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온몸으로 실천한 ‘팔색조’ 괴짜 예술가 훈데르트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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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01, 2011

글 고성연

1998년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겨울이다. ‘IMF 사태’가 발발한 직후라 그러했을까. 당시 학생 신분으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머물고 있던 필자에게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미술에 깊은 조예가 있진 않았지만 시내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스트리아의 대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자취를 열심히 찾아 다닌 ‘겨울 탐방’은 으스스하고 침울한 기운에서 벗어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소득을 하나 더 얻었다. 70줄 들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노익장을 과시한 예술가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 1928~2000)라는 인물을 접하게 된 것.









빈의 조용한 주택가인 뢰벤 가(街)에 위치한 그의 이름을 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haus)’와의 만남이 그 계기였다. 알록달록한 색채의 외벽과 건물 전체를 수놓은 불규칙한 곡선, 저마다 모양새가 다른 삐뚤빼뚤한 창틀, 양파 모양의 돔… 밋밋하고 단조로운 주변 건물 사이에서 절로 동심을 자아내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지나는 행인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 건물은 알고 보니 서민을 위한 시영아파트였다. 빈 시의회가 주최한 디자인 공모전에서 뽑혀 개조한 집합주택으로, 훈데르트바서가 건축 디자이너로서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게 한 작품이다. “나는 이 지상에 파라다이스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간단한지 보여주고 싶었다. 혼자 꿈꾸면 그건 한낱 꿈일 뿐이지만,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출발이 된다.” 빈의 서민들이 편안하고 행복한 주거 공간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란 훈데르트바서의 이 같은 소망을 담은 이 아파트 디자인은 그가 화가에서 한발 더 나아가 건축 디자이너로서의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게 한 작품이다. 빈의 관광 명소이기도 한 이 시영아파트는 대다수의 세입자가웬만해선 떠나기를 꺼려하는 보금자리라고.
건축가, 환경 운동가이기도 한 행동주의 예술가

메마른 도시에서 이처럼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공간을 선구자적인 시각으로꾸민 훈데르트바서.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꾸며 자연주의자로서의 신념과 열정을 온몸으로 불태 운 그는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예술을 추구한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계보를 잇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작가다. 순수 미술은 물론이고 그래픽, 태피스트리, 우표, 건축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에 도전해 이름을 떨친 ‘팔방미인’이다. 그는 또 자신의 이상을 일상생활과 작품 활동을 통해 몸소 실천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산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를 위시해 탁아소, 장애인 시설, 쓰레기 소각장 등 50여 개에 달하는 생태주의 건축물을 남겼다. 지구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방랑자적 인생 여정을 걸었던 그는 일생에 걸쳐 세계 곳곳에 6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세상을 떠난 지 이미 10년이 넘은 훈데르트바서가 몇 달 전 처음으로 이억만리 한국 땅을 찾았다. 고인의 회화, 건축 모형, 태피스트리, 오리지널 그래픽 등 1백20여 점이 공개되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회가 마련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다소 낯선 이름일 수도 있지만 필자를 포함한 그의 팬들, 그리고 새롭고 흥미로운 전시를 갈구하는 예술 애호가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화가이자, 건축 디자이너, 환경 운동가로 활동한 팔색조 예술가의 매력적인 작품 세계를 볼 수 있는 이번 전시회는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3월 15일까지 열린다.

