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사무실에서 2년여 만에 다시 만난 디자이너 폴 스미스는 여전히 멋있고 친절했다. 지난 4월 11일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가 드디어 도산공원 앞에 오픈했고, 이를 기념한 방한을 앞두고 있던 그를 런던에서 직접 만났다. 그가 말하는 한국 플래그십 스토어에 대한 기대감, 디자인 철학 그리고 근황 이야기.
4 4월 11일 도산 거리에 오픈한 도산 플래그십 스토어의 입구.
5 미니멀한 외관과 다르게 도산 플래그십 스토어의 내부는 폴 스미스의 위트와 재치로 가득한 환상적인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따사로운 햇살과 포근하게 부는 봄바람이 무척이나 반갑게 느껴지는 4월 초의 유럽. 방사능 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가득한 아시아 지역과는 사뭇 대조되기에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마저 드는 화창한 봄날 아침, 런던 코벤트 가든 근처의 사무실 1층에서 필자를 맞이한 폴 스미스. 매일 새벽 5시쯤 일어나 수영을 하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인 그는 상쾌하고 분주한 아침에 어울리는 활기를 뿜어내며 씩씩하게 계단을 먼저 올라갔다. 세계 각지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긴 하지만 한 명의 인물을 같은 장소에서 두 번 마주하는 건 다소 특별한 일이다. 런던에서 2년여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날렵하고 건장했다. 장난감, 인형, 그림, 도자기, 사진, 자전거…. 지구촌 곳곳에서 수집한 아기자기하고 흥미로운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그의 매력 만점 사무실도 여전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은 듯 보이지만 실상은 머릿속에 상당히 세세한 그림을 그리며 장식해놓았을 것만 같은 온갖 오브제가 반갑게 인사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그는 곧 일본을 거쳐 한국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출장을 떠날 예정이라 바쁜 모양새였다. 일본에서는 매년 두 차례 열리는 시즌 컬렉션 소개, 그리고 한국에선 아시아 2호 플래그십 스토어의 개장을 위해 먼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진이 부른 방사능 후유증에 대한 공포가 팽배한 현 상황에서 일본을 방문하다니. “하하, 알아요. 어떤 이들은 저보고 미쳤다고 하더군요. 실제로 동행하기로 한 직원 수가 많이 줄기도 했고요. 하지만 일본 행사는 1년에 두 번 있는 중요한 일정이기도 하고, 그곳에 있는 동료들의 상심을 생각할 때 그대로 밀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92년에 진출한 이래 오랜 인연을 지속해온 친구들이니까요.”
그는 4월 11일 서울 도산공원 근처에 개장하는 플래그십 스토어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기대감으로 부푼 표정이 됐다. 이 매장은 폴 스미스를 상징하는 수식어가 된 ‘트위스트가 있는 클래식(classic with a twist)’이라는 문구가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건축물 자체는 현대적이지만 내부에는 고전적인 우아함과 그만의 엉뚱하고 재치 있는 색깔이 배어 있다. 물론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같은 매장 디자인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패션 브랜드답게 독특함이 있다. 남성(지하 1층), 여성(1층), 신발과 소품(2층) 등 총 3층으로 구성된 매장엔 ‘아트 월(Art Wall)’이라고 불리는 벽에 그가 열정을 담아 손수 고른 다채로운 예술 작품이 조화를 이루며 걸려 있다. 그는 세련된 선의 흐름이 인상적인 하얀색 건물의 조감도와 자신의 손길이 담긴 인테리어 디자인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고무적인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프랑스 주택을 연상케 하는 고전적 색채가 묻어나는 난간을 설치했고, 확 트인 천장, 엷은 핑크색의 줄무늬 벽을 선택했지요. 지하 1층엔 젊은 층을 겨냥한 폴 스미스 남성 진즈(jeans) 코너가 별도로 마련돼 있습니다. 20세기 초의 느낌을 맛볼 수 있는 스타일도 볼 수 있죠. 안팎 모두 상당히 특색 있는 건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매장엔 그가 직접 찍은 사진도 걸려 있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폴 스미스는 열성적인 예술 작품 수집가일 뿐만 아니라 제법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사진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가을 서울의 대림미술관에서 4만 명이 훌쩍 넘는 관객이 다녀갈 정도로 성황리에 열린 전시회 <인사이드 폴 스미스(Inside Paul Smith)>에서도 그의 작품이 다수 소개되었다. “사진 찍는 걸 매우 좋아합니다.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아요. 오늘 아침에도 촬영을 했죠.” 그는 일본 출장에서는 아예 사진가로 변신하기도 할 예정이라고 했다. <멘즈 논노(Men’s Nonno)>를 위한 화보 촬영이란다. “꽤나 유명한 젊은 스타라던데 혹시 아느냐?”고 물어보며 한 일본 잡지에서 오려낸 낯익은 사진을 보여준다. <꽃보다 남자>에 출연했던 청춘 스타 마쓰다 쇼타다.
이처럼 ‘관심의 스펙트럼’이 넓은 그에게는 극성에 가까울 정도로 정성을 다하는 팬들이 있다. 그중엔 미국에서 무려 18년째 자전거 안장, 카우보이 종, 마네킹 등 온갖 종류의 기이한 선물을 보내온 익명의 팬도 있고, 12세 때부터 3년여간 꾸준히 손수 만든 작은 인형들을 예쁜 상자에 담아 편지와 함께 보낸 깜찍한 벨기에 소녀 팬도 있고, 손수건을 만들어 선물한 아줌마 팬도 있다. 그는 팬들이 부친 다양한 선물을 직접 꺼내 보여주며 “벨기에의 소녀는 6월 즈음 엄마 손을 잡고 직접 나를 만나러 올 예정”이라고 말하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폰’으로 유명한 애플의 디자이너이자 폴 스미스의 젊은 친구인 조너선 아이브는 이러한 그를 보고 “어떻게 사람들은 폴 스미스란 인물이 그처럼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있고 접근하기 쉬운 사람이란 걸 아는지 신기하다”고 말했다고.
폴 스미스 개방성의 원동력은 자신의 철학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성향,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영국적인 절충주의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폴 스미스라는 브랜드도 오랜 세월에 거쳐 신선한 변화를 거듭할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최근 폴 스미스는 고유의 ‘스트라이프’를 약간은 배제하고 보다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물론 스트라이프가 자취를 감추는 건 절대 아니지요. 다만 보다 은은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기본적인 디자인 철학은 지키더라도 창의적인 진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기 마련이지요.” 이러한 원칙 있는 도전 정신이야말로 패션계의 노장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