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시각, 동심의 빛을 담은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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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 2018

글 고성연(독일 현지 취재)

Peter Angermann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1945년, 독일 남동부에서 태어난 페터 앙거만(Peter Angermann). 그는 20세기 초 표현주의 회화로 현대미술의 큰 줄기를 형성한 독일의 문화 예술이 전후 분단 체재 아래 꺾인 상황에서 ‘재건’을 위해 저항과 도전을 감행한 예술가들을 보고 자랐고, 스스로도 이에 동참했다. 1960~70년대에는 전위적 예술가 요제프 보이스를 중심으로 주요 세력이 뭉쳤고, 1980년대 초에는 추상 세계에 억눌린 감성을 끄집어내고자 ‘재현’에의 복귀를 시도한 구상회화가 떠올랐는데, 이른바 ‘신(新)표현주의’ 다. 그 기나긴 변화의 물결을 겪으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히 한 앙거만을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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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영을 달리한 강렬한 파란빛 산, 작은 설렘이 묻어나는 낭만적인 연주홍빛 들판, 보라색과 핑크색이 발랄하게 어우러진 시골길, 회색의 미를 최대치로 뽑아낸 듯한 안개 낀 마을 풍경…. 페터 앙거만(Peter Angermann)의 풍경화를 응시하다 보면 파버카스텔 색연필이 떠오른다. 고운 틴 케이스에 가득 담긴 유채 색연필의 다채로운 색상을 마치 ‘순간의 체험’에 빠져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자신만의 감성으로 캔버스에 맘껏 풀어낸 느낌이랄까. 그렇듯 천진하고 자유로운 동심이 흐르면서도 어딘가 품격 있는 절도가 느껴진다. 시끄럽고 복잡한 속세를 떠나 살면서 수십 년을 한결같이 한 고장의 풍경을 담아온 노장만이 가질 수 있는 내공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23년 전인 1995년, 화단에서 맹렬히 활약하던 그가 전원생활을 택하면서 자리 잡은 둥지는 독일 남동부 투른도르프(Thurndorf)의 한 마을. 흥미롭게도 2백50년이 넘는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파버카스텔의 본사가 있는 독일 뉘른베르크(Nu··rnberg)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뜻풀이를 하자면 ‘백리향 마을’이다. 녹음(綠陰)의 축복을 만끽하느라 지루할 새도 없이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마을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페터 앙거만의 자택이자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프랑코니언 지방의 색채라는 따뜻한 노란색 벽과 짙은 벽돌빛 지붕, 그리고 마당에는 소담스러운 정원과 작은 연못까지. 그야말로 풍경을 그리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동심을 절로 자아내는 전원생활 속 무르익은 노장의 혼
바람이 제법 쌀쌀한데도 연녹색 반팔 티셔츠와 카고 반바지 차림으로 ‘손님’을 맞은 페터 앙거만. 여기저기 집 구경을 시켜주던 그는 아담한 연못을 가리키며 “가까이서 보면 연못에 수련도 있어요. 모네의 정원처럼 말이에요”라고 말하면서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원에 태양전지판을 설치해 해가 들면 펌프를 작동시켜 물을 뿜어내는데, 함께 사는 손녀를 비롯해 아이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앙거만 역시 레하우(Rehau)라는 바이에른 주의 작은 마을 출신인지라 소박한 전원생활이 익숙하면서도 계절에 따라, 빛에 따라, 바람에 따라 쉴 새 없이 변하는 대자연의 정취와 풍경이 끝없는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듯싶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몹시도 좋아하기는 했지만, 직업적인 작가를 꿈꾸지는 못했다고 한다. 단지 자신이 그림 그리기와 자연과학, 두 가지에만 큰 흥미를 느낀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마침 아들의 진학에 대해 걱정하던 부모님이 미술 애호가인 지인에게 상담을 청하면서 예술 세계에 눈을 떴다. 인상파, 표현주의 같은 미술 사조에 관련된 서적을 풍부하게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아트 스쿨에 들어갔지만, 사실 ‘성공한 화가’가 되고야 말겠다는 야심을 불사르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물론 피카소처럼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에 이름을 널리 알리는 삶을 동경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감히 바라지 않았고, 외려 고독한 삶을 살았던 반 고흐 같은 예술가의 운명이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커다란 이젤들이 놓인 1층 작업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수려하게 펼쳐진 마을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노라니 큰 욕심 없이 ‘작업’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는 노장 예술가의 마음가짐과 순수한 열정이 왠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약간의 반전 스토리가 있다. 독일 현대미술계는 물론 20세기 세계 문화 예술계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일으킨 인물이자 이른바 ‘사회적 미술’을 주도한 영웅으로 손꼽히는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요제프 보이스는 백남준과 함께 기존 가치의 해체를 추구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데 초점을 맞춘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 그룹을 이끈 핵심 인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경쾌한 동심과 잔잔한 애수를 동시에 품은 앙거만의 아름다운 풍경화와 ‘혁명가’나 ‘구원자’의 이미지를 지닌 보이스의 난해한 퍼포먼스와 설치 작품이라니…. 언뜻 보기에는 도무지 연결 고리가 없을 듯한 사제(師弟) 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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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보이스에게 반하다, 그리고 나의 길을 가다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앙거만은 학창 시절 요제프 보이스의 추종자였다.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수학하던 시절 독일 표현주의와 팝아트 등에 심취하기는 했지만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부르짖으면서 업악과 권위에 반대하던 보이스를 지지하게 됐고, 그 소용돌이의 핵심에 있던 뒤셀도르프(Du··sseldorf)로 학교를 옮기기까지 했다. ‘68혁명’이라고 불리는 학생운동이 일종의 촉발제로 작용했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대학가와 노동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사회변혁 운동은 유럽 각지로 급속히 번졌는데,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보이스는 이미 급진적인 성향으로 유명했고, 펠트와 기름 덩어리를 모티브로 한 전위적인 조형 작품을 발표하고 피아노를 부수는 해프닝을 벌이는 등, 당시로는(요즘 기준으로도) 몹시 파격적인 행보를 많이 보였다.
전후 독일인들이 겪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갈등 속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건 앙거만 같은 ‘젊은 피’로서는 당연했다. “그(보이스)의 카리스마는 정말이지 대단했어요. 그런 강력한 존재감에 반했고, 그를 찾아가 나를 제자로 받아달라고 했지요.” 앙거만은 회상했다. 그렇게 보이스의 제자가 됐고, 지방, 펠트, 천, 밀랍 등 비정통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플럭서스식’ 작품을 했다. 그는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영예를 쌓아나간다는 희망찬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보이스는 개념미술, 행위예술, 환경예술, 독일 신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친 입지전적인 인물이고, 앙거만 역시 그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스스로는 명확한 ‘개념’이 서 있지 않은데도 대중을 자극하고 선동하는 법을 잘 알았던 스승의 주관적인 기호에 맞춰 작업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짓눌렀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마음을 지닌 동창생들과 함께 ‘Yiup’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스승의 방식을 ‘편협하다’라고 비판하는 작업을 펼쳤기에, 반기 아닌 반기를 든 셈이다.
이렇듯 자연스럽게 스승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앙거만은 ‘회화’로 자신의 노선을 확고히 정했다. 회화의 정신성에 대해 모색하던 그는 1970년대 말에는 밀란 쿤(Milan Kunc), 얀 크납(Jan Knap)과 함께 또 다른 그룹인 ‘노말(Normal)’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상과 맞닿은 소재를 활용하되 재치 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질서적’인 충동을 버무린 자신들만의 조형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함께 고민했고, 공동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인 이슈를 날카롭고 해학적으로 버무리지만 대담하고 열정적인 색감과 터치 덕분인지 뭔가 따듯하고 솔직한 정서가 묻어나는 앙거만표 예술 세계가 점차 구축돼갔다. 귀여운 테디 베어가 등장하는 ‘베어 시리즈’는 신비주의나 난해함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걷는 앙거만의 회화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그의 ‘베어 시리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60점이 넘는다). 한 평론가가 말했듯이 지금이라면 ‘키치’ 예술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주류에 속한 현대미술가들이 시도하지 않는 소재였기 때문이다.

