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예술에 조응하는 건축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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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04, 2023

글 고성연

Kiaf·Frieze Seoul 2023
Interview with _구마 겐고(Kengo Kuma)


단기간에 온갖 콘텐츠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도시 축제를 방불케 하는 큰 행사가 전개되는 ‘이벤트 주간’에 그 시기의 주인공 그룹에 속하는 누군가를 만나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눈다는 건 지나치게 야무진 꿈일지도 모른다. 초가을, 문화 예술계에 느슨하게라도 걸쳐 있다면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을 만한 키아프 X 프리즈 아트 주간도 바로 그러한 시기다. 그래도 평소라면 마주치기 힘든 인물을 어깨 너머라도 눈에 담아두거나 운이 좋으면 짧게 담소를 나눈 뒤 서로 갈 길이 바쁘기에 다음을 기약하며 쿨하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풍경이 어쩌면 이처럼 정신없는 행사의 묘미일지도 모르겠다. 굳이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늘 출장이나 여행에 나서는 건축가나 스트리트 아티스트, 아니면 직업과는 별 상관없이 정말로 좋아하는 누군가가 그 대상이 되지 않을까.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잠시라도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질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 운이 닿은 대상이 올가을에는 아마도 서울에서의 일정이 가장 짧았을 건축가 구마 겐고(Kengo Kum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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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디를 가도 온통 구마 겐고잖아요.” 지난 3월 말, 팬데믹 시기를 거쳐 오랫만에 해외 손님을 대거 맞이한 아트 바젤 홍콩에서 만난 한 일본 기자는 건축 얘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했다. 물론 과장 섞인 말이지만, 그만큼 이 건축가의 브랜드 파워가 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미 21세기 접어들어 세계 건축계에서 구마 겐고(b.1954)의 성장세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지만 대중적 인지도까지 꿰찬 계기는 아무래도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이끌고 있는 건축 스튜디오 KKAA(Kengo Kuma & Associates)가 설계를 맡은 2020 도쿄 올림픽 국립 경기장 프로젝트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치러진 2차 공모전에서 채택된 터라 미디어의 주목도 더 많이 받았기에, 그 역시 자신의 저서에서 “일반에게도 얼굴이 알려지는 사회적 지명도로 갑자기 확대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미술품 수집은 특별히 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아마도 살 수만 있다면 분신술에 큰돈을 쓰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구마 겐고. 그런 그가 당일치기로 키아프 X 프리즈 아트 주간에 서울을 찾은 이유는 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Whitestone Gallery Seoul) 오프닝을 위해서였다.
서울 남산 인근의 소월로에 자리한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검은색 건물. 주변 나무들이 파사드의 일부를 덮고 있는 유리에 비치고, 세로로 부착된 긴 막대기들이 파사드를 장식하고 있는 이 건물(화이트스톤 갤러리 서울)은 여러 번 지나쳤을 법한 위치에 있는데, 딱히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구마 겐고 스튜디오가 갤러리 프로젝트를 맡고 나서 외관을 검은색으로 바꾼 덕분일까? 아니면 1층 창으로 보이는 내부에 전시된 미술품이 눈길을 잡아끄는 덕분일까? 본연의 건축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작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을 어둡게 함으로써 건축적인 존재를 지우고 도시의 일상에서 하얗고 추상적인 아트 공간으로 전환되는 도입적인 체험을 만들어내고자 했다”는 게 구마 겐고의 설명이다. “아트 공간은 우리를 일상의 세계에서 비범한 세계로 이동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관람자가 시간의 흐름을 잊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대와 놀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죠. 