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01, 2012
글 정희경(시계 칼럼니스트, <시계 이야기> 저자)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루비 등 귀한 보석을 사용하지도 않은 시계가 어마어마한 가격에 판매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가 대비 가격이란 단순 공식으로 바라보기 힘든 시계, 어떻게 제작할까?
‘억 소리 나는 시계!’ 시계 시장이 어느 때보다 성장세에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 다양한 매체에서 흔히 내세우는 타이틀이다.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일 뿐인데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을 보고 하는 말이다. 몇십억을 호가하는 시계에는 그에 맞는 진귀한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보석 하나 없이 억대를 호가하는 시계도 공존하는 사실은 수긍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초기 투자, 인재 영입, 기획, 제작, 유통, 판매, 광고나 후원 등의 마케팅 활동, 해외 지사 설립 등 회사의 상품 제조 & 판매 과정은 비슷하다. 어떤 분야의 제품이든 ‘잘’ 만들려면 그만큼 정성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시계의 경우 ‘정확도’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쉐론 콘스탄틴, 예거 르쿨트르, 피아제를 비롯한 여러 브랜드의 제작 과정을 보면 단순하게 가격이라는 요소만으로 바라볼 수 없는 점이 있다. 지난 5월 15일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진 첼리스트 피터 비스펠베이의 공연. 콘서트홀이 제법 큰데 무대에는 의자 하나 달랑 놓여 있을 뿐이었다. 연주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이라 다른 연주자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1장부터 6장까지 끝내는 데 거의 3시간이 걸렸지만 오케스트라 연주 못지않게 흥미진진했다. 그건 첼리스트의 노련한 연주 실력 덕분이겠지만 바로 조반니 바티스타 과다니니 덕분이기도 했다. 2004년 11월 3일 런던 크리스티 악기 경매에서 34만1천2백50파운드, 지금 환율로 6억3천2백만원 정도로 당시 과다니니 첼로 중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바 있다. 거기서 주목한 건 가격보다 1760년이란 제작 연도다. 올해로 2백52년이 된 이 악기가 지금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악기가 그냥 박물관에 있었다면 멋진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닦아주고 매만져주고 계속 연주하니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계도 마찬가지다. 1735년에 시작한 블랑팡, 1755년부터 제네바에 터를 잡은 바쉐론 콘스탄틴, 1747년에 태어난 위대한 시계 제작자가 만든 브레게, 1833년부터 지금까지 옮기지 않고 발레드주의 같은 자리에서 제작하고 있는 예거 르쿨트르 등 시계는 뿌리 깊은 회사들이 이어온 역사를 담고 있다. 물론 그들의 옛 시계들은 박물관에 있지만 지금 그들 브랜드가 생산하는 제품은 수년, 수십 년, 그리고 수백 년간 물려줄 수 있는 가치를 발할 것들이다. 그야말로 시계는 오랜 시간 동안 전해 내려온 전통과 공예 기술은 물론 현재의 첨단 기술을 담은 존재다. 그런 관점에서 요즘 시계의 제조 과정을 살펴보자.
Development
어떤 시계를 만들 것인가. 우선 브랜드의 개성을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얼굴이 필요하다. 시장조사에 따른 시계의 형태와 기능을 담은 디자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실제 모습과 동일한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단계가 개발 과정이다. 먼저 디자이너가 시계 디자인을 스케치한다. 이 방법은 예나 다름없다. 현대 시계 제작에서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3차원 입체적인 모습으로 구현하는 작업이 추가된다. 컴퓨터 작업은 시계 구조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가능해서 문제 발견과 개선이 가능하다. 그런 다음 플라스틱 등으로 실제 크기로 견본을 제작해 손목에 얹었을 때의 크기와 느낌을 살펴본다. 시계의 겉모습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한 디자인 과정이 끝나면 실제 제품 제작을 위한 보다 정밀한 구조 설계를 진행한다.
1 리베르소를 위한 아이디어 스케치. 예거 르쿨트르. 2 케이스, 무브먼트, 다이얼 등 시계를 구성하는 기본 구조와 형태에 대한 컴퓨터 렌더링 작업. 피아제. 3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패스트 프로토타입. 피아제. 4 로얄 오크 시계의 도해도. 오데마 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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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ement & Case Machining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재빨리 만들어내는 대량생산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면서 품질까지 갖추면 금상첨화지만 가격, 품질, 디자인이 모두 만족스럽긴 쉽지 않다. 그 때문에 많은 브랜드 들은 무브먼트, 케이스, 다이얼, 스트랩 등 각각의 부품을 제조하는 전문 회사에서 공급받아 조립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것이 직접 개발하는 데 시간과 금전을 투자하는 것보다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기술을 갖춘 하이엔드급 시계 브랜드들은 대부분 자체 공장에서 제조하는 시스템을 추구한다. 고급 시계일수록 섬세한 디테일을 자랑하는데 이러한 공정은 기계보다 수작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시간과 장인의 숙련된노하우가 배로 필요한 작업이다. A부터 Z까지 제작하는 매뉴팩처에는 금속을 절단하는 공장형부터 현미경으로 깨알보다 작은 부품을 조립하는 연구실 같은 공간이 공존한다. 무브먼트부터 케이스까지 형태를 갖추고 나면 폴리싱, 문장 각인 등의 마무리 작업을 거친다. 브랜드에 따라서 이들 부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도구나 기계까지 제작하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1 케이스를 만들기 위한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 샤넬. 2 소재를 정밀한 기계로 깎아 형태를 만드는 과정을 거친다. 피아제. 3 주요 부품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아주는 각각의 무브먼트 샘플. 피아제. 4 울트라 신 시계를 위해서라면 부품의 두께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되므로 부품이 정확하게 제작됐는지 확인한다. 피아제. 5 케이스에 러그를 따로 부착한다. 브레게. 6 여러 공정을 거쳐야 하는 케이스. 브라이틀링. 7 스켈레톤 무브먼트라면 마무리에 더욱 신경 쓴다. 예거 르쿨트르. 8 실리콘 소재의 팔레트 포크. 율리스 나르당. 9 로고를 넣은 핸즈. 브라이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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