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men Who Inspire Us_12
그 안에 낡았지만 남다른 정취가 어려 있는 미술관이 자리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대개 흐뭇하거나, 경이로운 발견을 하게 되어서 늘 어느 정도의 기대치를 품게 되고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덕수궁관에서 지난가을 막을 올린 <박래현, 삼중통역자>展은 궁내를 거닐면서 커피 한잔하는 작은 여유도 잊고 ‘그림’에 집중할 만큼, 그리고 며칠 새 또다시 찾아갈 수밖에 없을 만큼 좋은 전시였다. 탄생 1백 주년을 맞이해 걸출한 예술가이자 20세기 ‘슈퍼 우먼’이었던 박래현을 진실되게 재조명하려 애쓴 이 영감 넘치는 전시를 혹여나 놓쳤다 해도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 MMCA 청주관으로 무대를 옮겨 가니까(1월 26일부터 5월 9일까지).
“가정생활에서 나 자신의 생활을 얻는다는 것은 말하기 쉽고, 실천하기는 어려운 큰 투쟁일 것이다. 가정과 예술의 완전한 양립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확실히 박래현은 언뜻 보기에 당시 한국 여성으로서는 꽤 ‘럭셔리한’ 삶을 살았다. 대지주의 딸로 태어나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제약이 많던 시절에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찌감치 ‘바깥세상’을 만나고 배웠으니 일제강점기를 거치긴 했어도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탁월한 미적 감각뿐 아니라 결혼, 연애, 사회 생활 등에 있어 당차고 주체적인 의식을 지닌 이른바 ‘신여성’이었다. 김기창과의 결혼(1947년)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결단한 행보였다. 부모의 강경한 만류에도 사랑을 택한 것이다. 물론 김기창은 명성 있는 화가였지만 청각 장애가 있고, 그보다 7살 어린 박래현은 도쿄 유학 시절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을 정도로 전도양양한 길을 가고 있었다. 당시의 수상작이 바로 ‘단장’(1943)이라는 작품이다. 그 시기에는 흔치 않은 검은색을 많이 쓴 대담함이 엿보이는 그림이다. 그런데 결혼한 뒤의 생활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녹록지 않았다. 관계의 문제라기보다는 ‘시간이 없어서’였다. 남편을 내조하고 가사와 양육을 동시에 해나가야 했으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붓을 놓지는 않았다. 대신 자연스레 일상에서 그림 소재를 찾았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같은 바쁜 시기를 보내면서도 차츰 일본화를 버리고 수묵과 담채로 당대의 미의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구현한 ‘현대 한국화’를 향해 나아갔다는 점이다. 이 시기의 작품을 보면 입체주의 등 서양 화단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지만 하나의 양식으로 참고했을 뿐 그녀는 한지와 먹을 쓰는 ‘동양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화단의 인정도 받았다. 1956년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노점’으로 국전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인 김기창을 비롯해 중진 동양화가들과 ‘백양회’라는 친목 단체를 결성해 동양 화단을 이끌었는데, 이를 계기로 해외에서 전시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1948년부터 1971년까지 김기창과 ‘부부전’을 12회 차례나 개최하기도 했다. 능력자는 능력자였던 셈이다.
