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동시대와 공명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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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3, 2024

글 김연우(뉴욕 통신원)

Interview with 캐롤 허(Carol Huh) 큐레이터(스미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

얼마 전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지하철역 앞 공터에 약 3m 높이의 조형물이 들어섰다. 출구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이 백색 대좌(plinth)는 상단부가 텅 비어 있어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아래쪽을 살펴보면 이내 비밀이 밝혀진다. 일반적으로는 무언가를 위에 올려 전시하는 받침대가 되어주는 좌대가 오히려 수많은 작은 인물상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탱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한 역사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미래일까?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현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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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호 작가의 ‘공인들(Public Figures)’(1998~2023)은 지난해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National Museum of Asian Art, 이하 NMAA)의 커미션 작업으로, 지난 4월 공개되었다. 한동안 비어 있던 미술관의 프리어 플라자(Freer Plaza)에 새 작품이 설치된 것은 30년 만의 일이다.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하는 ‘공인’이라는 단어는 보통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을 의미한다. 그런데 서도호의 ‘공인들’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여러 개인, 즉 우리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4백여 명의 인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이 전시된 내셔널 몰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역사적 명소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기리는 약 170m 높이의 워싱턴 기념탑부터 링컨 기념관, 각종 전쟁 추모비까지 미국을 상징하는 여러 기념비와 랜드마크가 들어서 있는 연방 공원 부지다. 이처럼 특정한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헌정하는 기념비를 위한 장소에서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아 거대한 무게를 받치고 있는 ‘공인들’의 묵직한 존재감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아시아 현대·동시대 미술을 전담하는 캐롤 허(Carol Huh, 허경) 큐레이터는 <스타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도시의 중심축에 설치될 첫 작품으로 서도호의 ‘공인들’을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서도호의 작품은 야외의 공공장소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꼭 미술관 관람객이 아니더라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작품을 보게 될 거예요. 미국의 수도이자 기념물의 도시인 워싱턴 D.C.의 도심 한가운데서 비어 있는 받침대를 마주하는 것은 꽤 놀라운 일입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누구를 기념하는지, 국가의 역사는 어떻게 형성되고 전달되는지에 대한 더 큰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국립아시아미술관(NMAA)이 전하는 한국의 현대미술
NMAA의 체이스 F. 로빈슨(Chase F. Robinson) 관장은 서도호의 작품 설치를 기념하며 열린 헌정식에서 “다음 세기에도 아시아 미술, 사회, 문화 연구의 글로벌 리소스로 기능하겠다는 국립아시아미술관의 미션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것이며, 그 일환으로 한국 미술을 전담하는 큐레이터직을 신설하고 앞으로 한국 미술 컬렉션을 더욱 확장하겠다”라는 애정 넘치는 포부를 내비쳤다. 사실 NMAA는 한국과 오랜 인연이 있다. 지금의 K-컬처 열풍이 일기 훨씬 전인 2004년에 이미 아시아를 대표하는 현대 작가 시리즈 ‘Perspectives’의 초창기 전시로 서도호의 개인전을 선보인 바 있으며, 지난 20여 년간 정연두, 임민욱, 마이클 주 등의 한국 혹은 한국계 작가들이 이를 거쳐 갔다. ‘코리안 필름 페스티벌’을 매년 성공적으로 개최해온 지도 벌써 20년이 되었고, 작년에 새로 개관한 현대·동시대 미술 갤러리의 첫 전시 주인공도 한국 작가 박찬경이었다. 