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미식 문화는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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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04, 2018

글 고성연

프랑스 요리에 대해 어떤 이미지와 선호도를 지니고 있든, 어떤 장르의 요리를 하든, 예술의 경지에 비유되는 미식(gastronomy)의 세계에서는 그 영향을 받지 않기가 힘들다. 미식 문화를 둘러싼 체계와 문법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미식의 대중화를 이끈 레스토랑이 18세기 후반 혁명의 물결이 거셌던 파리에서 탄생했으며, 많은 미식가들의 시선을 받는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가 처음 발간된 곳도 프랑스 아닌가. 물론, 어떤 전문가가 말했듯이 이제는 프랑스 요리의 이상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느냐가 아니라 ‘기본’은 갖추되 다양한 아이디어와 창의성이 중요해지고 있는 세상이고, 그 어느 때보다
음식 지도의 지평이 넓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풍요로움의 원류를 짚어보는 건 우리가 미식을 대할 때 느끼는 즐거움에 조금은 보탬이 될 듯하다.


미식의-미학(Merged)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인류의 행복에 있어 천체의 발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식(美食, gastronomy)의 역사를 짚어볼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장 앙텔므 브리야-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이 남긴 어록 중 하나다. 귀족 출신의 프랑스 법관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미식가였던 그는 이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 <미각의 생리학(Physiologie du Gout)>이라는 자신의 저서에 음식을 주제로 한 철학적, 과학적 성찰과 함께 다양한 단상을 담아냈다. 출간 직후 세상을 뜨는 바람에 브리야-사바랭의 유작이 된 이 책은 더러 비난도 받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만이 추구할 수 있는 ‘식탁을 매개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즐기는 행복의 학문’으로 미식을 다뤘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가 살다 간 시대가 그저 허기를 채우거나 맛난 요리를 섭렵하는 수준이 아니라 오감을 자극하는 섬세한 미식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는, 우리가 오늘날 ‘레스토랑’이라고 부르는 문화가 싹튼 시기와 겹친 것도 우연은 아니었을 터다. ‘레스토랑의 발명’이 이뤄진 플랫폼은 프랑스대혁명의 주 무대인 파리였다. 18세기 전후의 파리를 둘러싼 미식의 역사가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파리를 독보적인 미식의 도시로 만든 레스토랑이라는 발명품
깔끔하고 근사한 공간과 테이블, 격식 있는 메뉴판, 세련된 매너를 갖춘 전문 인력의 서빙. 각자의 취향에 맞춰 정해진 가격의 요리를 사 먹는 현대식 레스토랑의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1765년 파리에서 무슈 불랑제(Monsieur Boulanger)가 연 수프 가게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그중 하나다. 하지만 무슈 불랑제라는 인물은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레베카 스팽 같은 역사학자는 18세기 중반 마튀랭 로즈 드 샹투아조(Mathurin Roze de Chantoiseau)라는 사람이 파리에 세계 최초의 현대식 레스토랑을 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또 1782년 앙투안 보빌리에(Antoine Beauvilliers)가 파리에 선보인 ‘그랑 타베른 드 롱드르(Grande Taverne de Londres)’가 본격적인 레스토랑의 효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까다로운 미식가였던 브리야-사바랭도 후한 평가를 내렸던 곳이다. 누가 진정한 개척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는 확실한 듯 보인다. 우선, 레스토랑은 원래 장소가 아니라 음식을 지칭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회복시키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restaurer’에서 비롯된 레스토랑이라는 단어는 당시에는 위가 약한 사람을 위한 부용(bouillon, 고기, 생선 등을 끓여 만든 국물)을 일컬었다고 한다. 장소를 뜻하게 됐을 때도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 주로 이 원기를 북돋워주는 국물을 마시기 위해 들르던 곳이었고, 19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풍경이 떠오르는 꼴을 갖추게 됐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 브리야-사바랭은 단순히 식욕을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손님이 가게에 머무는 동안에 최대한 쾌적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게 레스토랑 주인의 업무였다면서 이렇게 묘사했다. “15~20프랑의 돈을 자유롭게 쓰면서 일류 레스토랑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왕후나 귀족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접대를 받는다.”