1960년 박래현은 해방 뒤 처음으로 바다 건너 해외 문물을 직접 접한다. 대만, 홍콩, 일본 등지를 돌면서 추상화의 물결을 온몸으로 느낀 그녀는 본격적으로 ‘추상’에 돌입한다. 이 역시 조형 정신을 그대로 수용했다기보다는 한 양식으로 받아들여 안료나 재료 등을 다양하게 쓰면서 동양화로 풀어낸다. “예민한 동양의 피부랄까. 화선지에 스며가는 먹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색조의 변화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조용한 동양의 멋을 자아내는 우리만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본다.” 직접 남긴 글처럼 그녀는 동양화의 섬세함을 사랑했다. ‘잊혀진 역사 중에서’라는 단일한 제목을 지닌 11점 시리즈는 1960년대 초중반기의 추상 대표작. 장엄한 이 제목을 보고 전시 큐레이팅을 맡은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처음에는 뭔가 있어 보여서 가져다 썼나 싶었는데, 박래현의 작품을 계속 관찰하다 보니 추상, 판화 등으로 이어지면서 결국에는 하나의 초점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결국 ‘시간’인 것 같아요. 인류의 근원, 오래된 역사, 오래된 자연 등에 관련된 이미지가 거듭 반복되는데, 그것에 대한 단초를 보여주는 게 바로 이 시리즈가 아닐지. 동양적인 것, 오래된 것, 장구한 것들 같은 걸 연상하면서 작업한 게 아닐까….”
이번 전시의 포스터와 도록 표지를 수놓은 ‘띠 초상’ 작품들은 독자성을 드러내면서도 그 같은 ‘근원’을 향한 탐구적인 일관성을 품고 있다. 당시에는 이채로운, 그래서 낯설게도 느껴졌을 법한 색상이나 무늬의 조합은 골똘히 보노라면 탯줄 같기도 한, 생명성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태양의 생동감을 황색 빛으로,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을 붉은 피로, 시대에 대한 고민을 검은 침묵으로 표현했다”는 ‘띠 추상’에 대한 그녀의 설명도 있다). 그러고 보면 ‘새’나 ‘기도’ 같은 1950년대 작품이나 1970년대 작업에도 ‘생명의 원류’를 다루는 그녀의 관심사가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전시 여행’으로 해외를 활발히 다닌 그녀는 이국적인 문화를 체험하면서 판화와 태피스트리로도 지평을 넓힌다. 특히 1967년 ‘국가대표’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한 뒤 미국에 남아 판화를 배웠고, 1974년 귀국해 판화전을 열기도 한다. 이렇듯 지구촌을 누빈 행적과 이력을 보면 당시에도 대중적인 사랑 을 듬뿍 받지는 않았어도 실험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동양화’, ‘현모양처’, ‘운보 김기창의 아내’라는 여러 수식어의 그늘에 가려진 면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이 짧았다. 작가로서 한창 무르익던 시기에 갑작스럽게 간암이 발병해 1976년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당시 나이가 57세였다.
“여러 변화를 거치면서 나중에는 ‘종합화’되는 시기가 있었을 텐데, 안타깝지요.” 김예진 학예연구사의 말처럼 50대라는 연령대는 미술가로서 왕성한 시기인데, 그때 꺾인 박래현의 생은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에 판화와 태피스트리를 익히고 동양화의 표현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한 흔적이 보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누구보다 많은 걸 누린 듯하지만 동시에 잠잘 시간이 늘 부족했을 정도로 분주했고, 한시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던 그녀의 ‘혹독한’ 삶은 열렬한 예술혼을 남들보다 일찍 하늘로 보내버렸다. 그녀가 더 긴 삶을 이어갔다면 남겼을 예술적 성취를 상상해보노라면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냥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면(원래 계획대로)’ 이라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다. 모윤숙 시인이 남긴 글귀처럼 “누구보다도 내실을 이룬 삶을 살았기에.” 게다가 그녀에게는 사랑하고 존경하기도 한 김기창이라는 ‘큰 산’이 작가로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주제 의식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동력이 됐을 것이다. “한 방(작업실)에 펼쳐지는 두 개의 세계.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 무서운 대결이 아닐 수 없다”고 그녀는 고백하기도 했다. “여성적인 것, 모성, 여성성에 대한 고민이 일관되게 발전했어요. 한계를 자각하기도 하면서요. 하지만 주부로서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태피스트리 같은(수공) 기술을 익혔고, 결국 이것이 김기창과 박래현의 작품 노선을 갈라놓은 지점이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김기창보다도 더 커버리게 된.”
[ART + CULTURE SPE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