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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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 2016

글·사진 오화진(미술가)

현대미술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오화진은 섬유 미술가이지만 그녀의 작품은 그 한 가지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다. 드로잉, 페인팅, 입체 조형, 공예, 오브제에 이야기를 접목하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작업하는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얘기한다. 전통과 현대, 미술과 공예, 서양과 동양, 계획과 본능, 남성과 여성 등 그녀의 작품은 경계를 아우르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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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뒷자리에 앉는다. 오른쪽 벽에 ‘돼지 머리카락’이라고 쓰인 낙서, ‘건축 설비’ 간판, 이번 달 전기세 고지서 ‘1만9천8백원’이 동시에 눈앞을 지나간다. ‘머리카락이 돼지 몸뚱이 형태로 자란다면 머리카락은 최대 몇 개나 될까? 1만9천8백 개? 건축 설비-소를 바싹 말리기 위한 설비에 제일 중요한 전기! 머리카락을 비벼대서 정전기를 일으키면 돼지 가죽 표면에 상처가 날 텐데…. 엥? 그럼 머릿결이 상하잖아!’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잠깐의 생각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잠재의식에 일단 가둬둔다. 이러한 일상의 단면은 내가 작업하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체계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본능이 튀어나올 수 있는 여지를 둔다. 이렇게 자유로이 방목해도 이것이 반복되면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상과 내용, 그리고 표현 방식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고 본성이며 핵심이다.

짝짓기 프로젝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작업에도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업에 임할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계획을 세우지 않고 운명에 맡긴 채 생각나는 대로 진행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완성’이라는 또 다른 형태와 마주하게 된다.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행하는 내내 궁금해하던 ‘완성’이라는 형태는 내겐 발견과도 같다. ‘무작위적인’ 창작 방법은 작가의 본성과 무의식 속 취향이 노출되는 부담을 안고 있지만, 창작 과정 내내 놀이처럼 작업에 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일명 ‘짝짓기 프로젝트’로 발전시켜 풀어나갔는데, 설명을 더 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종이를 기분 내키는 대로 자른다.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의 형태를 해석해 드로잉으로 표현한다. 조금 전까지는 그냥 종이일 뿐이었는데 ‘오화진’과의 짝짓기를 통해 영감의 원천으로 거듭난 것이다(Project: What’s the Figure?). 또 우연히 만난 오브제를 무작위적으로 변형한 뒤 그 변형된 상태를 대상으로 ‘생(生)의 스토리’를 짓는다. 즉, 오브제는 ‘오화진’과의 짝짓기를 통해 운명이 바뀐 것이다(Project Ⅱ: The Fate of the Object). 또 다른 프로젝트에선 완성된 작품을 다시 탈바꿈시켜 운명의 변화와 환생 등의 이야기로도 발전시킨다(Project Ⅲ: Changed the Fate). 즉흥적 창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09년 전후였던 것 같다. 그 전에는 생각을 정리하고 스케치를 하고 계획을 세워 작업에 접근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점점 숙제처럼 나를 억압하는 것 같아 갑갑했다. 작업을 하면 할수록 그 행위 자체에서 욕망을 표출하는 동시에 쾌감을 얻고 싶었고, 본능적이며 주관적인 작업을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사실 들여다보면 창작 방법이 ‘선(先)개념 → 후(後)표현’에서 ‘선(先)표현 → 후(後)개념’으로 바뀐 것일 뿐, 머리를 쓰는 건 같다. 좌뇌부터 시작되느냐 우뇌부터 시작되느냐의 차이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즐거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취향의 범위에서 매번 또 다른 맛있는 걸 찾는 식욕처럼 조각을 하면 페인팅이 하고 싶고, 페인팅을 계속하면 붓 끝에 진저리가 나서 바느질을 하고 싶고, 어떤 날은 글짓기가 하고 싶다. 이는 계획 없이 본능에 맡긴 채, 운명에 맡긴 채 작업을 하기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러다 보면 작업 자체가 욕망의 발로(發露)가 된다.

개인의 문화를 구축하다
간혹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작가로서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내 답은 “‘오화진’이라는 개인의 문화를 구축하고 싶다”이다. 이제 세계화는 더 이상 새로운 이슈가 아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개인의 표현이 다수의 표현을 압도할 때도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평범한 개인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창작을 업(業)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좀 더 차별된 뭔가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는 개인의 문화 구축을 제안한 것이다. 문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여러 국면 가운데 ‘정신의 소산’으로 봤을 때 국가나 민족의 문화가 있듯이 작은 범위로 개인의 문화도 있다는 가정을 해보았다. 문화가 ‘정신의 소산’이라면 개인의 문화를 구축하려면 그 개인의 정신부터 파악해야 하고, 그 정신의 근간이 되는 본능과 본성을 파고드는 것이 첫 번째 수순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흥적 창작 방법은 본성과 욕망을 수면 위로 올리기에 적합한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무작위적 시각적 창작 뒤에 본인의 정신적 사고와 취향이 담긴 스토리를 덧입힌 ‘짝짓기 프로젝트’ 작업 역시 이러한 흐름에 부합돼 진행한 것이다. 난 그동안 내 인생의 ‘모토’와 나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의 ‘욕망’, 여기에 나의 본성과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을 담아 창작해왔다. 이 과정에서 외부가 아닌 오로지 ‘나’라는 개인의 관점이 주체가 됐다. 순수 미술, 공예, 디자인, 글쓰기 등 경계를 아우르며 진행하는 여정에서 작업이란 ‘일’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욕망’ 그 자체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양한 실행이 가능했던 것 같다. 나는 어떤 작업이든 개인의 문화 위에서 파생되길 바란다. 그래서 순수 창작 작업을 모티브로 하거나 거기서 파생된 방법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미래엔 순수 미술이나 공예 혹은 디자인이라는 ‘전공’을 기준으로 경계를 나누는 일이 아니라 어떤 ‘개인의 문화’를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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