반클리프 아펠의 상상력과 판타지는 아름다움을 원하는 여성이라면누구라도 빠져들 만한 세계였다.
21세기 들어서 출시된 반클리프 아펠의 기계식 시계는 상식을 뛰어넘어 형 이상학적인 면이 있다. 레트로그레이드 기능을 수행하도록 지령을 받은 요정이 시간을 알려주고, 진귀한 돌과 자개로 거대한 자연을 재현한 시계를제조한다. 이는 꿈꾸는 자와 성실한 자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세계다. 1백여 년 동안 오직 최고의 고급 시계를 제조해온 가문은 모든 것이 진보된 현재에도 오직 그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2 우아한 인그레이빙과 최초 디지털 연도 표시창을 선보인 IWC의 컴플리케이션 워치.
5 2011년 출시되어 큰 호응을 얻고 있는 포르토피노 크로노그래프. 빈티지 무드의 푸시 버튼과 심플한 서브 다이얼의 배치가 네오 클래식을 추구하는 남성들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누구라도 파일럿 워치 하면 IWC의 마크 컬렉션을 언급할 정도로현재 IWC는 시계 시장의 핵심적 위치에 있다. 이는 그리 순탄하지만 않았던 IWC의 1백50여 년 역사와 위기를 덤덤하게 이겨낸 철학이 배후에 깔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868년 인터내셔널 워치 컴퍼니(IWC)라는 미국식 이름의 레이블로 시계 제조를 시작한 인물은 플로렌틴 A. 존스. 그의 조상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이주,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에 식민지를 개척한 영국의청도교파인 필그림 파더스 중 한 명이었다. 이주민 1백2명 중 플로렌틴 존스의 조상은 시계 수리공이었다. 당시 이주민들이 모두그랬듯, 개척 정신이 투철했으며 플로렌틴 역시 자신의 가문이 정착한 뉴햄프셔의 화이트 산맥에서 시계 제조업을 시작했고, 14세의 나이에 보스턴으로 도메인을 옮겨 워치메이커로 활동하던 중 1869년 돌연 스위스 샤프하우젠으로 업장을 옮겼다. 귀족들을 상대로 쿠튀르 워치 제조가 성행하던 당시, 플로렌틴존스는 다른 시계와 달리 좀 더 저렴하고 실용적인 시계를 제조해 미국으로 수출하고 싶어 했다. 덕분에 제조 공정은 산업화되었고, 손으로만 시계를 만들던 스위스의 다른 워치 메이커들과 상당한 차별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라인강 주변으로 분포해 있던 은행가에서는 이런 취지의 사업에 투자하려 하지 않았고, 1879년, 결국 플로렌틴의 시계 제조 공장은 폐업 위기에 처했다. 당시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주류가 유럽을 강타했다.
전기식 기계로 제품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기술력만이 주가를 올릴 수 있었고, 기계를 유입해야 하는 공장은 그 규모가 거대해졌다. 공장 소유주들은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플로렌틴의 IWC 역시 28만 스위스프랑이라는 금액에 라우첸버그라는 공장 소유로 매각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IWC의 가치에 비해 반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그로부터 1백여 년간 IWC는 가문이 대를 이어 경영하는 체제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IWC는 괴링의 최강 독일 공군 전투기 부대인 루프트바페(Luftwaffe)에 파일럿 워치, 마크 11을 제공하기도 했다. 소프트 링을 케이스 안에 장착해 안티 마크네틱 기능을 선보인 마크 11은 현재 대표적인 컬트 워치로 수집가들 사이에 수천 유로에 육박하는 가격 차이를 보이며 거래되고 있는 희귀 모델이 되었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 공군의 폭탄을 맞아 샤프하우젠 공장은 폐허가 되기도 했다(차후 공식적으로 폭탄은 오발이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IWC는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다. 배터리 시장이 세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금값이 오르는 현실은 마침내 가격이 저렴한 쿼츠 시계 시장의 선점을 예고하고 있었다. 당시 IWC의 시계 제조 공정을 총괄하던 오토 헬러(Otto Heller)는 최고가의 회중시계 제작을 선포했다. 동시에 페르디난드 A. 포르쉐와 긴밀한 협조를 이루며 모던한 손목시계와 케이스 디자인을 개척해냈다. 지금의 벤처 정신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스위스은행협회로부터 자본을 유입하는 데 성공했고, 군터 블럼라인(Gunter Blumlein)이 새로운 총괄 디렉터로 기용되면서 공격적인 제조 기술력과 광고 캠페인 전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0년, 그는 예거 르쿨트르와 랑게 운트 죄네를 비롯해 IWC로 보유하던 자신의 총 지분을 리치몬트 그룹에 매각했다. 당시 금액은 28억 스위스프랑이었다.
온갖 거친 풍랑을 만나면서도 IWC는 그 본업에 충실해왔다. 범용 무브먼트인 ETA의 무브먼트 개발에 참여했고 각종 하이엔드 워치를 탄생시켰다.
엔지니어, 포르투기즈, 포르토피노 컬렉션을 비롯해 퍼페추얼 캘린더의 복잡한 기능을 탑재한 다 빈치 등 남자들의 로망으로 남을 풀 라인업을 갖춘 최고의 매뉴팩처로 거듭났다. 또 38.2mm의 메가 오토매틱 무브먼트의 출시는 손목시계의 케이스 지름의 판도를 바꿔놓는 트렌드의 핵심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IWC의 역사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낮은 곳에서도 본업을 잊지 마라. 우린 늘 고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현재를 살아내야만 한다” 정도의 교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