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부엌>의 저자, 디자이너 류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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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7, 2017

글 김민서

냉장고 없던 시절의 지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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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그건 디자이너의 역할이자 사명일 것이다. 디자이너 류지현은 맹목적으로 냉장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냉장고 없는 부엌’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그녀의 대담한 디자인적 사고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기술은 우리 삶에 무한한 편리함을 제공하지만 인류가 쌓아온 지혜를 빼앗아 가기도 한다. 한 가지 예로 냉장고만 봐도 알 수 있다. 냉장고가 세상에 등장한 지 1백 년도 채 되지 않았고, 한국에서는 1960년대 들어서야 사용되었는데, 이제 냉장고가 없는 부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식재료를 하루라도 냉장고 밖에 두면 불안하기까지 하니, 어쩌면 우리가 냉장고에 너무 의존하는 건 아닐까. 얼마 전 출간한 <사람의 부엌>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됐다. 이 책을 쓴 디자이너 류지현은 네덜란드의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번에서 공부했다. 원래 한국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했는데, 호기심이 많고 궁금한 건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는 이론 공부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하고 싶은 얘기를 글로만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사물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디자인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사람의 부엌>은 그녀가 2009년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번에서 석사 졸업 작품으로 시작한 프로젝트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Save Food from the Fridge)’의 연장선상에 있다. “원래 식문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부엌에서 식문화를 대변할 수 있으면서 디자인할 대상이 무엇일까 살펴보니 냉장고였던 거죠.” 그녀는 당신의 부엌이 ‘사람의 부엌’이 맞는지 묻는다. 모든 식재료를 냉장고에 넣는 습관은 부엌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냉장고가 되도록 만들었다. 감자, 달걀, 가지 등 실온에 보관해야 하는 식재료는 냉장고에 보관할 경우 영양소가 파괴되고 더 빨리 상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고민 없이 모든 걸 냉장고에 넣어버린다. 그녀는 ‘지식의 선반(Knowledge Shelve)’이라는 디자인으로 열대 지역에서 나고 자란 파프리카와 가지를 냉장고에서 구출하고, 마트에서는 실온에 보관하고 판매하는 달걀도 냉장고 밖으로 꺼낸다. 사실 그녀의 프로젝트는 환경에 관한 남다른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냉장고에 의존해 필요 이상으로 구입한 식재료는 결국 버려진다. 올바른 식재료 보관법과 냉장고 사용법을 안다면 음식물 쓰레기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처음 왔을 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놓고 돌아가야지요. 저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녀의 졸업 작품은 디자인계에서 신선하다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2011년에는 음식물 쓰레기에 관한 독일 다큐멘터리 <쓰레기 맛을 봐(Taste the Waste)>에 소개되기도 했다. 방송의 파급 효과는 대단했다. 전 세계에서 메일이 쏟아졌다. 환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연락을 해왔고, 농업대학 학회나 토리노의 미식과학대학, 슬로푸드 축제 등에서도 그녀를 초청했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조사가 필요했어요. 결과물로 보여주지 못한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고 그냥 버리기 아깝더라고요. 그래서 책으로 엮으면 어떨까 해서 수소문했어요. 돌고 돌아 지금의 편집자를 만나 무사히 책을 낼 수 있었죠. 출간까지 5~6년이나 걸렸어요.”
그녀는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던 과거 사람들의 지혜를 찾아 남미와 유럽을 돌아다녔다. 메일로 제보받은 생활 지식은 책을 뒤지고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 책에 담았다. “냉장고를 아예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지혜롭게 사용하자는 거예요. 편리해진 세상이 우리의 사고를 단순하게 만들고,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이해력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걸 디자인으로 알려주고 싶어요. ‘지식의 선반’의 소재와 형태는 교육적으로 효과적이에요. 누군가 선반을 보고 의문을 갖게끔 디자인했죠.”
그녀는 아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만난 남편 데이비드와 이탈리아 토리노에 거주하며 ‘지현 데이비드 스튜디오(www.jihyundavid.com)’를 운영한다. 규격화된 채소만 판매하는 슈퍼마켓을 반대하는 ‘슈퍼마켓으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Save food from the Supermarket)’를 진행했고, 냉장고 프로젝트 외에 공공 디자인 작업도 한다. 네덜란드 자전거 문화에서 영감받은 설치물 ‘ZIP’도 공공 디자인 작업 중 하나다. “제가 소재를 제시하면 데이비드는 구조적으로 디자인을 잘 풀어내요. 각자 잘하는 게 달라요. 데이비드는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이 많아요. 공공 디자인은 정부나 공공기관이 아니면 실용화하기 어려운데, 얼마 전 공모전에서 수상해서 곧 실제 작업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거리가 안전해진다는 사람 중심의 디자인은 ‘사람의 부엌’을 위한 냉장고 프로젝트와 뿌리가 같은 듯하다. 이들은 ‘지식의 선반’을 제작·판매하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을 계획하고 있다. 프로젝트가 비로소 생명을 얻은 것 같다는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바람을 밝혔다. “저희 제품을 구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삶의 방식을 바꾸고 지식을 조금씩 실천하면 좋겠어요. 책을 읽고 사람들의 삶이 변한다면 저는 그걸로 만족해요. 냉장고를 사용하는 방식만 바꿔도 장을 보는 양이 적어지고 식탁 위 풍경이 달라질 거예요. 어쩌면 대형 마트가 사라지고 작은 슈퍼가 다시 생길 수도 있고요. 굉장히 작은 움직임이지만, 우리 삶이 조금씩 변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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