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20 WINTER SPECIAL] Korean 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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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1, 2020

글 심은록(미술비평·기획가) | edited by 고성연

이제는 ‘미술 한류’라는 표현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국 작가들의 행보는 눈에 띈다. 그래도 세계 주요 도시의 내로라하는 문화 예술 공간이든, 인적은 다소 덜하지만 숨겨진 보석 같은 공간이든 ‘K아티스트’를 마주치면 반가운 건 사실이다. 이번 호에는 글로벌 무대를 누비며 저마다 창조적 여정에서 의미 깊은 자취를 남기고 있는 3명의 미술가를 소개한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 이우환(1936년생), 글로벌 스펙트럼을 무섭게 넓혀가고 있는 이배(1956년생), 그리고 아직은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리는 젊은 작가로서 파리 전시를 계기로 커리어의 또 다른 챕터를 열고 있는 민정연(1979년생).


거장과 4방 세계
Lee Ufan
관람객들은 이우환의 조각 앞에서 느리게 조용조용 거닐고, 그의 회화 앞에서는 아예 멈춰 서서 숨소리마저 죽인다.
그런데 정작 작가 자신은 늘 총총총 뛰듯이 걷는다. 올해만도 네 군데의 주요 미술관에서 초대를 받았으니 그의 걸음걸이가 빨라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중 하나만 소개해도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각각의 전시 규모가 꽤 크다.
뭘 고를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욕심을 내 모두 소개하기로 했다. 네 전시가 저마다 다르고 또 중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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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아우르며 자취를 남기는 대가의 행보
지난해 프랑스 메츠의 퐁피두센터에서는 7개월에 걸쳐 이우환 회고전이 열렸다(2019. 2. 27~9. 30). 바로 첫 번째로 소개할 전시 . 196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50여 년을 아우르는 이우환의 조형 언어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회고전이었다. 15개의 전시실에서 그의 작업은 우리에게 각각 다른 주제의 질문을 던진다. 그의 첫 작품은 “현대는 그런 세상이 아닌데도, 왜 자꾸 당신은 여전히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며 로고스(logos, 보편적인 법칙에 따르는 분별과 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다음 단계로 그의 조각은 “산업(철판 혹은 철봉)과 자연(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 그의 최근작은 현대미술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가능하며, 무엇이 현대의 가장 큰 이슈인지, 그리고 ’느낌’과 ‘언어’ 근간에 있는 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에 대한 답을 고민하게 한다.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 헤매다 보면, 문득 음악이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처음에는 음악의 존재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이우환의 작업과 잘 어울린다. 이 음악은 사카모토 류이치(Ryuichi Sakamoto)가 이우환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작업과 음악의 근사한 이중주의 울림과 여운이 아직도 울리고 있다. 두 번째, 중국 상하이의 당대예술박물관(PSA)에서는 이우환, 프랑스의 이브 클랭, 중국의 딩이(Dingyi)가 함께한 3인전 가 열렸다(2019. 4. 28~7. 28). 1960년대 이후 문화·사회적 격변을 이겨낸 세 예술가를 비교하며 실험적인 예술운동의 궤적을 조사하는 프로젝트성 전시였다. 특히 이브 클랭과 이우환, 두 거장의 흥미로운 퍼포먼스가 있었다. 이브 클랭의 ‘심포니 모노톤사일런스(Symphonie Monoton-Silence’(1947~1961)는 작가 특유의 모노톤 작업처럼 20분간 모노톤으로 연주하고 또 다른 20분은 침묵하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악명 높은 곡이다(존 케이지의 ‘4분 33초’(1952)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이우환은 오히려 “이 퍼포먼스가 있어서 아주 좋았으며, 많은 감명을 받았다”라고 했다. 다음으로 이우환은 자연석으로 철판 위에 올린 유리를 깨는 퍼포먼스 ‘관계항―모멘텀’(2019)을 통해, 자연(돌)이 인위(유리)를 부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술관이 거장을 대하는 자세