공간을 거닐며 작품을 보면서 거기 존재하는 빛과 소리, 온도, 분위기를 체험하게 되잖아요. 저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생각하고 작품과 작가가 마치 제 동료들처럼 실제로 갤러리 공간에 있다고 여기면서 설계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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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미 화이트스톤 갤러리 베이징 지점과 타이베이 지점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일본 갤러리’라는 국가 프레임으로 접근하지 않고 해당 지역의 위치와 프로젝트의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고 강조했다. 서울점의 경우, 층마다 다른 분위기가 펼쳐지는 변화무쌍함이 특징이다. 예컨대 2층에는 천장이 높은 전시 공간이 전개되어 3층 라운지에서 바라볼 수 있고, 4층에는 옥상과 통하는 돌마당과 더불어 정적인 감성의 전시실이 자리한다. 여기까지는 기존 건물을 구조를 나름대로 역동적으로 살렸다면, 옥상층으로 올라서면 ‘구마 겐고’다운 광경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탁 트인 주변의 건물 숲을 배경으로 친환경 재료를 활용한 나무빛 바닥, 그리고 작은 정원의 녹음이 묘한 정형성을 지닌 신원동 작가의 백자와 어우러지는 모습…. 자연과 유연하고 느슨한 조화를 이루는, 감히 이기려 들지 않고 자연에 기대는 ‘작은’, 혹은 ‘약한’ 건축을 줄곧 읊조려온 그의 스타일과 철학이 좀 더 느껴진다고나 할까.
물론 구마 겐고표 건축을 이 갤러리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예다. 이미 존재하는 건물을 갤러리 공간으로 바꾼 경우라는 특수성도 있기에 그저 ‘힌트’만 볼 수 있는 정도다(사실 여러 장소에서 작은 프로젝트를 많이 꾸렸던 이력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일본 내에서도 꽤 흩어져 있다). 건축은 예술처럼 관조하기보다 ‘경험’하는 대상이라고 볼 때,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은 팬데믹 기간 일본 교토에 개장한 에이스 호텔 교토를 꼽을 수 있다. 구마 겐고 스튜디오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에이스 교토, 그리고 호텔과 연결된 복합 아케이드인 신풍관은 중심가에 자리하는데도 북적거림이 방해되지 않고 경쾌하고, 심지어 여유롭게 느껴지는 공간의 미학이 안팎으로 펼쳐진다. 크지 않은 객실 공간을 쾌적하게 버무려낸 호텔 내부도 그렇지만 외부 공간에서 해사한 날씨를 맞이할 때면 풀 내음과 뒤섞인 공기를 느끼며 자연을 감상하고 사물과 호흡하는 기분이 드는데, 이는 곧 ‘건축에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고 여겨진다. 나무, 종이, 돌 같은 자연 친화적 재료로 ‘투명한 경쾌함’을 구현해낸다. 구마 겐고가 말했듯 자연과 유유히 호흡하는 ‘재료’와 ‘텍스처’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이 공간을 경험하는 사용자에게 전해진 것이리라.
이 같은 태도는 그가 뉴욕 유학 시절 새롭게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건축적 태도로 체화해낸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 전통 건축의 특징 중 하나는 유리를 사용하지 않고도 투명성을 구현해낸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집도 그랬어요. 그저 후스마 스크린(나무틀에 두꺼운 종이를 겹바른 일본식 칸막이)과 벽으로 단순하게 구획해놓은 방이 있는 집이었는데, 그것으로 ‘가벼움’과 ‘투명함’을 빚어냈거든요. 오래된 일본 가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디자인이에요.” 구마 겐고의 건축은 우리나라에는 춘천의 NHN 데이터 센터와 국내외 건축가 5명이 참여한 제주의 리조트 ‘아트 빌라스’ 등이 있다. 전자는 해인사 장경각에서, 후자는 제주의 현무암에서 모티브를 얻었는데, 역시 정갈하면서 힘이 있다. 웬만한 저자보다 더 많은 글을 쓰고, 알찬 내용의 책도 자주 펴내는 구마 겐고가 10년 전 집필한 한 저서의 추천 글에 전봉희 교수는 ‘정곡을 건드리는 간결함과 힘’이라는 표현을 썼다. 엄살을 부리고 있지만 그는 결코 ‘약한 건축가’가 아니라고 했는데, 동감하는 바다. 그의 건축을 경험할수록 잔잔히 뿜어져 나오는 정적인 힘에서도 그렇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유연한 시각이나, 섬세하고도 솔직하게 의견을 전하는 태도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 서울의 에너지를 사랑한다는 그가 성수동에 일을 위한 거점을 둘 예정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Kiaf X Frieze Seoul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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