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이고 창조적인 접근으로 아름다움을 재해석하다 Axel Vervoor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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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1, 2012

글 지은경(벨기에 통신원) | photographed by Sebastian Schutyser

불교와 선종의 영향 등으로 청렴하고 소박한 삶이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으면서 와비 정신은 미의식으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일본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미의식을 현대적으로 훌륭하게 재창조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벨기에의 국왕과 여러 셀러브리티의 스타일 카운슬러이자 벨기에를 대표하는 스타일 전도사, 미술품 딜러이자 컬렉터인 그의 이름은 악셀 베르보르트(Axel Vervoordt)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사색하게 만드는 그의 멋지고 아름다운 공간들을 만나보자.


  

    

    

 

Vervoordt Spirit

‘와비(Wabi)’란 일본의 문화적 전통 미의식, 미적 관념 중 하나이다. 투박하고 꾸밈없으며 조용한 상태를 가리켜 ‘와비’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명사형으로 자주 쓰이는 형용사 ‘와비시’의 의미에서 그 뜻을 유추해볼 수 있다. ‘훌륭한 상태에 대한 열등한 상태’라는 본뜻은 그 의미가 점차 바뀌어 간소한 모양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극단적으로는 가난한 모양 등으로도 해석한다. “어릴 적부터 나는 자연이 부리는 예술적 기교의 미를 발견하고는 거기에 매료되었다. 따라서 나의 방 안에는 항상 숲이나 들, 해변에서 발견한 보물들, 다시 말해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e, 사람의 손이 가지 않은 미술품)가 가득했다. 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작은 조약돌이나 바위, 오래된 나뭇가지들을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며 귀중히 여긴다. 돌은 몇천만 년을 이어온 에스프리를 가진 살아 있는 영혼이라 생각하며 각자의 돌에는 각기 다른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자연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나는 가난 속에서 귀족적인 무언가를 발견할 때 깊은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경험했다. 시간과 사람에 의해 깎이고 마모된 흔적이 곱게 묻어나는 목동의 테이블이라든가 가마 속에서 일그러진 도자기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나는 또한 목동의 작업이나 중국의 머나먼 산맥, 또는 피레네 산맥이나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고원 등, 서로 멀리 떨어진 곳의 수도승들이 만들어놓은 나무로 된 물건들 사이에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매우 경이롭게 생각한다. 별들을 바라봄으로써 균형감을 깨우친 장인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이 다루는 나무를 똑같은 사랑의 감정으로 돌보며 또 다른 세대로 전수해오며 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다른 형태의 미니멀리즘이다. 최대한의 효과를 위한 최소한의 재료. 나는 인간은 항상 자연이 선사하는 것들을 표현하는 매개체라고 믿는다. 이런 생각을 하면 예기치 않은 실수들은 또 다른 선물이 된다.”
그에게 ‘와비’란 스타일이나 트렌드, 패션이 아닌 하나의 철학이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오랜 기다림의 사연을 지닌 것들을 아름답게 재생시키며 예의를 갖추어 공간을 창조한다. 그 때문에 그의 공간에서는 맑은 영혼과 새로운 생명의 숨결이 느껴진다. 서로 다른 시대, 머나먼 다른 나라들에서 온, 각기 다른 모양을 한 물건들이 모여 또 다른 느낌의 새로운 멜로디를 뿜어낸다. 화려한 색을 입힌 것도 아니며 해지면 해진 상태 그대로 고이 모셔놓은 듯한 소박한 느낌들이 융화되어 편안한, 그러나 심상치 않은 고급스러움을 연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심플한 공간이 풍기는 특별한 기운을 만끽할 수 있게 된다. “근 20년간 나는 동양의 세 나라에 강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중국의 타오이즘과 일본 불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젠(Zen) 사상, 그리고 한국의 예술과 철학이다. 나는 그런 동양적 정신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각 시대로부터 모인 사물들의 디자인적 대화를 끌어낸다.”
예술품에 심취했던 그는 26세의 나이에 이미 미술품을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했으며 그가 오랫동안 모아온 자연의 보물이나 골동품과 배치해 색다른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퀄리티와 지속성, 그리고 하모니(quality, durability, harmony) 바로 이 세 가지 악셀 베르보르트 스타일 정신을 바탕으로 아내인 메이 베르보르트(May Vervoordt)와 악셀 베르보르트는 1960년에 예술과 앤티크 컬렉션, 홈 컬렉션, 그리고 인테리어 디자인 사업을 시작했다.벨기에의 앤트워프(Antwer)시, 블레켄스강(Vlaeykensgang)에 16채의 아파트로 이루어진 옛 동네의 리노베이션 사업이 베르보르트 재단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첫 번째 야심작이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새롭게 바꾸어버리는 하드코어의 리노베이션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섬세하게 그리고 매우 아름답게 변화시킨다는 것이 그의 색을 담은 창조적 접근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악셀 베르보르트를 ‘예술 감정가(Connaisseur d’art)’로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스타일에는 항상 동양화를 감상하는 듯한 여백과 여운의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존경하는 전 세계 거장 작가들의 작품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빈 공간과 영원의 시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쓸모 있고 살아 있는 무언가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작품들을 보며 큰 가르침을 얻었고, 그런 가르침은 내가 지금까지도 삶을 영위하는 데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Kasteel

