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 컬렉터의 역발상이 낳은 원더랜드의 진면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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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 2023

글 고성연

Mona(Museum of Old and New Art)를 가다_하(下)

‘경험 부자’, ‘경험 수집가’라는 표현이 있다.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가난해지고, 나름 ‘열일’ 하며 버둥거린다고 해도 완만한 성장 곡선조차 타기 어렵다고들 하는, 만물이 온통 비싸지기만 하는 듯한 요즘 세상에 그래도 지구촌을 누비며 쌓은 ‘경험’의 조각들, 그 과정에서 접한 문화 예술 분야의 콘텐츠만 한정해서 보자면 제법 ‘부자’라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그런데 사실 ‘수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묘한 경계심도 든다. 타지에서 제한된 시간 내에 움직이게 되면 새로운 ‘경험 목록’을 만드는 데 빠져 정작 진지한 몰입은커녕 차분히 즐기지도 못하는 경우가 흔해서다. 제대로 체득도 못하면서 수집병에 걸려 스스로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일은 피하고 싶다는 얘기다. 굳이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필자는 예술 애호가들의 성지로 여겨지는 복합 공간 모나(Mona)로 향하면서 표피적인 ‘경험 수집’의 태도를 내려놓자고 결심했다. 시간이 부족해도 허둥대지 말고 당장 ‘대면하는 것’에만 집중하자고 마음먹었고, 편견 방지 차원에서 사전 조사도 세세히는 하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로 우연히 들어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셈 치고 말이다.