세 번째는 ‘현대미술의 성지’로 추앙받는 뉴욕 디아 비컨(Dia:Beacon) 미술관에서 지난해 5월 초 막을 연 이우환 상설전. 비컨행 기차를 타면, 출발 직후 5분가량 어두운 터널만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과 산이 눈앞에 환하게 전개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 첫 문장이 겨울이 아닌, 가을의 단풍 버전으로 체감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맨해튼의 수직적인 고층 빌딩 숲에서 갑자기 수평의 세계로 들어서는 반전의 충격도 있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 작품 ‘라인강’이 재현되는 듯하다. 이 미술관이 기존에 자리했던 맨해튼을 버리고 비컨 지역으로 갈 만한 설득력을 내뿜는 아름다움이다. 디아 비컨의 명성을 익히 아는지라 잔뜩 기대를 했는데도 그 기대를 넘어설 정도로 전시는 훌륭했다. 네 번째로는 워싱턴의 허시혼 미술관에서 지난해 9월 말에 시작해 오는 9월 13일까지 거의 1년에 걸쳐 계속되는 전시 <Open Dimension>. 야외에 ‘관계항’ 연작 10점과 신작 회화 ‘대화’(2016~2019) 4점이 전시되고 있다. 허시혼 미술관은 이우환의 전시를 위해 기존의 설치 작품을 모두 치우고 야외 공간 전체(1만7,402㎡)를 그에게 제공했는데, 이처럼 한 작가에게 공간을 모두 제공하는 경우는 미술관 개관 45년 만에 처음이라고. 필자가 허시혼 미술관을 방문한 시기는 10월 말. 워싱턴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산업사회의 상징인 철판과 자연의 상징인 돌 사이에는 태양에서 방금 떨어져 내린 듯한 황금빛 낙엽이 여기저기 놓인 채 산업과 자연의 관계를 치유하고 있었다. 작가의 날카로운 질문에 자연이 부드럽게 대답을 건네는 듯한 신기한 광경이다. 그의 작업은 ‘장소 특정적(site-specific)’일 뿐만 아니라 ‘시간 특정적’이기에 계절마다 다른 울림을 선사한다. 이 조각 작품들은 마치 애초에 허시혼 미술관 건물과 함께 만들어진 것처럼 잘 어울린다. 아주 조금만 돌을 돌려놓아도, 철판의 길이가 조금만 더 길거나 짧았어도 이런 울림은 없었을 터. 완벽한 바로크 양식을 적용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그러했듯, 이우환은 미국의 ‘완벽한 현대적 건축물인 허시혼 미술관에 다른 공기를 불어넣어 완벽을 넘어서게끔 균열을 일으킨다’. 빠르고 바삐 돌아가는 시대에 그는 사람들이 낯선 공간에 멈춰 서서 생각하도록 하며,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주변 공간을 열어 보인다. 그렇게 그만의 방식으로 미술을 통해 그는 문제를 제기한다.
미술관 전시 외에도, 이우환의 존재감은 여기저기에서 발휘되고 있다. FIAC 을 계기로 그랑 팔레와 프티 팔레에도 그의 작품들이 설치되어 화제를 모았다.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현대의 이슈가 무엇인지 알고,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한다”라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바로 이러한 작가들 덕분에 발터 벤야민은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책임감을 갖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지.
숯, 검은 불꽃
Lee Bae
근대미술에 철저하게 반대한 마르셀 뒤샹은 1917년 뉴욕에서 감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싹 말라 비틀어진 ‘개념’을 전시했다. 그가 앙데팡당전에 제출한 뒤집힌 소변기 ‘샘’(1917)이 바로 그것이다. 이어 20세기 중반에 큰 물결을 일으킨 팝아트는 많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몸을 한껏 낮췄다. ‘알 수 없는 것’은 아직 과학이 덜 발전했기 때문이고, ‘이미 아는 것’은 정복된 것처럼 여겨진다. 뒤샹의 ‘샘’이 뉴욕에 등장한 지 1백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오늘날, 이배 작가는 같은 도시에 거대한 숯 덩어리를 설치하고, 이 물성을 통해 ‘카오스의 잠재력’을 가져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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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카르나크의 거석(巨石)에서 받은 영감
그렇다면 이배가 숯을 매개로 관람객과 함께 만나고 싶은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가 꽤 세심한 설명을 건넨다. “숯 조각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불과 만나, 불에 의해 조형된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제가 한 일은 아슬아슬하게 무너지고 부서지려는 것을 끈으로 묶어 불이 만들어낸 최초의 형태를 최대한 유지시키기 위해 조력한 것입니다. 회화보다는 조각에서 좀 더 ‘사건화’가 이뤄지는데, 숯 그 자체는 불의 카오스적인 면을 함유하고 도시에서는 접할 수 없는 자연에서 오는 힘과 그 흔적, 사건을 보여주지요.” 그는 이번 뉴욕 전시를 위해 숯 작업을 하면서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명물로 5천여 년 전 세워진 카르나크의 거석(Alignements de Carnac)을 떠올렸다고 했다. 육중하고 큰 돌이 4km에 걸쳐 줄지어 뻗어 있는 신비한 열석 덕분에 거석문화의 백미로 꼽히는 마을인 카르나크. 이배 작가는 그 근처에 있는 도멘 드 케르게네크 미술관에서 2016년 전시를 갖기도 했다. “이 거석들은 일반적인 돌돌과 달리 에너지가 있어요. 카르나크 사람들에게 돌들이 왜 그렇게 놓인 것 같으냐고 물으니, ‘에너지가 모이고 기가 모이는 곳이기에, 병자들이 그곳에 가서 누워 있으면 치유가 되는 역할을 거석이 했을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죠. 이 거석들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옛날 청도에 있는 우리 집 앞에도 이런 돌들이 있었습니다. 숯도 그러한 부분이 많지요.” 당시 수천 개의 카르나크 거석(巨石)들이 늘어서 있는 길 사이를 ‘산책’했다는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서양의 자연 4원소와 동양의 오행에서 ‘불’은 원소 중에서도 가장 동적이며 카오스적인 성격을 띤다. 구체적인 형상 때문에 서구의 근본적인 4원소에는 속하지 않는 ‘나무’는 오행에서는 불을 만들어내는 ‘기운’이며, 작가는 이를 돕는 ‘조력자’다. 그리고 불에서 탄생한 숯은 변화를 지니고 있으며 유기적인 부분을 많이 품고 있다. 이배 작가에게 카르나크(아이디어를 얻음)에서 시작해 청도(실제 제작)를 거쳐 뉴욕(작품 설치)까지 이어온 과정 자체가 변화이자 창조적 여정이기도 하다.
