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 30대 후반의 주부 김지수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웃도어족’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만삭의 몸에도 집 근처에 자리 잡은 나지막한 구룡산을 오르내리며 산책을 즐길 정도로 바지런한 편이긴 했지만, 산 타기를 사랑하는 열혈 등산가나 야외 스포츠를 좋아하는 운동 애호가는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운동도 안 하면서 유난스럽게 등산복과 장비를 사들이는 ‘무늬만 등산족’도 아니었다. 캠핑은 대학 시절 동아리 모임에서 가본 게 다였다. 정신과 전문의인 그녀의 남편도 그다지 활동적인 성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2년 전쯤부터 김지수 씨 가족은 주말마다 차를 이끌고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려서 아직 등산은 엄두가 나지 않지만 어느새 캠핑은 이들에게 삶의 감초 같은 존재가 됐다. 김지수 씨 가족이 ‘캠핑 패밀리’로 변모하게 된 동기는 만 네 살짜리 아들 수영이가 제공했다. 이웃을 만나면 혹시 묵언 수행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된다는 농담을 던지곤 할 만큼 순하고 조용했던 ‘천사표’ 아기였는데 세월이 지나자 씩씩한 사내아이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로 변모한 것. 특히 수영이가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주말이면 이들 부부는 도저히 집에서 버텨낼 수 없었다. 단지 시끌벅적한 걸 넘어 온 집 안이 난장판이 되는 건 물론, 초등학교 2학년짜리 딸아이가 올해부터 토요일에 등교를 하지 않게 되자 남매의 대결 구도까지 곧잘 펼쳐지니 발걸음이 야외로 향할 수밖에. 부부는 육아 스트레스에 덜 시달리며 신선한 공기를 맛볼 수 있으니 심신의 건강에 이롭고, 아이들은 맘껏 뛰놀 수 있으니 ‘윈윈’이다. 주위를 보니 지인들 중에도 캠핑족이 꽤 많아 때로는 연합 노선을 구축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캠핑 도구와 의류에 눈이 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 육아와 가사로 바쁜 김지수 씨는 주로 오캠몰과 같은 캠핑 전문 웹사이트에서 인터넷 쇼핑을 하고, 집 근처 웍앤톡 같은 아웃도어 매장에 가끔 들른다. 은근히 살 게 많다. 방수·보온이 잘되는 옷, 바비큐 그릴, 접이 의자, 돌돌 말 수 있는 간이 테이블, 거위털 침낭, 넓은 시야를 제공해주고 강풍에도 끄덕없는 우산, 금속 냄새 안 나는 초경량 물병…. 아웃도어의 세계는 광활하고 깊이 있는 세상이었다. 텐트만 해도 ‘급’이 세밀하게 나눠질 정도로 많은데, 2개의 방을 야외에 펼쳐놓은 것 같은 미국 C브랜드의 투 룸형 제품은 1백만원이 훌쩍 넘기도 한다. ‘물먹는 하마’처럼 돈이 들어가지만 아이들도 있는데 조악한 캠핑 도구를 장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끔 캠핑에 동반하는 친구 부부는 점화 도구도 스웨덴 국방부 조달용을 쓴다지 않는가.