1984년 그는 아내인 메이와 함께 그라벤베젤(Gravenweszel) 성으로 이사해 가정을 꾸몄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사 모은 수집품과 예술가의 작품, 그리고 성의 역사가 묻어나는 물건을 조화롭게 배치해 그만의 인테리어 스타일을 창조했다. 중세부터 전해지는 고풍스러운 미감과 동서양의 문화가 조화롭고 다채롭게 섞인, 그러나 절대 시끄럽지 않은 베르보르트식의 배치로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리스 스타일(Timeless Style)을 선보였다. 많은 연회와 방문으로 성의 곳곳은 손님들의 방으로도 꾸몄고 르네상스 타워, 화이트 룸, 레드 룸, 18세기 스타일의 서재, 오렌지나무 온실 등 각기 다른 스타일과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들어 그가 관심을 갖게 된 일본의 와비, 우리나라의 선비 정신이 드러난 동양적이고 소박한, 그리고 오래된 듯한 공간들도 만날 수 있다. 또 공간은 다양한 색으로 꾸며져 있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오랜 시간 농익은 듯한 느낌을 공통적으로 자아내도록 했다. 많은 감정과 영감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무엇보다 편안함과 삶의 느낌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진정한 공간의 역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Kanaal

1999년 베르보르트 컴퍼니는 앤트워프 외곽, 1870년대 수로 위에 벽돌로 지은 공장 건물을 구입했다. 19세기, 산업이 붐을 일으키던 시대의 느낌을 잘 간직하고 있는 이 거대한 건물은 맥주 공장으로, 1960년대에는 네덜란드 맥주 브랜드인 하이네켄의 호밀을 생산해 납품하던 공장이었고, 이후 많은 변화를 거쳐온 시대의 유물이었다. 베르보르트는 이 거대한 벽돌 건물의 외곽은 그대로 간직한 채 내부를 손보기 시작했다. 방문객들은 건물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전혀 새로운 세계가 방문객들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꾸미거나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건물의 기본 골격과 천장, 미완성 느낌이 드는 플로어, 내부까지 이어지는 벽돌의 건실한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건물이 간직한 매력을 그대로 발산할 수 있게 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공간의 에스프리를 모색했다. 각 쇼룸은 그의 성에서 보다 훨씬 다양한 소재와 테마에 따르고 있지만 역시 베르보르트의 스타일 정신이 그대로 곳곳에 묻어난다. 그의 공간에서는 유독 한국의 도자기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의 달항아리, 청자, 분청사기, 중국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당나라 도자기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우리나라 사진작가 배병우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그는 각 공간에 맞게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와 바다, 오름 사진을 곳곳에 배치해놓기도 했다. 언제나 신중하고 청렴결백하며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나라의 선비 정신, 그리고 그들이 사랑한 순수한 사물의 형태와 색상, 자연에 대한 사랑, 서양인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한국의 미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책 <와비 정신(Wabi Inspiration)>에서는 우리나라의 몇몇 곳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중 그가 인상 깊게 보았다는 팔만대장경을 찍은 사진도 들어 있다. 그의 꺄날 쇼룸 중앙에서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작은 방이 하나 있다. 그곳은 설치 작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작품이 전시된 곳이다. 거대한 설치 작품은 종 모양을 하고 있으며 내부는 빨간색이 가득 칠해져 있다. 작품은 공간을 압도하고 그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의 눈길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포스를 뿜어낸다. 종의 밑에 서 있으면 끝을 알 수 없는 빨강이 한가득 펼쳐져 있다. 이 방은 악셀 베르보르트가 가진 모든 정신과 생각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해준다.