치유의 에너지를 선사하는 숯의 숲 산책
이제 작가는 신대륙의 뉴욕 한가운데에서, 무한히 압축된 ‘검은 거석(숯나무)’ 사이를 거니는 산책에 초대하고 있다. 전시 공간의 바닥은 모두 한지로 도배되고 그 위에 검은 숯나무가 자라났기에, 관람객들은 3차원의 산수화 안에서 거니는 듯하다. 작가는 한지는 공간을 중화할 뿐만 아니라 조명을 흡수해 넓고 부드럽게 묘한 공기를 생성한다고 말한다. 하얀 페인트칠이 된 벽으로 상징되는 서구권 화이트 큐브의 절제된 공간과는 또 다른 동양적인 절제미가 묻어나면서 장소의 특정성이 상당 부분 사라진다.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불을 가리켜 ‘극단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불이 나무를 통째로 훑고 가면서 남긴 ‘숯’은 ‘검은 불꽃’이다. 숯이라는 물성을 통해 이배는 ‘카오스의 잠재력’, ‘카오스 같은 미지의 덩어리’를 뉴욕에 설치한 셈이다. 그러므로 관람객들은 숯의 숲을 산책하면서 ‘미지의 덩어리’에서 각자가 찾고자 하는 불씨를 담아올 수도 있다.
‘치유’를 불러일으킨다는 카르나크의 거석 이야기 때문일까? 필자가 숯의 숲을 거닐면서 마주친 감정은 신, 자연,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경외감’은 어떤 대화나 이성적 설득보다 가장 근본적인 치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갖는다면, 현시대의 기후 이슈를 비롯한 많은 난제를 해결할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 될 수 있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갖는다면, 현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 전쟁, 인종차별주의 등의 문제가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바슐라르가 <몽상의 시학>에서 인용한 앙리 보스코의 시가 이배 작가의 설명을 잘 함축하는 것 같다. 불들은 우리의 기억에, 아주 오래된 추억 너머에서 잠들어 있는 태고의 삶이 우리 속에서 그 불꽃으로 깨어나서, 우리 비밀스러운 넋의 가장 깊은 나라를 계시해줄 만한 힘을 행사한다.


