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utiful Resis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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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7, 2017

글 정승혜

Interview with_ Samia Halaby

역사는 굴곡지더라도 아티스트의 예술적 영혼까지 잠식할 순 없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 아랍 아트 신을 대표하는 팔레스타인 추상화가로
단단히 뿌리를 내린 사미아 할라비(Samia Halaby)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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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만날 땐 긴장보다 설렘이 먼저 인다. 한 분야의 거목(巨木)이 지내온 물리적인 삶의 시간과 그 사이에 켜켜이 쌓였을 경험과 지혜 때문이다. 올해로 만 80세를 맞이한 팔레스타인 출신의 추상화가 사미아 할라비(Samia Halaby)와의 만남은 그래서 더 특별했다. 그녀의 인생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참담한 역사의 시작과 함께한 유년기, 미국 이민자 신분으로 치열하게 버텨낸 청소년기, 현대미술의 중심지 뉴욕에서 단지 출신만으로 ‘비주류’ 취급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추상화가로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온 50여 년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4월의 어느 날, 사미아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노란 튤립 한 다발을 들고 뉴욕 트라이베카에 위치한 그녀의 스튜디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전형적인 뉴욕의 오래된 건물 2층으로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사미아가 먼저 나와 반긴다. 작업실 겸 보금자리로 쓰이는 기다란 직사각형 공간은 주인의 검박하고 담대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 50년 작업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거실 한가운데, 침실 벽면, 작업실 구석 등 곳곳에 무심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의 눈이 구(球), 실린더, 나선, 원형 등의 사물을 바라보는 과정을 빛과 그림자 효과 등을 통해 정교하게 탐구한 초기작 시리즈,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색깔을 채집해둔 듯한 컬러 시리즈, 페인팅을 하나하나 오려서 모빌처럼 콜라주한 설치 작품 시리즈 등 눈길 닿는 곳곳마다 그녀의 예술혼이 담담하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녀가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이 1976년. 당시 많은 아티스트들이 숙명처럼 여긴 뉴욕에 그녀 역시 설렘을 안고 입성한 지 40년이 넘었다. 그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고 생각하니 책장 모서리, 바닥의 페인트칠마저도 다시 보게 된다. “집주인이랑 오래 알고 지내서 렌트비도 적정하게 맞춰줬어요. 몇 년 전 그이도 저세상으로 가버렸지만.” 뉴욕의 악명 높은 집세부터 떠올린 필자에게 살짝 당황스러울법한 이야기를 참 나직하게도 건넨다. 그리고 얼마 전 그녀의 개인전이 열린 두바이에서 사 왔다는 로즈힙 차를 끓이며 예술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인생담을 들려주었다.