Axel Vervoordt Company

베르보르트 컴퍼니는 예술과 골동품을 소재로 멋진 공간을 꾸며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인테리어 디자인, 인테리어 컨설팅 사업을 통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왔다. 아름다운 물건은 늘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비로소 미의 가치를 발휘한다는 그의 신념은 대중에게 고요하고도 조화로운 콘셉트로 받아들여져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수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아름다운 가구와 공예가의 숨결이 담긴 작품의 배치를 통해 그의 재단은 토털 인테리어 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현재는 그의 두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아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악셀과 메이 베르보르트는 회사의 영원한 스타일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큰아들인 보리스 베르보르트는 악셀 베르보르트 갤러리의 디렉터로 활동하며 베르보르트사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동생인 디키 베르보르트는 베르보르트사의 프로젝트 중 하나인 건축 파트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또 메이 베르보르트는 꺄날의 한편에 마련된 아틀리에에서 인테리어에 필요한 패브릭 작업을 펼치고 있다. 현재 베르보르트사는 인테리어 컨설팅과 디자인, 앤티크 가구 리스토레이션 팀, 가구 디자인 팀, 예술 재단, 그리고 리얼 에스테이트(부동산) 팀으로 나뉜다. 최근 시작한 부동산 프로젝트는 회사가 꺄날을 중심으로 사 모은 대지의 공장 건물 개조 작업이다. 악셀 베르보르트의 꺄날 쇼룸을 중심으로 모이게 될 서로 다른 모양의 유니크한 아파트들은 작은 꿈의 동네를 창조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최근 그 꿈의 동네에 갤러리가 하나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공간에서만 만나던 악셀 베르보르트의 미술품 컬렉션을 갤러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다.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작품들은 악셀 베르보르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미술품들로 사진, 페인팅, 조각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성격이 매우 방대하다. 각 전시가 열릴 때마다 악셀 베르보르트는 직접 전시를 주관하고 관람자들에게 그 미술품의 성격과 철학,정신에 대해 매우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도슨트의 역할도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셀러브리티들과 미술 관계자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에게는 아직 생소한 이름 악셀 베르보르트. 그러나 그의 클라이언트는 세계 최고의 기업가와 셀러브리티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와 아티스트가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며 유럽 왕족들의 공간을 수 차례 꾸며왔다. 그의 성에서 여러 가지 테마의 파티와 모임을 자주 갖는다. 개인적이고 작은 콘서트와 계절 파티를 위해 사람들을 초대한다. 그가 사는 성의 앞마당 한편에는 그만의 작은 비밀의 거처, 오두막이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다운 나무들은 계절에 따라 색상과 분위기를 달리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에도 여러 가지 취향과 성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앞서는 사상은 바로 자연에 대해 갖는 끝없는 사모의 마음일 것이다. 그가 수집하고 만드는 모든 것에는 시간과 공간의 오랜 흔적과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자연에서 얻은 갖가지 오브제가 있다. 인간과 자연의 환상적인 조합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가장 편안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그것이 베르보르트가 말하는 ‘와비 정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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