자연에는 자로 잰 듯한 반듯한 직선이 없다

훈데르트바서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주제 의식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나 건축물이‘식물처럼 숨 쉬고 자라는 존재’가 되기를 진심으로 갈구했다. 따라서 나무판, 마, 포장지를 재활용하거나 흙과 달걀로 직접 만든 물감을 사용하는 등 그림 재료를 택할 때도 환경친화적인 방식을 택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식물을 활용한 자연 정수 시스템을 몸소 고안하기도 했다. 또 ‘수평은 자연의 것, 수직은 인간의 것’이라 강조한 만큼 그림을 그릴 때면 바닥에 종이를 펴놓고 사방을 돌리며 그렸다고 한다. 때문에 상하좌우가 따로 없는 작품도 있어 미술 전문가를 당혹하게 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을 ‘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했다. “직선은 부도덕하며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진다”고 주장한 그는 정형성과 규칙성으로 점철된 합리주의 건축에 거세게 반기를 들었다. 1958년 ‘건축의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곰팡이 성명’을 발표하고 자연과의 공명을 드러내기 위해 동료 예술인들과 나체 연설을 감행해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나선’이 그의 회화와 건축 설계 디자인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은 참으로 자연스럽다. 그에게 시작과 끝이 없이 뻗어나가는 나선은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었으니까 말이다. 훈데르트바서는 ‘색의 마술사’로도 통한다. 그는 자연이 품고 있는 다채로운 색채를 화폭에 담아내고자 자유롭고 대담하게 색을 조합했기에 한눈에 봐도 시선을 끄는 환상적인 강렬함을 창조해냈다. 색상이나 재료의 선택에 제한을 두지 않아 풍부한 감성이 더욱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분명 천진난만한 매혹을 뿜어내지만 결코 지나치게 압도적이거나 인위적인 화려함을 풍기지는 않는다. ‘건물은 네모가 아니다’ ‘인간과 건축, 자연의 행복한 동거’, 이처럼 곡선과 색채의 미학이 담고 있는 일관성 있는 메시지로 인해 훈데르트바서는 불세출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스페인에 가우디가 있다면, 오스트리아엔 훈데르트바서가 있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자연미를 뿜어내는 유기적인 곡선과 타일 장식을 애용한 점, 동화 속의 풍경이나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현실에 펼쳐놓은 듯한 작품 세계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비견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단지 예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주는 정신적인 대들보에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두뇌’로서의 후원자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훈데르트바서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가우디에게 평생의 후원자이자 친구인 구엘이 있었다면 훈데르트바서에겐 요람 하렐이라는 지지자가 있었다.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10년을 소요하기도 할 만큼 ‘느리게 사는’을 실천하며 선상 여행을 계속한 그에게 하렐은 대리인이자 친구가 되어 모든 물질적인 고민에서 벗어나 게 해준다. 훈데르트바서 비영리재단의 이사장이자 훈데르 트바서의 주요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사설 미술관인 빈 쿤스 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하렐이다.

물의 수호신을 열망한 예술가

자연을 이루는 수많은 요소 가운데 훈데르트바서가 가장 사랑한 건 아마도 ‘물’이 아니었을까. 그의 이름에 얽힌 일화를 접하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그의 이름은 정확히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우리에겐 낯설고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이 이름은 그가 스무 살을 넘기고 여행을 떠나면서 개명한 것으로 ‘평화롭고 풍
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 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물에 매료된 그는 아예 낡은 범선을 사들여 3년여 동안 공들여 수리한 뒤 항해를 떠났는데 이 배의 이름도 독일어로 ‘비 오는 날’인 ‘레겐탁(Regentag)’이라고 지었다. 또 자신의 중간 이름도 ‘레겐탁’이라고 불렀다. 그가 이처럼 비 오는 날을 좋아한 이유는 햇빛이 지나치게 강렬한 날엔 색이 가진 고유의 빛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비가 오는 잿빛의 날이야말로 자연의 색이 본연의 ‘때깔’을 발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양파 껍질처럼 벗겨낼수록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는 예술가인 훈데르트바서는 사실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20대 초반, 1949년 빈의 미술학교에 입학했지만 3개월 만에 발걸음을 돌렸다. 길들여지지 않는 예술가로서 ‘나 홀로 여정’을 택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이탈리아 반도의 한 끝에서 반대편 끝을 섭렵하는 긴 여행을 떠난다(이때가 자신의 이름을 바꾼 해이기도 하다). 이때 만난 화가 르네 브로의 영향으로 그는 파리로 향한다. 훈데르트바서가 ‘나에게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 친구’라고 감사한 대상인 브로는 그에게 다각도로 영향을 끼쳤다. 그중 하나가 옷차림. 양복과 셔츠, 넥타이를 던져버린 훈데르트바서는 나중엔 아예 쉽게 구할 수 있는 천과 도구로 옷과 신발을 직접 만들어 입었다. 그에 대한 책을 저술한 피에르 레스타니의 표현에 의하면 ‘성직을 박탈당한 이슬람 은둔자’처럼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서의 개성이 넘치는 이러한 옷차림이 오히려 인기를 끌어 그가 일종의 ‘패셔니스타’처럼 비춰졌다.

