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시대의 미학,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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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 2018

에디터 고성연

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이 펼쳐지고 있다. 올해도 ‘일’이 무척이나 많은 해였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슈에 필요 이상으로 시달리고 지친 우리네 일상에서 위로라도 건네듯 ‘열심히 하지 마라’, ‘굳이 무엇이 되려고 애쓰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대중문화 콘텐츠가 눈에 띈다. 연말연초에 어울릴 듯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 찬 메시지가 아니라 말이다. 사실 현자는 삶에 완전하거나 절대적인 행복이란 게 있다는 ‘환상’에 속지 말라고, 일찍이 인생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하고 그 선택을 책임지는 것만으로 존재 가치가 있다는 얘기를 해왔다. 조금은 더 ‘나의 삶’을 찾을 수 있는 2019년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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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틀만 자리를 비워도 도대체 이슈를 따라갈 수가 없다’는 푸념이 나올 정도로 한국 사회는 참 정신없이 돌아간다. 실제로 불과 며칠만 해외로 떠나 있어도 온갖 ‘일’이 터지고 새로운 화제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바람에 공백 아닌 공백을 느낀 경험을 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니면, 모든 것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빠르게 전달되는 초연결 시대인 만큼 멀리 있어도 디지털 업데이트를 손쉽게 누릴 수 있지만, 그러느라 여전히 디지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심심할 틈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슈를 따라잡는 것만으로 피곤한 삶을 산다고도 할 수 있겠다. ‘호모 업데이트쿠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기든 정보든 이슈든 업데이트가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업데이트 때문에 곧잘 짜증이 나면서도 그게 제때 원활히 이뤄지지 않으면 소통이 차단되는 듯해 은근히 불안해지는 게 현대인의 현주소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네트워크 세상과 단절하면서 스스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구미 지역의 여러 국가에서는 퇴근 후나 근무 외 시간에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를 이미 법제화했거나 추진 중이다. 어떤 형태든 간에 ‘자발적 단절’을 실천하다 보면 정보 범람에 따른 피로를 경감시킬 뿐만 아니라 인터넷 세상에서 아무래도 더욱 두드러지게 된 타인과의 비교나 경쟁으로 받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요즘 출판계나 영화계를 수놓고 있는 문화 콘텐츠를 보면 남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지가 아니라 자신이 순수하게 만족을 느끼는 요소를 고민하고, 행복이나 꿈을 주변에서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이나 평일 저녁과 주말은 오로지 취미 활동과 자기 계발로 시간을 보내는 ‘워라밸’, 그리고 무엇인가 대단한 걸 이루거나 큰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괜찮아’, 되도록 소유를 자제하고 가볍게 살자는 ‘미니멀 라이프’ 같은 키워드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야 하니 내 인생의 즐거움에 아낌없이 투자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욜로’ 트렌드는 과도한 소비로 연결되면서 여러모로 녹록지 않은 현실에 맞지 않기에 살짝 풀이 죽었다고도 한다. ‘욜로 찾다가 골로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세대가 어떠하든 저마다 피곤한 삶의 무게



저성장 시대에 삶의 고단함을 호소하는 현상은 비단 젊은 세대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어떤 기준에서든 저마다 힘든 구석은 있는 법. 젊은 층이 희망이 희박한 상황에서 냉소적, 허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 젊은 시절에 가졌던 꿈과 목표가 사그라든 중년층은 제2의 사춘기를 겪는 ‘미드라이프 크라이시스(midlife crisis)’에 휩쓸려 힘들어한다. 특히 변화의 물결이 극심한 4차 산업혁명 속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은 그 어느 때보다 큰 듯 보인다. 사회가 어떤 식으로 변화될지 누구도 알 수 없고 완벽히 대비할 수도 없으므로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다 해도 안정적이기는커녕 끝없이 공부하고 자기 계발에 나서야 하니 말이다. 고령화 시대의 노년층은 또 어떠한가? 은퇴 후 보낼 세월이 너무나 막연하고 길게 펼쳐질 수 있기에 설령 여유가 있다 해도 불안함을 느끼며 무위고와 고독사, ‘틀딱, ‘꼰대’ 같은 단어로 집약할 수 있는 연령 차별(ageism)로 괴로워하게 된다. 폐렴으로도 쉽게 사망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이제는 오래 사는 게 버겁고 힘든 시대라니, 인간의 아이러니란 끝이 없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아직은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에 있는 젊은 세대마저 ‘굳이 열심히 하지 말자’, ‘멈춰도 괜찮다’는 목소리에 위로받는 현상에 대해 우려의 시선이 많다. ‘소확행’이라는 것도 장기간 지속된 경제 불황기를 온몸으로 겪으며 큰 희망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해도 만족하며 사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나 우리나라의 달관 세대를 그럴 듯하게 포장해 부르는 다른 이름 아니냐는, 한창 질주할 나이에 그렇게 소극적으로 살면 되겠냐는 염려의 눈길이다. 또 누군가는 행복이 물질이나 성공의 크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소확생의 취지 자체는 좋지만, 태생적으로 포기할 게 상대적으로 많았던 이른바 N포 세대는 애초에 누려본 것도 없는 처지에 “어차피 선택지가 소확행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 섞인 소리도 한다. 어차피 이번 생은 망했지만 이미 태어났으므로 나름 있는 그대로 만족스럽게 살자는 체념이 깔려 있다는 논리다.