그럴듯하게 정제된 공간에서 ‘기준’을 세워두고 ‘하이라이트’를 재빠르게 섭렵하는 식의 ‘효용’ 위주 관람, 누군가 미리 정해둔 표면적인 브랜드 가치에 따라 움직이는 시선과 발품의 궤적, 인스타그램 업로드용은 아니더라도 스스로의 기록을 위해 쉴 새 없이 휴대폰 카메라 버튼을 눌러대는 손가락…. 사실 바쁘기 짝이 없는 우리네 일상에서 어렵게 짬을 내 멀리 여행을 떠났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가 낳은 모습일지도 모른다(비단 미술관을 특정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때로는 이 선택이 썩 괜찮은 아웃풋을 가져다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모나(Museum of Old and New Art, Mona) 창립자 데이비드 월시(David Walsh)는 뮤지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전형성을 몹시도 꺼렸다. 그래서 예상을 빗나가는 인식과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경험 디자인’에 골똘히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사람들의 행동을 강요할 순 없어도 은근히 유도할 수는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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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선정부터 공간 창출, 컬렉션 구성까지, 고정관념 탈피하기
지금이야 제법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니고 있으니 ‘멋진 풍경’이라고 치켜세우곤 하지만, 일단 모나의 위치 선정부터 ‘의외의 파격’이라고 할 수 있다. 남반구의 거대한 섬나라 오스트레일리아 최남단으로 남극과 가까운 태즈메이니아의 주도(州都)인 호바트 도심에서 다시 페리나 자동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외딴 마을 베리데일 (Berriedale). 월시가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 마을 근처로 인구 1천2백 명 정도(2023 기준) 되는 그야말로 작은 시골 마을이다. 지난 호에서 소개 했다시피 1961년생인 월시는 도박으로 돈을 긁어모아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된 인물. 사실 모나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필자는 그를 그저 타짜 같은 솜씨를 지닌 신이 내린 도박꾼으로만 알았다. 여행 저술가 빌 브라이슨의 책에 지구상에 있는 슬롯머신의 20%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람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도박가’라는 내용이 있듯(저자도 신문에서 읽었다고 했다) 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저널리스트와 우연히 ‘모나’ 얘기를 나누다가 그가 태즈메이니아 대학 (University of Tasmania)에서 수학과 컴퓨터 전공을 하다 중퇴하고는 친구들과 함께 개발한 ‘도박’ 알고리즘 시스템의 덕을 톡톡히 본(아마도 지금도 수혜를 입고 있는), 여러 면에서 천재성을 지닌 인물임을 알게 됐다. 도박에서 큰 돈을 벌어들이고는 아트 컬렉터로 전향(?)한 그가 못 말리는 괴짜라는 건 이미 눈치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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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모나의 독특한 면면은 그저 남들과 비슷해지는 걸 원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차원에 머무른 결정은 아니었다. 미술에 대한 애정 역시 어느 날 변덕처럼 찾아온 게 아니다. 월시는 어릴 적부터 태즈메이니아 미술관을 다니면서 그리스 유물과 유적 등에 애정을 느껴왔고, 어떤 공간을 창출하고 싶은지에 대한 나름의 철학과 신념도 꾸준히 키워왔다. 원래 와이너리와 작은 전시 공간을 뒀다가 대대적인 레노베이션을 단행한 끝에 2011년 초 본격 문을 연 모나의 지향점은 ‘괜한 어깨 힘을 빼는 것’에 있었다. “그(월시)는 전형적인 미술관이나 아트 센터의 진지한 무게와 권위를 제거하고, 관람자를 설명(가르침)의 횡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싶어 했어요.” 영국의 문화 인류학자 애드리언 프랭클린(Adrian Franklin)은 모나를 창조한 과정에 대해 쓴 책에서 이렇게 밝혔다. 고고한 권위 의식 따위는 버린 비전형적인, 그러나 ‘압도하지 않는’ 공간에서 몸소 공간을 경험하고 작품을 느끼면서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하고 싶어 했다고. 실제로 모나 단지 내에는 와이너리와 숙박 시설, 미술관 등 건물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그리고 놀랍게도 한가운데 테니스장이 있다), 나름 흥미로운 외관 디자인도 눈에 띄지만 결코 화려하거나 위압적인 위용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모나 곁을 흐르는 더웬트강과 산을 품은 탁 트인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주 전시장을 둔 미술관 건물이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파로(Faro)’와 ‘빛의 거장’으로 불리는 현대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여러 설치 작업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외팔보 형식의 건축물인 ‘패로(The Pharos) 윙’ 역시 저층 건물에다 위로 솟는 게 아니라 지하로 숨어버리는 구조를 택했다. 내부 디자인도 화이트 큐브의 정형성 따위는 내다버린 듯 음습한 동굴이나 비정형의 콘크리트 감옥 같은 분위기, 혹은 신비로운 기운을 머금은 공간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마주치는 작품의 구성 역시 범상치 않다. 아마도 모나를 상징하는 주제가 ‘섹스와 죽음’이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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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 브랜딩, 빼어난 콘텐츠와 경험 디자인의 조화
“그건 내 선택이 아니에요. 작가들이 그런 거지. 그들의 작품이 다 ‘섹스’와 ‘죽음’에 관한 것이니까요.” 올 초 한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월시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맞는 말이다. 넓게 보면, 현대미술의 주제가 이 두 가지 키워드와 접점을 갖지 않기도 힘들다. 물론 그의 소장품(월시는 3천 점 정도의 소장품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개 수백 점의 작품을 번갈아가며 전시한다)을 찬찬히 보노라면 취향 역시 ‘예사롭지’ 않은 듯 느껴지지만 말이다. 모나에는 관람객용 안내 책자는 물론 작품 배치도 같은 종이가 한 장도 눈에 띄지 않는데(월시의 자전적 얘기를 담은 책과 도록 등을 파는 서점은 있다), 이는 이미 편견 어린 렌즈를 착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배려(?)에서 나온 경험 디자인의 한 요소로 여겨진다. 하지만 원한다면 ‘O’라는 앱을 깔아 즉석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필자는 서두에서 밝혔듯 이번에는 사전 정보를 차단한 채 감상해봤다). 미학적 개성만으로 바로 눈치를 채기도 했던 거장이나 스타 작가(아이 웨이웨이, 크리스 오필리, 시드니 놀런, 빔 델보예, 에르빈 부름 등)의 작품과 더불어 작가의 이름값과는 상관없이 상당히 높은 수위의 다양한 작업도 재치 있게 섞여 있는 재미난 구성이었다(뻔한 면이 없진 않았다). 단테의 <신곡(The Devine Comedy)>을 제목으로삼은 알프레도 자르(Alfredo Jaar) 의 설치 작업이 놓인 공간을 비롯해 사전 예약 없이는 감상이 불가능한 전시장도 있다. 그중 단연 최고의 인기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들. 빛의 미학을 온 감각으로 느껴보는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같이 세계 다른 도시에서도 접할 수 있는 유형의 터렐 작품도 있지만, 모나에서만 경험 해볼 수 있는 ‘Weight of Darkness’라는 작품도 있다(빛과 어둠이 대비되는 구성인 셈이다). 사실 이 같은 대가들의 ‘커미션’ 작품을 들여놓는 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어쩌면 ‘도박사’ 이미지 탓이었을까?) 일례로 월시는 제임스 터렐에게 직간접적으로 연락을 취해봤지만 계속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터렐은 세계 최대 규모의 퀘이커 학교가 호바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결국 모나로 향했고 자신의 작품이 놓일 공간 디자인에도 직접 참여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터렐은 독실한 퀘이커교 신자다). 프랑스 현대미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경우에는 일정 기간 작가의 24시간을 녹화한 ‘개인 아카이브’를 남기는 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와 월시 둘 다 장난기 넘치는 캐릭터라 볼탕스키의 사망 시기를 놓고 내기를 했다(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볼탕스키는 생전에 이미 내기에 졌다).
이렇듯 ‘뻔한 듯 뻔하지 않음’을 추구해온 배짱 있는 결단과 통 큰 투자 덕에 모나는 매년 수십만 명의 방문객을 맞아들인다(2011년 오픈 이래 4백만 명 가까이 찾은 것으로 추산된다). ‘모나’라는 브랜드의 우산 아래 월시가 바랐던 지루하지 않은 ‘경험’을 지속적으로 선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팬데믹의 강타로 한동안 모나도 문을 닫거나 단축 운영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다시 정상 궤도로 들어섰다. 그저 ‘괴짜 천재’의 일탈 같은 취미로 보기에는 모나라는 공간의 면면에서 분명 예술에 대한 소신과 진심이 묻어난다. 게다가 월시는 자신이 경이로운 수준의 갑부는 아니라고 공공연히 말하지만(직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억만장자’까지는 아니라고) 모나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는 모양새다. 토마스 사라세노 같은 동시대 가장 흥미로운 작가들과의 기획전은 물론 커미션 작업도 끊임없이 진행하고 있기에 ‘under construction’ 사인이 곳곳에 붙어 있다. 현대미술계의 또 다른 세계적 거장 안젤름 키퍼의 작업이 들어설 공간도 마련되어 있단다(마침 필자의 ‘최애’ 작가 중 하나다). 유유히 물결을 가르는 모나 전용 페리를 타고 호바트 중심가로 돌아가는 길에 아무래도 다시 와야겠다고 결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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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a(Museum of Old and New Art)를 가다]

01. Mona(Museum of Old and New Art)를 가다_상(上) 체험 경제 시대, 別난 매력을 품다  보러 가기
02. Mona(Museum of Old and New Art)를 가다_하(下) 괴짜 컬렉터의 역발상이 낳은 원더랜드의 진면목은?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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