어린 시절의 잔인한 상처가 키워낸 환경주의자

주위에 휘둘리지 않는, 아니 오히려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훈데르트바서의 ‘반골’ 기질과 진취적인 성향은 그의 어린 시절의 아픔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아리아인 계열인 아버지는 그가 겨우 돌을 지났을 때 세상을 떠났다. 유대인 구역으로 강제 이주 당해 외아들인 그를 홀로 키운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다. 나치즘이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 유대계 편모 가정에서 자란 그가 평범한 아이로 성장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실제 외할머니를 비롯한 그의 외가 쪽 친척 69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고향과 친척을 잃고 외롭게 자란 그에게 그나마 안식이 된 건 ‘생명력 넘치는 자연’이었다. “농장에서 일할 때 풀이 얼마나 푸르고 땅이 얼마나 진한 갈색을 띠는지 보았다. 그때 나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훗날 그는 이런 회고를 남겼다. 인간의 존엄성, 자연과의 평화로운 공존…. ‘건축 치료사’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행복한 주거 환경에 강한 애착과 투자를 기울인 훈데르트바서가 외친 그 유명한 ‘창문에 대한 권리’ 와 ‘나무 세입자의 권리’ 같은 이론도 바로 이런 바탕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팔이 닿는 만큼 창문과 외벽을 개조해 ‘그 안엔 자유인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창문에 대한 권리) “집안과 위에서 자라는 나무는 온갖 종류의 화폐와 그 실질적 가치를 내세우지 않고도 산소를 만들고, 주위를 고요하게 하고, 먼지를 삼키고, 기온을 조절하고, 아름다움을 선사함으로써 집세를 지불한다.” (나무 세입자들의 권리)

물의 품 안에서 잠들고 뉴질랜드에 영원히 묻히다

세상 보는 눈을 일찍 키운 계기를 마련해준 혹독한 성장기를 거친 훈데르트바서.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아우르는 신념과 철학은 ‘다섯 개의 피부’라는 이론으로 압축될 수 있다. 제1의 피부는 표피, 제2의 피부는 의복, 제3의 피부는 인간의 집, 제4의 피부는 사회적 환경과 정체성, 제5의 피부는 글로벌 환경과 생태주의다. 인간을 보호하는 피부는 다층으로 존재하며, 각각의 피부는 궁극적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뤄 인간성 회복에 기여해야 한다는 믿음에 기반한 이론이다. 훈데르트바서는 허울 좋은 철학을 떠들어댄 게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지구촌을 누비며 산 실천적 예술가다. 작품 수익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환원했고 정작 자신은 돼지우리를 개조한 집에 살았을 만큼 검소했다. 그는 최후조차도 낭만으로 가득한 괴짜답게 맞이했다. 평소 ‘세계 시민’으로 살 수 있는 특별한 세상’이라고 말하며 아끼던 뉴질랜드에서 빈으로 오는 선상에서 사망한 것.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물의 품 안에서 잠든 것이다. 그리고 ‘부엽토가 되고 싶다’던 평소의 바람대로 뉴질랜드 땅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다. 자신이 직접 심은 나무 아래에 관 없이 가장 편안한 모습인 나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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