행복이나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 현상에 대한 반작용?



소확행은 한국에서도 팬덤이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무려 30년도 더 전에 쓴 수필 <랑겔한스 섬의 오후>에 나온 단어다. 사실 이 책이 출간된 1986년을 되짚어 보면 일본 경기가 좋을 때라 상대적으로 풍요로웠기에 ‘서랍 속에 반듯하게 접어놓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랄지 ‘갓 구운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같은 묘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낭만적 표현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확생 열풍’이 단순한 허무주의의 발현은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대단한 행복이나 크나큰 성공에 집착하는 인간의 과도한 집착과 사회적 압력에 대한 반작용이자 위로의 수단이 아닐까. 소확행을 활용한 마케팅 같은 부작용을 걱정하기에 앞서 이 개념이 탈출구가 딱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치열한 경쟁 구도와 디지털 노출에 따른 비교, 그리고 거대 담론에 지친 현대인에게 자신만의 진짜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많은 듯 보인다.



사실 소확행은 20세기에 툭 튀어나온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행복에 대해 고민해왔고, 그에 대한 현명한 깨달음을 얻은 현인도 꽤 많이 존재해왔다. 19세기를 살다 간 독일 철학자 니체는 현실에서 제대로 실감하지도 못하는 행복의 이상을 받들면서 살아가기보다는 ‘내 삶은 내 방식대로 정한다’는 가르침을 전했고, 그의 철학은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같은 최근의 베스트셀러에도 담겨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라 브뤼에르는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행복 이외의 다른 목적을 인생의 지향점으로 삼는 것’이라고 했다. 또 마르탱 파주 같은 현대 작가는 행복해지고 싶다면 인간은 불행한 존재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라고도 주문했다.
인간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풍경도 새로운 게 아니다.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를 보면 ‘허무주의의 끝’이라는 19세기 말의 논문을 소개하는데, 이 논문을 쓴 학자는 18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의지의 마비에 고뇌하는 세대라면서 ‘그들 대부분은 살아 있는 시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라고 썼다. <월든>이란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남겼다. ‘이 불안하고 부산하고 경박한 19세기를 살기보다, 이 세기가 지나가는 동안 가만히 서거나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기고 싶다’. 초연결, 초지능 같은 화두가 들끓는 21세기가 아니라 어떤 시대에도 탄식은 나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까.



선택은 나의 몫,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어쩌면 작금의 소확행이라는 것도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추구한다면 ‘주입된 유행’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작은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명제 자체가 우리를 짓누르는 불행한 강박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공각기동대>를 만든 애니메이션 거장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철학이라 할 만한 것>이라는 저서에서 역시 ‘환상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인간의 행복은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걸 정하지 못하면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다. 일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인생이라는 정해진 유통기한의 제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선택하든 그건 그 사람의 가치관이기에 전혀 상관은 없다면서 ‘만약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자신이 택한 인생을 위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간이란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내려놓아도,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봐도 삶은 여전히 쉽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리 애를 써봐도 역사에 휘황찬란한 이름을 남기지도 못한다(하지만 그것조차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하다 못해 심심해 보이는 일상을 살아가는 부부를 조명한 영화 <패터슨>은 보통의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정해진 경로에 따라 버스를 운행하는 운전사(시를 쓴다)와 예술가적인 삶을 끝없이 추구하는 주부 아내의 일상은 사실 별 게 없고, 둘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평범해 보이는 순간이 사실은 아주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식으로 과장하거나 겉치레를 꾀하지 않는다. 삶을 시처럼 만드는 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본연의 외로움이 차지한 빈 공간을 오롯이 느끼고 그 깊어진 영혼의 시선으로 삶을 대할 때, 그렇게 주변인을 바라볼 때, 묵묵하게 나아갈 때 자연스럽게 시가 느껴진다.



포르투갈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로 꼽히지만 생전 작가로서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던 페르난도 페소아는 인생을 가리켜 ‘명부에서 올라온 우편 마차가 나를 데리러 오기 전까지 그 안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집’이라고 했다. 각자가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기다려도 되는 집 말이다. 어둠과 모호함, 실패, 곤경, 침묵 등을 얘기한 페소아의 에세이집 <불안의 서>는 ‘지상에서 가장 슬픈 책’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데, ‘괜찮아~의 미학’이 무엇인지 알 듯한, 그래서 위로가 되는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저녁은 다가올 것이다. 우편 마차는 도착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마음껏 즐긴다. … 내가 지금 여행자의 책에 써넣는 것이 언젠가 다른 이들에 의해 읽힌다면, 그래서 그들의 휴식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무도 이것을 읽지 않거나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래도 나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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