빛의 미학을 자신만의 언어로 담아내다

그가 야외에서 그리는 풍경화에 빠져든 건 우연이었다. 앙거만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1987년 어느 날, 화가인 친구와 시간을 보내다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날씨도 좋은데 와인 한 병 꺼내 들고 야외에 나가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활동한 인상주의를 신봉한 유파 중 햇빛에 비친 자연의 색채를 묘사하고자 옥외에서 작업을 하는 외광파(外光派, plein-air)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들은 기대 이상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특히 앙거만은 전율마저 느꼈다. “마치 그림을 다시 배우는 듯한, 내가 속한 세상이 다시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은 신선함을 느꼈다”고. 결국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평온하면서도 활기찬 정원을 매일보기를 원했고, 지금의 보금자리인 투른도르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앙거만은 매일같이 밖으로 나가(물론 위치는 바뀌지만) 특유의 감성으로 풍경을 담아내지만 여전히 코믹물이나 일러 같은 느낌을 주는, 시사 메시지를 담은 작품도 꾸준히 내놓고 있다. 자연이든 사회문제든 그에게는 여전히 관찰 대상이며 탐험과 사색의 대상이니까 말이다. 요제프 보이스의 제자였고 지금도 신표현주의라는 커다란 틀에 속하는 회화 작가라 불리기는 하지만, 사실 앙거만은 그저 자신의 탐험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다. 누구와도 거리를 두려 하지 않고, 또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은 채 말이다. 일례로, 그의 풍경화 중 ‘Landscape with Blind Spot’(1999)을 보면 그림자처럼 어둡게 표현된 보이스의 존재도 눈에 띄는데, 스승과의 추억을 긍정적으로 기억하면서도 독자 노선을 걸어온 그의 창조적 여정을 엿볼 수 있다. 의도된 과장이나 신비로움을 추구하지 않아서일까. 그의 풍자적 작품이든, 풍경화든 풍부한 색채로 인해 시각적으로 명료하면서도 결코 부담스럽지 않고 은근히 따스한 인간미가 묻어난다는 공통분모가 느껴진다. 그리고 수십 년 세월을 겪으며 무르익어온 이 70대 노장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부디 그 여정을 되도록 오래도록 이어가기를 응원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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