실제로 돈이 있으면 누구나 ‘파인 다이닝(fine dining)’ 레스토랑을 즐길 수 있게 됐다. 1789년 대혁명을 계기로 귀족 계층이 몰락하면서 그 밑에서 일하던 요리사와 일꾼도 실업자가 됐는데, 이들이 돌파구로 레스토랑을 열었다. 상업으로 부를 일군 부르주아 계층이 레스토랑을 찾으면서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됐고, 파리는 적어도 19세기 중반 정도까지는 다른 도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독특한 미식 풍경을 누리게 됐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찾아온 여행자들이 레스토랑을 파리 특유의 자산으로 기억했음을 보여주는 사료가 꽤 많다고.
신흥 부르주아의 동경 어린 미각을 사로잡다
18세기 파리에는 카페도 엄청나게 성행했다. 특히 17세기 말 처음 파리에 생긴 이래 카페는 계몽주의 철학자를 비롯한 지성인이 모여 토론과 논쟁을 펼치면서 기존 권력을 비판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파리의 초기 레스토랑은 표면적으로는 카페와 비슷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달랐다고 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프 리바트는 당시 레스토랑은 격렬한 논쟁이나 신문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기를 회복하거나 자신의 예민함을 드러내려고 찾는, 사적인 성향이 더 강한 공간이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체계를 갖춘 훌륭한 식사를 미학적이고 지적인 활동으로 본 미식가들의 활약으로 레스토랑은 더욱 번성했다. 19세기 파리에서 서로를 자극하면서 발전한 두 가지 사회 영역으로 요식업과 대중 매체가 꼽히기도 한다. 브리야-사바랭과 더불어 유명 미식가였던 알렉상드르 그리모 드 라 르이니에르(Alexandre Grimed de La Reynie`re)가 19세기 초 정기적으로 발행한 <미식가 연감> 같은 미식 비평은 상당한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예다. 레스토랑을 주축으로 한 프랑스의 미식 문화는 혁명의 입김으로 반짝 타오른 게 아니라 점점 더 화려하게 꽃을 피웠나갔다. 그리모 드 르이니에르가 남긴 기록을 보면 “이름도 없는 수습에서 출발해 지금은 모두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호화로운 레스토랑을 채울 ‘미식 고객’이 넘쳐났다는 얘기다(전체 인구로 보면 극히 소수라 할지라도). 그 배경에는 당연히 빼어난 셰프들도 있었다. 단순히 실력이 뛰어난 데 그치지 않고 여러 면에서 혁신을 꾀하고 실천한 인물들 덕에 프랑스 요리의 체계가 잡히고 다양하고 섬세한 조리의 예술이 발전했던 것이다. 그 출발점은 궁정 문화에 뿌리를 둔 ‘오트 퀴진(haute cuisine)’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이탈리아 명문가 메디치 출신의 카트린 데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1519~1589)가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미식 수준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데려온 피렌체의 요리사와 시종 덕분에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식사가 무엇인지 알게 하고, 단조로웠던 식단과 식사 문화가 풍성해졌다는 것. 하지만 이는 일부 문헌에 지나치게 기댄 과장된 해석이라는 지적도 많다. 비옥한 땅에서 나오는 다양한 식재료와 요리 사랑이 지극했던 군주들의 사치 덕분에 르네상스 시대 초반에도 이미 프랑스 요리는 외국인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화려하고 뛰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이탈리아 요리의 영향으로 궁정 요리를 중심으로 한 미식 문화가 더 발달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스트로노미의 진화, 미각 혁명을 이끈 혁신가들
출중한 궁중 요리사가 다수 있었지만 오트 퀴진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은 인물은 17세기에 활약한 프랑수아 피에르 드 라 바렌(Franc¸ois Pierre de La Varenne)이다. 1651년 <프랑스 요리사(Le Cuisinier Franc¸ois)>라는 요리책을 내기도 한 그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 향신료의 사용을 크게 줄이는 등 중세와는 전혀 다른 레시피를 소개하면서 계절별로 요리법을 정리했다. 현대 소스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루(roux)인 기름과 밀가루 농축제도 이 책에 등장한다. 특히 라 바렌의 책 덕분에 독자들은 귀족의 식탁에나 오르는 고급 요리의 조리 원리를 ‘보다 쉽고 명료하게’ 정리된 내용으로 접할 수 있었다. 이 책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다국어로 번역되고 30판이나 발행된 것은 ‘지식의 공유’를 자발적으로 실천한 이 혁신가에게 온당한 반응이지 않았을까.