영원한 추방, 영원한 그리움
사미아는 지금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기 전인 1936년, 성공한 도매 수입상의 딸로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지중해 서안에 위치한 텔아비브의 고대 항구도시 ‘야파(Jaffa)’에서 보냈는데 ‘팔레스타인의 신부’란 별칭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어린 사미아는 친구들과 형제자매를 위해 나름의 ‘콜라주’를 선물하길 좋아하던 소녀였다. “제가 우리 가족 중 첫 아티스트이고, 언니 오빠는 다 과학자예요. 그래서 저도 언니들 따라서 과학이나 수학을 공부해볼까도 생각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그림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하니 미술 공부를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하셔서 시작하게 됐죠.” 단란하고 평범하던 일상은 그녀가 12세가 되던 1948년, 이스라엘 시오니스트(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 세력)들에게 강제 추방당하면서 산산조각이 난다. 잠시 머물던 레바논 베이루트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팔레스타인 학생들의 시위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상처처럼 더 깊이 남게 되기도.
1951년, 할라비 가족은 결국 미국 이민을 결정하고 오하이오 주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적응은 쉽지 않았다. 당시 보통의 미국인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알지 못했고, 일부 선동가들은 유대인은 선택받은 고결한 집단, 팔레스타인인은 테러리스트라고 몰아갔기 때문이다. 사미아의 오빠는 팔레스타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막 이주해 왔을 당시, 한 지역 신문이 ‘People from Holy Land’란 주제로 우리 가족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어요. 신문이 나오고 가족과 둘러앉아 같이 읽어보았는데, 피부 색깔부터 자세히 언급하더군요. 그런 식의 인종차별은 처음이었어요.”
1960년대 초 커리어 노선에 뛰어든 이래 사미아는 인디애나대, 하와이대 등 미국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화가이자 교직자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는데, ‘팔레스타인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인지 그 과정도 그리 만만치 않았다. ‘첫 정규직 이민자 여교수’로 예일대 미대에 재직했을 때도 몇몇 시오니스트 교수들의 반대로 약속됐던 영구 교수직 재계약이 무산되는 등 부당한 대우는 끝이 없었다. 하지만 시련은 그녀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디에서 왔는지 자각하게 해주었고, 결국 그녀를 더 강해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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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 현실을 아름답게 재해석하는 창
그런데 왜 ‘추상화’라는 장르를 택하게 됐을까? “어머니가 미술 공부를 권유했을 때만 해도 상업 미술로 돈 많이 벌어야지, 싶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추상화가는 적어도 정부 관료나 CEO를 위한 그림은 안 그려도 되잖아요?”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대학 시절 큐비즘과 러시안 구성주의 등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추상이 ‘리얼리티’, 즉 보통의 자연과 사실을 사진보다 흥미롭게 묘사할 수 있는 진화된 장르여서 매료됐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상은 실재가 없는 상상 속 이야기만 다룬다’고 오해한다면서.
한때 사미아는 가을날 거리를 수놓은 나뭇잎에 반해 1천여 개의 각기 다른 잎을 책 안에 책갈피처럼 모아두고 잎맥과 표면을 살피며 영감을 얻은 적도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한 원초적 끌림의 근원은 어디서 온 것일까.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1964년에 처음으로 이집트, 터키, 시리아 등 아랍 문화권을 다시 방문하며 자신에게 내재된 자연애(自然愛)의 뿌리, 그리고 아랍식 추상미술에 대한 끌림을 확인했다. “서양미술사를 공부할 땐 단순히 ‘우리가 최고, 우리가 제일 아름답다’고만 하고 실용적인 면만 강조해서 지루했어요. 아랍 여행 때, 특히 바위 사원을 돌아볼 땐 아랍 미술 특유의 기하학적 정교함과 자연에 대한 존중이 깃든 해석을 보고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죠.”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주요 요소는 ‘컬러’다. 신시내티대(Univ. of Cincinnati)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던 학부 시절, 왜 일몰은 빨강인지, 왜 하늘은 파란지, 가을이면 나무 색은 어떻게 변해가는지 등 색에 대해 한층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또 시간이 갈수록 사미아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는 ‘밝은 색감’은 1980년대, 캔버스의 대체제로 ‘AMIAGA’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용해 ‘키네틱 페인팅’을 하던 시기에 떠올리게 됐다. “오일 페인팅을 할 때는 물리적으로 빨리 그리기가 힘든데, 컴퓨터로는 스플래시 효과도 가능하고, 예일대 제자이자 재능 있는 뮤지션인 케빈이랑 즉흥연주도 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실험을 해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2~3년 동안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 보니 더 이상 그리기가 싫고 어렵더군요. 어느 날, ‘컴퓨터가 만들 수 있는 색보다 더 밝고 아름다운 색을 직접 그려보자’라는 결심이 섰죠.”
새로운 창작욕을 품게 된 사미아는 자신의 집 근처인 차이나타운에서 받은 영감을 녹여낸 포토 몽타주 시리즈, 뉴욕에 있는 수많은 나무의 컬러에서 영감을 얻은 컬러 시리즈 등으로 슬럼프를 이겨낸다.

단단한 올리브나무처럼
뉴욕은 그녀에게 이렇듯 풍부한 예술적 영감을 안겨주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액티비스트로서의 싹을 틔울 수 있게 도와준 투쟁의 도시이기도 하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제3세계에는 냉정하게 거리를 뒀던 뉴욕의 아트 신(지금도 사미아의 딜러는 중동에 있다). 그 속에서도 사미아는 구겐하임 미술관(뉴욕, 아부다비), 워싱턴 국립 미술관, 대영 박물관 등에서 그녀의 작품을 소장할 정도로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해나갔지만, 자신의 커리어와는 별도로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도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다. 아랍 커뮤니티와 ‘이민자’라는 같은 한계가 있는 다른 나라 아티스트들과 자주 교류하면서 ‘정치 운동가’가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작품과 정치의 관계’다. 사미아는 딱 잘라 그 둘은 별개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내게 팔레스타인이란 주제는 중요해요. 지금도 그곳에선 끔찍한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정확히 알고 제대로 알려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상징인 올리브나무 시리즈, 카프르 카심 대학살(Kafr Qasim Massacre) 사건을 다룬 드로잉 시리즈 모두 참담한 역사와 현실을 알리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특히 1956년 이스라엘 군대가 49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사살한 비극을 담은 ‘카프르 카심 드로잉’ 시리즈는 사미아가 이례적으로 그린 비(非)추상 작품으로 이 끔찍한 사건의 생존자, 그리고 희생자의 가족을 직접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을 만큼 마음을 쏟았다. 요즘 사미아는 여전히 제3 세계에 높은 벽을 치는 뉴욕을 제외한 세계 여러 도시에서 크고 작은 전시를 치르고 있다. 전시가 마무리되어도 한숨 돌리기 무섭게 2017년 버전 키네틱 페인팅을 다시 시작해볼 요량으로 독수리 타법을 구사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독학하는 날이 대부분. 화수분 같은 뜨거운 에너지를 품은 작가에겐 왠지 꿈이 있을 것 같았다.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고 싶어요. 평생의 바람이에요.” 녹록하지 않은 세월을 아름다운 예술혼으로 성실히 일궈낸 그녀의 첫인상에서 뿌리 깊은 나무가 겹쳐 보인 건 과장된 착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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