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속 예술 오아시스

조회수: 91
4월 15, 2026

고성연(홍콩 현지 취재)

홍콩섬 남쪽 웡척항(Wong Chuk Hang) 미술 산책

홍콩섬의 중심가가 점점 더 빽빽해지고, 땅값이 치솟으면서 미술계는 새로이 숨 쉴 공간을 찾아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끝자락, 웡척항. 현대미술계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듯, 공장과 창고가 즐비한 이 산업 지구에 2010년대 초반부터 작가 스튜디오와 디자인 스튜디오가 하나둘 입주하며 서서히 예술적 기운을 띠게 됐다. 이후 2010년대 접어 들어, 블라인드스폿 갤러리(Blindspot Gallery), 드 사르트 갤러리(De Sarthe Gallery), 악셀 페르포르트 갤러리(Axel Vervoordt Gallery), 벤 브라운 파인 아츠(Ben Brown Fine Arts) 등 주요 갤러리가 들어오면서 웡척항은 본격적인 아트 지구로 자리 잡았다. 일부 떠난 갤러리도 있었지만, 남은 공간과 더불어 유럽, 일본, 중국 등 다국적 갤러리가 새롭게 들어서면서 오히려 더 실험적이고 다채로운 예술 무대로 진화하고 있다. 도시와 예술의 관계를 새롭게 경험하는 웡척항 미술 산책은 숨 가쁘게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 마련인 아트 바젤 홍콩(ABHK) 기간에도 빼놓기 아쉬운 ‘최애 루트’ 중 하나다.


1
2


콘크리트 숲속에 예술을 숨긴 미로 같은 동네
투박하기 그지없는 빛바랜 오랜 건물들. 웡척항 거리와 골목은 산업적 면모가 완연히 드러나는 낡은 건물로 가득한데, 현대미술을 ‘업’으로 삼는 상업 갤러리와 실험적 작업을 선보이는 팝업 전시 공간이 들어서 있는 공간이 많다. 하지만 ‘설마 여기에도 갤러리가 있다고?’ 싶은 분위기의 건물이 대다수라 방심하다가는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기에 열심히 지도를 살펴야 한다. 낡은 엘리베이터, 오래된 철문, 높은 천장, 거친 콘크리트 벽과 바닥…. 산업적 질감과 현대미술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공간에서 햇살이 스며들면 공간과 작품에 미묘한 긴장감을 더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창문 너머 보이는 진초록 산 풍경에 절로 ‘힐링’을 누리곤 한다.


올봄 웡척항 아트 산책의 첫 방문지는 프랑스인 부부가 운영하는 드 사르트 갤러리(De Sarthe Gallery)다. 글로벌 갤러리 브랜드로 홍콩 센트럴에 진출하다가 2017년 웡척항으로 이전한 뒤, 대형 설치와 국제 작가 전시로 이 지역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팬데믹 이후에도 꾸준히 새로운 프로젝트와 기획을 선보이며 산업 공간의 본래 질감을 살린 예술적 무대를 제공한다. 올해 ABHK 기간에는 잭슨 폴록, 빌럼 데 코닝 등과 더불어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 중 하나로 꼽히는 잭 트워코프(Jack Tworkov) 전시를 여기서 만날 수 있었다.


건너편 건물 15층에 자리한 블라인드스폿 갤러리(Blindspot Gallery)는 웡척항 미술 지구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는 홍콩 갤러리다. 홍콩을 대표하는 트레버 영(Trevor Yeung)의 설치와 영상 등을 접할 수 있는 개인전 〈swallowing rumination, gracefully〉, 그리고 스웨덴 출신으로 광둥 디아스포라를 배경으로 하는 작가 랩-시 람(Lap‑See Lam)의 아시아 지역 첫 개인전 〈Bamboo Palace, Revisited〉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중 두 문화의 경계에서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을 상징하는 로 팅(Lo Ting, 인간과 물고기의 혼합 형태)이라는 홍콩의 신화적 존재를 매개로 한 서사를 시각화한 영상 작업 ‘Floating Sea Palace’(2024)가 공간의 지분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3
4