18~19세기에 미식계의 큰 도약을 이끈 천재가 나왔다. 왕성한 창작욕과 식욕을 겸비했던 <삼총사>의 작가 알레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가 ‘요리의 왕’이라고 표현했던 마리-앙투안 카렘(Marie-Antoine Care^me, 1784~1833)이다. ‘오트 퀴진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카렘은 코스 형태의 서비스를 제안하고 소스를 2백 종으로 정리하는 등 프랑스 요리를 집대성하고 범유럽적 대표성을 지니도록 지위를 끌어올린 주인공으로 추앙된다. 그는 혁명 이후 미식 문화가 신흥 부르주아 계층 등으로 확산되던 전환기를 살았음에도 화려한 요리 예술의 황금시대를 펼쳐 보였다. 1799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은 이래 새로운 귀족층이 생겨나고 호화로운 의식이 중시됐던 시기에 명망 높은 정치가이자 식도락가였던 탈레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덕분이다. <레스토랑의 탄생에서 미슐랭 가이드까지>라는 책을 쓴 야기 나오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 러시아 등 ‘유럽의 쟁쟁한 궁정으로 날아오른 천재 요리인’이었고, 시대가 낳은 거부(巨富) 로스차일드가에서도 러브콜을 받아 최고의 식탁을 차려냈다. 더구나 그는 왕족이나 귀족만이 아니라 검소한 부르주아 가정 등 폭넓은 층을 대상으로 다수의 저서를 남기면서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후진에게 물려줬다(50세도 못 되어 세상을 뜨기 전까지 아홉 권에 이르는 요리책과 건축에 관련된 책도 두 권 썼다). 그의 머릿속에는 요리인 협회를 설립하는 구상까지 있었다고 하니 진정한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적 전환점을 다시 맞은 프렌치 퀴진, 그리고…
하나의 큰 별이 지고 또 하나의 별이 탄생했다. ‘요리사들의 왕’이라고 불렸던 조르주 오귀스트 에스코피에(Georges Auguste Escoffier, 1846~1935)다. 장식적인 요리가 판을 치던 시대에 그는 ‘접시에 놓인 모든 것을 실제로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손님이 음식 재료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신조를 내세운 개혁자적 면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장식이 줄어들면 행여나 프랑스 요리가 예술적 지위를 잃고 요리사라는 직업이 하찮게 여겨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팽배했지만 그는 “간소함은 아름다움을 배제하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무엇보다 손님들이 시간 여유가 없었던 20세기 초의 시대상에 맞춰 ‘분업’으로 요리를 신속하게 완성하게 하고 주방의 조직 체계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에스코피에는 진정한 혁신가로 통한다. 이전에는 요리사 1명이 15분 정도 걸려 만들던 요리를 예로 들자면, 그의 주방에서는 채소와 달걀 담당(앙트르메티에)이 달걀을, 구이 담당(로티쇠르)이 양고기를, 소스 담당(소시에)이 소스를 준비할 때까지 단 몇 분이면 충분했다고. 여기에는 ‘호텔리어들의 왕’으로 불렸던 스위스 사업가인 세자르 리츠와의 환상적인 궁합이 멋지게 작용했다. 13세의 나이에 요리를 시작해 사보이 호텔(런던), 리츠 호텔(파리), 칼튼 호텔(런던), 르 그랑 호텔(피츠버그) 등의 주방을 맡고 컨설팅을 담당하는 등 그야말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에스코피에. 그 역시 선배 셰프들처럼 의미 있는 저서를 남겼다. 1903년 초판이 발행됐지만 아직도 많은 셰프들의 신약성서로 여겨진다는 <요리의 길잡이(Le Guide Culinaire)>. 프랑스 요리의 ‘규범’을 만들었기에 자유로운 창조성에 족쇄를 채웠다는 평가도 들었지만(그래도 또 다른 혁신적인 셰프들의 등장으로 누벨 퀴진, 모던 프렌치 등으로 발전해왔다) 에스코피에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파인 다이닝의 근간이 되는 현대식 레스토랑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인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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