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낸다는 것은 어쩌면 21세기 패션 디자이너들에게는 ‘이루지 못할 꿈’ 일지도 모르겠다. 일찌감치 그 진리를 깨달은 눈치 빠른 디자이너들은 예전으로 돌아가 과거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었다.
웃지 못할 중세 서양 복식사의 에피소드들
패션은 끊임없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유행의 시계는 그 사이클만 다를 뿐 언제나 과거를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엔 중세의 복식에서 영향을 받아 재해석한 패션들이 선보여 때론 웅장하게, 때론 신선하게 과거로 의 회귀를 통한 패션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2010년 가을 패션에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된 중세 패션은 단순한 옷차림 이상의 역사와 스토리를 지니고 있어 언제나 가치와 흥미를 유발한다. 복식의 중요한 디테일과 더불어 귀족 문화의 ‘우스꽝스러운’ 권위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역사 속 이야기들. 현대 패션과의 연관성을 언급하기에 앞서 한번 살펴보도록 한다.
17세기 유럽에서 가발 착용은 패션 리더의 상징이자 귀족들 간의 예의였다. 흑사병 때문에 사망한 사람, 머릿니가 들끓어 삭발을 한 사람들의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귀족들은 오히려 개인 이발사에게 더 많은 돈을 지급하면서 가발 관리(세탁, 빗질, 새로운 스타일 만들기 등)를 했고, 가발에 대한 사랑은 전혀 식지 않았다. 18세기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에는 건축물과 같이 거대한 장식물을 얹은, 역사상 가장 기묘한 형태의 가발들이 등장했다. 그 전까지는 리본, 진주, 보석 핀 등이 머리 장식물로 쓰였던 반면, 이 시대에는 쿠션, 인형, 과일, 야채 등이 장식품으로 머리 위에 올라갔다. 이런 헤어스타일은 전문 미용사를 두고 반나절은 걸려야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일반 서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가발을 포함한 머리 장식은 그 높이가 무려 96cm에 달하는 것도 있어 마차를 탈 때나 문으로 들어갈 때 매우 조심스러웠으며 심지어 마차 바닥에 앉아야만 겨우 마차 안으로 머리까지 들어갈 수 있기도 했다. 또 머리에 파우더를 뿌리는 것이 매우 유행했는데, 파우더를 공중에 대고 털어내면 그 가루가 고운 눈처럼 모발 위에 내려앉게 하는 형식으로, 당시 귀족들은 이 작업을 위한 별실을 만들 정도였다. 최고의 파우더는 녹말로 만들고, 대부분 옥수수, 밀, 쌀과 같은 곡물에서 추출한 것을 썼다. 서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가고, 귀족들은 한 달 치 식량을 하루 만에 머리 치장에 써버리는 사태가 계속되자 영국 정부는 헤어 파우더를 사용하는 권리에 대해 승인받는 제도를 마련했다. 이에 머리에 파우더를 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매년 허가증을 갱신해야 했다. 정부에서 이런 제도를 마련할 정도로 머리에 대한 귀족 여성들의 집착은 도를 넘어섰는데, 그것은 이들에게 가발의 부피와 머리 장식의 높이는 신분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패션의 상징이었으며 창의성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는 코르셋을 입어 허리를 최대한 조이고 척추를 곧게 세우지 않는 여성들을 부도덕하거나 정신이 해이하고 행동이 풀어진 여성으로 간주했다. 이런 도덕적 잣대의 결과로 탄생된 코르셋 착용은 지독한 입 냄새, 창자를 비롯한 내장 활동이 둔화되어 결국에는 소화 기능이 마비되는 현상, 척추 기형 등 여러 가지 심각한 신체적 결과를 낳았다. 당시 <란셋(Lancet)>과 같은 저명한 의학 전문지는 계속적으로 코르셋의 위험성을 강조했지만 여성들은 일, 시간, 삶의 단계, 기분 등에 따라 끈을 조절했을 뿐 코르셋은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심지어는 임신 기간에도) 매일 착용했다. 근육이 위축되고 등이 불편해지다 결국에는 폐활량이 줄어들어 호흡 곤란이 오는 것도 모르고(혹은 알면서도) 그것은 그저 삶에서 느끼는 단순한 불편함이라 여기며 여자들을 침묵하게 만든 코르셋은 패션 역사에서 4백 년간 지속되었다. 코르셋 착용은 남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어깨를 부풀리고 히프나 허벅지를 풍성하게 만들어 위엄 있는 남성상을 만들기 위해 허리를 조였다. 이 때문에 당시의 여자들처럼 평균 수명이 40세를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파팅게일, 후프 페티코트, 크리놀린 등은 엉덩이를 양옆으로 적어도 60cm는 더 크게 만들어주는 커다란 속옷이었다.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교회 의자에 크리놀린을 입은 여성이 겨우 두 명 앉을 수 있는 상황(덕분에 교회는 하루 예배 횟수를 두 배로 늘려야 했다), 4백 석 기차는 후프 페티코트를 착용한 여성들 때문에 2백 명도 태우지 못하고 만석으로 떠나야 하는 기가 막힌 일(당시 철도국은 만성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고 표를 구입하고도 기차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줄을 지었지만, 여자들의 엉덩이는 커져만 갔고, 그들은 어떻게 하면 엉덩이가 커 보일까 고민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거리를 걷다가 치맛자락이 물건들을 확 쓸어버려 같이 넘어져버린다고 해도 타인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옷 때문에 도움을 주려고 뻗은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심지어 거실 난로에 치맛자락이 닿아 불이 옷을 타고 올라와도 치마를 벗는 것이 복잡하고 오래 걸려 그냥 서서 타 죽은 여자들도 있었다고. 엉덩이에서부터 부풀려져 마치 종처럼 퍼져 내려오는 당시의 치마 둘레는 1m를 훌쩍 넘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 스커트 자락을 모두 쫙 펴서 둥글게 만들어 다녔다는 것이다. 거대한 엉덩이에 그것보다 더 거대한 치마 둘레. 거리는 한 사람 걷기에도 좁았고, 웬만한 집에서는 과년한 딸이 둘 이상 부모와 같이 살기엔 부엌에서 같이 식사 준비를 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패션과 역사의 끊임없는 조우
1927년에 선보인 샤넬의 블랙 원피스는 치렁치렁한 드레스와 답답한 코르셋에 갇혀 뒤뚱거리는 여성들에게 실용적인 옷이 주는 심플함의 미학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획기적인 옷이었다. 1947년 디올은 전쟁의 영향으로 당시의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밀리터리 룩을 뒤집어엎을, 새로운 보디라인을 만들어주는 페미닌한 실루엣의 ‘뉴 룩’을 선보였다.
이들과 함께 현대 패션은(그 전에도 꾸준히 그래왔던 것처럼) 길고 긴 시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모든 물자가 부족했지만 그래서 깔끔하고 우아한 룩이 성공할 수 있었던 1940년대, 1960년대 모즈 룩, 1970년대 히피를 거쳐 지금 2010년까지 패션 디자이너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히고 끝없이 돌고 돌며 시대에 맞는(또는 앞서가는) 수많은 새로운 디자인을 발표했다. 게다가 매스 마켓 패션 브랜드들은 이들이 선보인 옷에 약간의 변형과 응용을 더한 수천 벌의 옷들을 빠르면 2주, 늦으면 6주에 한 번씩 발 빠르게 매장에 진열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패션 필드에서는 아직까지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뒤집어엎을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21세기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너무나도 힘든 일일 것이다. 긴 패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것’ 은 이미 거의 다 선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