아트 생태계의 소우주를 품은 듯한 다양성
담론적 실험과 국제적 시각이 교차하는 새 플랫폼의 등장도 눈에 띈다. 상하이에서 출발해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 작업과 비정형적 공간 구성을 통해 중국 현대미술 신에서 독자적 위상을 구축해온 안테나 스페이스가 웡척항 리더 센터(Leader Centre) 19층에 문을 열었는데, 개관전 〈Horizons: South〉는 타이베이 당다이 아트 페어의 공동 디렉터를 지냈고, 최근에는 선전의 신설 미술관 JD 뮤지엄의 수장으로 임명된 로빈 페컴(Robin Peckham)이 기획을 맡았다. 능통한 중국어를 구사하는 미국인으로 국제 예술계의 중요한 담론가로 주목받는 인물인데, ‘지평선(horizon)’을 매개로 오늘날 세계의 단절과 연결, 이미지의 순환과 재구성, 그리고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예술적 선택이 갖는 의미를 사유하는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5
6
7


웡척항 골목을 거닐다 보면 이 동네에서 흔치 않은 신식 건물인 랜드마크 사우스(Landmark South) 빌딩이 나온다. 탕 컨템퍼러리 아트, 캡슐 등 여러 갤러리가 모여 있는 아트 클러스터 건물이다. 지난해 입주한 런던·스톡홀름 기반의 칼 코스티알(Karl Costyál)은 서로 다른 세대와 감각을 지닌 2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듀오 전시’를 열었다. 빛과 색채를 기반으로 풍경 속 상상적 공간을 구축하는 회화 작업으로 잘 알려진 스웨덴 작가 카밀라 엥스트룀(Camilla Engström), 그리고 2003년생 스웨덴 신진 작가 율리우스 노르드빈테르(Julius Nordvinter)의 병치가 흥미롭다. 여기에서 가까운 데릭 인더스트리얼 빌딩(Derrick Industrial Building)에는 일본 도쿄 기반 아트 컬렉티브 사이드 코어(SIDE CORE)와 협업해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와모노 아트(Wamono Art)가 자리한다. 폐수 처리 시설과 버려진 지하철역 같은 도시 아래 숨겨진 공간을 소재로 거대한 가상 지하 도시를 담은 설치형 프로젝트 ‘언더 시티(Under City)’가 올봄의 전시작이다.


갤러리 산책의 다른 끝자락에는 M 플레이스(M Place)라는 또 다른 클러스터 빌딩이 있다. 화이트스톤 갤러리(Whitestone Gallery), 아트 퍼스펙티브(Art Perspective), LIS10 등 여러 갤러리가 자리 잡은 현대식 건물로 웡척항 MTR 역 지척에 있다. 이 중 1985년 런던에서 설립된 로시 & 로시(Rossi & Rossi)에서는 현재 슬라브스 & 타타르스(Slavs and Tatars)의 솔로 전시 <胡 (هو / who) are you?>가 진행 중인데, 유라시아의 광대한 지리·역사적 맥락 속에서 정체성과 소속, 언어와 종교적 상징을 유쾌하고 사유적으로 탐구한 구성이 눈길을 끈다. 분위기가 사뭇 다른 인근의 E 탓 팩토리(E Tat Factory) 빌딩에는 홍콩의 대표적인 비영리 기관 패러사이트 출신인 커슨 쳉(Cusson Cheng)이 공동 설립자로 나서 LGBTQ+ 아티스트와 여성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한 전시 기획을 지향하는 포디엄 갤러리(Podium Gallery)도 자리한다.


산책 여정에서는 우리나라의 김수자 작가도 소속된 악셀 페르포르트 갤러리(Axel Vervoordt Gallery, 벨기에)와 WKM 갤러리(일본)가 입주한 건물인 코다 디자이너 센터(Coda Designer Centre)도 지나칠 수 없다. 사실 아무리 재빨리 움직여도 하루만으로는 제대로 된 관람을 하기에 모자란 밀집도와 구성을 뽐낸다. 온통 어두운 벽으로 둘러싸인 ‘블랙 큐브’ 공간이 인상적인 엠프티 갤러리(Empty Galler)는 같은 권역이기는 하지만 도보로는 꽤 먼 에버딘에 있는데, 그냥 웡척항으로 이사를 와주면 어떨까 하는 마음마저 든다.





Art Basel Hong Kong 2026

01. 로즈우드 홍콩과 함께한 아트 바젤 홍콩(ABHK) 2026_미식·웰니스·예술이 빚어내는 창조적 영감 보러 가기
02. 홍콩섬 남쪽 웡척항(Wong Chuk Hang) 미술 산책_산업 속 예술 오아시스 보러 가기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