이처럼 필요한 물품을 하나둘 사들이다 보면 어느새 어정쩡하게나마 고급 캠핑을 즐기는 소위 ‘글램핑족’으로 분류되는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단순한 야영이 아니라 하나의 여가 문화로 자리 잡은 캠핑을 비롯해 등산과 카약, 서핑 등 각종 야외 스포츠를 즐기는 레저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서 요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아웃도어 바람에 휩싸여 있다. 1990년대 말 유학생들의 패션으로 물꼬를 튼 국내 아웃도어 시장은 2000년대 중반에만 해도 1조원 규모도 채 안 됐지만 최근 수년간 쑥쑥 커져 미국, 독일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강자’가 되었다. 올해는 캠핑 열풍의 지속과 주 5일 수업제 도입 등에 힘입어 국내 아웃도어 시장이 지난해 3~4조원 규모에서 5조원대로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물론 해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다 보니 올해 정점을 찍고 내려올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도 가파른 성장세가 이어질지에 대한 논란이 있고, 점퍼 하나에 60만~70만원을 쉽게 호가하는 가격 때문에 ‘등골 브레이커’라는 따가운 눈초리가 반영된 표현도 등장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현재로서는 아웃도어가 여전히 ‘대세는 대세’라는 점이다. 불황 속에서도 뜨거운 인기를 누리는 품목이다 보니 관련 기업들 입장에선 포기할 수 없는 사냥감이다. 봄철을 맞이해 신세계, 현대, 롯데 등 주요 백화점에서 하나같이 아웃도어 기획전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는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골프 브랜드를 밀어내고 백화점의 공간을 넓게 차지한 매장의 위상이나 아웃도어 업체들이 브랜드의 얼굴로 내세우고 있는 모델들의 이름을 보면 그 위세는 더 명확하게 와 닿는다. 1위 브랜드인 노스페이스는 빅뱅과 이연희, 코오롱스포츠는 이승기와 이민정, 네파는 2PM, K2는 원빈, 블랙야크는 조인성, 휠라 스포츠는 차승원, 아이더는 이민호와 소녀시대의 윤아를 모델로 앞세워 소비자의 지갑을 겨냥하고 있다. 3, 4년 전만 해도 산악인이나 무명의 외국 전문 모델들이 장악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당대 최고 배우와 아이돌 스타들이 아웃도어 시장을 도배하고 있는 셈이다. 올해 아웃도어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빈폴은 드라마 <해를 품은 달>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김수현을 모델로 기용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올해는 빈폴 말고도 새로운 브랜드들이 가세해 토종과 외산을 가릴 것 없이 국내 아웃도어 시장을 둘러싼 경쟁은 앞으로 더욱더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스웨덴 고급 아웃도어 브랜드 하그로프스가 한국 지사를 설립했고 베네통, 시슬리 등을 거느린 패션 기업 F&F는 최근 자체 아웃도어 브랜드 ‘더 도어’를 선보였다. 패션 그룹 형지는 영국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케이프’를 국내에 론칭할 계획이고 SK네트웍스는 타미 힐피거 로고가 붙은 아웃도어 라인을 올가을 선보일 예정이다. 세정은 2005년 시작했다 중단한 아웃도어 브랜드 ‘센터폴’을 부활시켰고, 아미넥스는 국내 시장에서 철수를 반복했던 캐주얼 브랜드 ‘노티카’를 아웃도어로 탈바꿈해 다시 론칭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 아이다스, 나이키 등 스포츠 브랜드와 디자이너 브랜드들도 저마다 자신의 강점을 살려 아웃도어 사업에 부쩍 공을 들이고 있다. 업체들의 이 같은 행보는 스포츠, 캐주얼 브랜드로 공략하기보다는 ‘아웃도어’라는 무늬를 입혀야 통할 것이란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먹이사슬의 역학 구도에 예민한 공급자 시각에서 보면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아웃도어 대전이 펼쳐질 듯하다.
조용히 움직이는 사모 투자 펀드들이 국내 아웃도어 업체를 유심히 눈여겨본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이 산업이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이처럼 탁월한 인기와 성장 잠재력은 도대체 아웃도어의 어떤 매력에 기인한 것일까. 전문가들은 일단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배경 요소로 꼽는다. 숨가쁜 행보로 지친 도시의 삶 속에서 자연을 느끼고자 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부각되고 확산되면서 전 세대에 걸쳐 건강과 레저에 대한 관심을 쏟는 진정한 아웃도어 인구가 절대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산에 오르는 국내의 등산 인구만 해도 1천8백만 명(한국등산센터 자료 기준)에 육박한다는데, 이는 전 국민의 3분의 1 수준이 아닌가. 