1년에 걸쳐 진행되는(오는 10월 14일까지) 그의 개인전 <모임(Gathering)>에서는 단순히 특정 지역의 작가를 다루는 것을 넘어서는, 미술관의 확장된 전시 기획 미션이 돋보인다. 허 큐레이터는 “박찬경의 작품은 한국에 뿌리와 참조를 둔 특정 맥락에 대한 개인적 통찰을 제공하면서도 관련된 아이디어나 주제를 보편적으로 통합하고 있다”며, 개별 공간에 따른 다양한 작품 배치와 미디어 작품에 적합한 현대·동시대 미술 전문 갤러리를 새로 단장함에 따라, 마침내 수년간 눈여겨본 그의 작업을 전시할 적기가 찾아왔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박찬경의 ‘소년 병사(Child Soldier)’(2017~2018)는 기존 미디어가 조성한 북한 병사의 이미지를 전복하는 평범한 어린 소년병의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다.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Fukushima, Autoradiography)’(2019)는 원전 사고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생물과 사물의 이미지를 모은 그의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이다. “‘소년 병사’를 본 일부 관람객들은 특정한 맥락을 인식하면서도 아동 병사의 문제나 이미지가 어떻게 적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지와 같은 더 보편적인 우려를 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는 단순히 특정한 재난이 아닌, 전 세계적 의미와 환경적 영향을 발휘하는 지역적 사건을 다루고 있고요.” 전쟁과 환경문제가 끊이지 않는 오늘날의 국제사회에서 이들은 특정 지역의 역사적인 한순간을 넘어 동시대의 삶에 직면한 문제를 시사한다.
서구 중심의 미술계에서 아시아 지역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는 점에서 NMAA의 역할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설립자 찰스 랭 프리어(Charles Lang Freer)는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의 이야기’라는 제임스 M. 휘슬러(James M. Whistler)의 믿음에 영감을 받아 서양과 동양, 고대와 현대를 잇는 미술관을 만들고자 했다. “고대 근동과 중국에서부터 21세기까지 여러 범위에 걸쳐 있는 미술관으로, 기본적으로는 미술관이 다루는 다양한 아시아 지역에 대한 경험이나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가들이 아시아, 또는 디아스포라에서의 개인적인 관점이나 경험을 통해 특정 지역이나 역사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지 여부입니다. 단순히 그 작가가 아시아 출신이라는 사실 이상의 무언가가 항상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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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며
NMAA는 서도호의 ‘공인들’을 5년에 걸쳐 전시하고 그 이후에는 또 다른 현대 작가의 작품을 선보여 프리어 플라자를 공공 전시 공간으로 꾸려나갈 계획이다. 또 박찬경 개인전 이후에는 1970~2000년대 인도 사진 ·판화 기획전, 고려 시대부터 현대까지를 다루는 한국 미술전 등이 예정되어 있다. 더불어 한국 현대미술 소장품을 추가하고 영역을 확장하는 것은 또 다른 목표다. 그동안 미술관이 꾸준히 한국 미술을 다뤄왔음에도 1만 점을 훌쩍 넘는 일본이나 중국의 소장품 규모에 비하면 8백여 점의 한국 소장품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다. 아마도 아시아 지역 중 한국의 문화 예술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미술관 소장품의 특별한 강점 중 하나는 사진과 관련된 분야입니다. 그 틀 안에서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더 많이 확보하고 싶어요. 현대 작가 중에서는 서도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지만, 아직 한 걸음을 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20세기와 21세기의 한국 미술 소장품을 확대해나가는 것이 이상적이겠죠.”
설립자의 비전 아래 NMAA는 다양한 아시아 국가의 정부 기관, 재단, 예술 기관과 깊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술관이 꾸준한 한국 전시와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한국 미술을 전담하는 큐레이터직을 신설한 데는 미 연방 정부와 민간 자금뿐 아니라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문화원, 문화체육관광부 등 다양한 한국 기관의 지원이 뒷받침됐다. 어쩌면 여러 이들이 모여 엄청난 무게를 조용히 견디는 ‘공인들’이 시사하는 또 다른 메시지는 지난 1백 년간 미술관을 이끌어온 이들의 보이지 않는 협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의 보편성으로 모두를 연결한다’는 설립자의 바람을 담아, 이들이 들어 올릴 앞으로의 1백 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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