현대적 설화
Min Jung-yeon
이제 불혹의 나이대에 접어든 민정연 작가에게 올해는 아주 큰 의미로 남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주 활동 무대인 프랑스에서 상당히 뜻깊은 전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Muse′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에서 진행 중인 전시 <Carte Blanche a` Min Jung-yeon>. 아직은 작가로서의 여정이 길게 펼쳐질, 현재가 과도기일 수도 있는 젊은 나이지만, 그동안 ‘선배’들이 도약하는 플랫폼이 되어온 기메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는 작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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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연은 파리의 한 지하철에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작가다. 특히 ‘늑대인간’ 대목에서 감동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많은 독자들이 ‘심오하고 지적인 내용(혹은 사상)에는 감정이 사라진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플라톤부터 근대까지 이어온 유산으로, 가장 큰 시대적 착오 중 하나다. 더욱이 프랑스 사상가들의 언어(글)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감동이 배가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철학자 베르그송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프랑스식 감성적 지성과 한국식 지적 감성의 경계를 잘 조절할 줄 안다는 평가를 들어온 민정연 작가의 전시 <Carte Blanche a` Min Jung-yeon>이 열리고 있는 기메 박물관(2019. 11. 6~2020. 2. 17). 마지막 층에 위치한 원형 홀 전시장에 들어가면, 거울 천으로 벽과 천장이 도배되어 있고, 나무를 연상시키는 2차원의 긴 그림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다. 마치 ‘거울 숲’ 같다. 사물을 명료하게 반사하는 거울과 달리, 거울 천은 다소 흐릿하게 반사한다. 2차원 나무를 자세히 보면, 그 안에는 길고 긴 바다에 섬들이 뜨문뜨문 떠 있다. 마이크로 세계인 나무 안에 매크로 세계인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 두 세계는 거울 천을 통해 또 다른 제3, 제4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반사되는 똑같은 거울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 각각 다른 설화가 거울 천의 세계를 통해 펼쳐진다. 다른 벽에는 거대한 회화 작품 안에 긴 깃털의 볼륨감 있는 날개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사이사이로 조금 전에 본, 같은 모양의 2차원 나무 숲이 펼쳐진다. 그리고 나무도 날개도 점점 더 희미해지면서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파리에 펼쳐 보인 신비로운 거울 숲
사실 그녀의 설치 작품 사이로 걸어 들어가기 전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미완성의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관람객이 들어가자마자 작품은 생기가 돌고 동적으로 변한다. 회화와 설치 작업, 한 작품과 또 다른 작품, 전시와 관람객이 서로 엮여가는 것이다. 관객이 참여하는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표현처럼 “관객이 작품의 일부가 되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과정은 작가만이 알 수 있는 전유물도 아니다. 관람객도 거울 천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관람객이 움직이면 작품이 다른 모습으로 거울 천을 통해 보이며, 작품은 관람객에 따라 재구성되고, 공간을 담아내며 깊이를 더해간다. “이미 정해진 내레이션이 있는 ‘신화’에는 관심이 없어요. 제가 원하는 바는 작가가 창작한 설화(conte, fable)적 배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듯 보여주는 거예요. 제가 만드는 설화적인 낯선 무대로 관람객들이 들어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길 바랍니다.” 민정연 작가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물을 반사하는 거울이 아니라 몽환적인 느낌이 나도록 ‘거울 천’을 사용한 이유도 명료한 현실이 아니라 설화적인 신비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라고.
특유의 몽환적인 개성은 확실히 뚜렷한 각성이나 희열을 주지는 않지만, 설렘을 자아내는 면모가 있다. “현 미술계에는 작품이 너무 어려워서 (뒷받침되는) 글로 많은 설명을 할 필요가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말(설명, 비평)이 사라지면 더 이상 소통이 되지 않는데, 이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부가적인 말이 필요 없이 관람객이 직접 느낄 수 있는 작업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가볍고 노력 없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가벼운 작품은 지양한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는 ‘소통일 뿐이지 예술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예술로서 도모하는 여러 차원의 ‘화해’
작가는 이러한 소통과 관련해 현시대와 미술계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화해(reconciliation)’라고 규정한다. 우선 그의 작업은 르네상스시대를 포함한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공간적 화해인 ‘2차원과 3차원의 화해’를 보여준다. 특히 작가는 작품 속에 관람객이 들어올 자리를 마련해둠으로써, 그동안 너무 멀어졌던 ‘관객과 작품의 화해’를 요청한다. 이 밖에도 또 다른 여러 차원의 화해를 열거한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다른 가치관의 화해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선 남한과 북한 가치관의 화해가 이뤄졌으면 좋겠고, 프랑스와 한국의 가치관에 대해 더 많은 소통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또 각각의 사람들마다 겪었을 좋은 기억과 트라우마의 화해가 이뤄지기를 바라고요.” 이러한 화해는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서 나오는 이도 저도 아닌 회색의 ‘멜랑주(me´lange, 혼합)’를 말하는 게 아니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흰색과 까만 색실을 엮으면 본연의 색을 유지하면서도 멀리서는 회색으로 보이는 식의 어우러짐, 다시 말해 노·장자의 철학처럼,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엮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 전시의 설치 작품명이 ‘직조(tissage)’인 이유다.
훌륭한 작가들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면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작가의 ‘새로운 단계의 개념(혹은 미술 철학)을 보여주는 전시’와 ‘이를 작업으로 숙성시켜가는 전시’가 교차되곤 한다. 이번 민정연 작가의 기메 전시는 작품보다 작가의 개념 자체를 명료히 보여주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다음 전시가 기대된다. ‘힘이 너무 세서 치아가 모두 빠지더라도’, 더 강하고 아름다운 새 치아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ART+CULTURE ‘20 WINTER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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