게다가 기능성이 필수 불가결한 아웃도어 장비와 의류는 기본 가격이 만만치 않아 수익성에 플러스 요소가 된다. 날씨도 아웃도어 인기몰이에 한몫을 하고 있다. 겨울 날씨가 4월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가을을 넘어 초겨울에도 고온 현상이 나타나는 등 기후를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무쌍한 양상 속에서는 날씨에 대한 대응력이 상대적으로 높은 아웃도어 제품이 사랑받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시장이 성장하자 장비든 의류든 패션 DNA를 강조한 고급 제품들이 속속 국내 시장에 들어오면서 유난히 트렌드에 민감한 국내 소비자들에게 아웃도어는 어느덧 생활 패션의 한 축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한번 맛을 들이면 생각보다 가볍고 편하고 멋스러우니 ‘팬심’의 지속력이 강하다. 서초동 S 스포츠센터에 다니는 40대 주부 이시연 씨는 “주위에서 하도 패딩, 패딩 하길래 지난겨울에 큰맘 먹고 시베리안 구스다운 재킷을 하나 장만했는데 가볍고 따뜻하니까 매일 그것만 입게 되더라고요. 게다가 요즘 나오는 제품들은 디자인도 은근히 세련되고 예뻐서 다른 색상으로 하나 더 샀어요”라고 말했다. 단지 등산용이나 캠핌용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편하고 멋스럽게 걸칠 수 있는 품목, 속칭 ‘국민복’이 된 것이다. N브랜드가 중고생들의 교복 아우터로 자리 잡고 강남 압구정 현대백화점에 가면 단지 아웃도어 브랜드로 여겨지기엔 상당히 비싼 몽클레르 패딩 제품을 걸치고 장을 보는 주부들을 볼 수 있는 이유가 아닐는지. 빈폴 아웃도어와 더 도어 등 신규 아웃도어 브랜드가 기능성 소재보다는 패션에 더 중점을 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실용성과 패션성이 부각되면서 광고 문구처럼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온’ 아웃도어. 도시에 살지만 거친 자연의 삶을 동경하기에 야외 활동을 통해 심신의 조화를 추구하는 이들 과 실용적이고 발랄한 레저형 패션을 즐기는 젊은이들을 가리켜 ‘어번 아웃도어족’이라 부른다. 단어의 뉘앙스에서 풍기듯 사실 캐주얼 브랜드 시장과 상당히 겹치는 개념이다.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는 데다 지갑을 여는 데 인색하지 않은 이들 도심형 아웃도어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관련 업체들의 행보도 분주할 수밖에 없다. 최근 수년간 별다르게 눈에 띄는 트렌드가 없다고는 하지만 경량화, 패션화 등 보다 많은 소비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업체별로 보자면 노스페이스는 업계 1위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 패밀리 아웃도어 룩을 위한 키즈 라인을 강화했다. 코오롱스포츠는 주말 여행족을 겨냥해 ‘트래블 라인’과 캠핑 용품에 공을 들이며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제안하고 있다. 또 강남 플래그십 스토어인 컬처스테이션을 통해 활력을 재충전하고 삶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하는 문화적 감성으로 접근하고 있다. 프랑스 브랜드 밀레도 조만간 텐트, 버너 등 캠핑 용품을 내놓고 캠핑족 잡기에 적극 나설 예정이다. 영화 <화차>로 재조명받고 있는 여배우 김민희를 모델로 내세운 프랑스 감성 아웃도어 브랜드 에이글도 편안하면서 클래식한 트래블 라인에 역점을 두고 고어텍스 소재의 트렌치 재킷과 러버 팩 레인부츠 등을 밀고 있다. ‘도시형 캐주얼’ 아웃도어를 표방하는 빈폴 아웃도어는 ‘어반 트렌치코트’, ‘체크 셔츠’ 등 캐주얼한 디자인으로 2035세대의 젊은 층과 여성 소비자를 공략한다는 계획이다. 이 밖에 가격 거품을 줄인 더 도어 같은 중저가 토종 브랜드들도 더 많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올해 아웃도어 브랜드의 초점은 소재의 진화보다는 외관과 감성의 극대화에 더 맞춰진 듯하다. 색상이 좀 더 화사하고 다채로워지고 있고, 디자인은 어번 아웃도어 스타일에 맞춘 ‘세련된 심플함’이 대세다. 또 올해는 강렬한 원색보다는 봄의 상징적 색깔인 그린, 옐로와 함께 유난히 오렌지 계열의 색상이 두드러지는 게 특징이다. 세계적인 컬러 연구소인 팬톤이 오렌지에 가까운 따뜻한 빨강으로 친근한 느낌과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탠저린 탱고(tangerine tango)’를 올해의 색상으로 발표했듯이 주요 아웃도어 매장에서도 오렌지와 빨강의 경계를 넘나드는 따뜻하고 화사한 색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팬톤의 이사인 레아트리스 아이제만이 말했듯이 ‘세련되면서도 극적이고 유혹적인’ 탠저린 탱고 색상이 주는 느낌처럼 경쾌하고 역동적인 기운을 받을 수 있는 아웃도어 룩이 사방에 만개해 봄의 도래를 알리는 느낌이다. 그렇다, 소생의 계절 봄이다. 굳이 아웃도어족이 아니더라도 움츠린 몸을 펴고 밖으로 발걸음을 돌릴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