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열풍이 반갑고도 걱정스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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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김미경(미술사학 박사, 강남대학교 교수, 한국예술연구소KARI 소장)

‘단색화’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점차 부각되면서 이를 둘러싼 인기만큼이나 논쟁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제야 국내 미술이 해외 무대에서도 경쟁력 있는 ‘사조’나 ‘브랜드’를 내세울 수 있다면서 환영하는 기색도 눈에 띄지만, 이론적 토대가 빈약한 채 과열되고 있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들린다. 어쨌거나 모처럼 한국 미술이 주목받는 현상 자체는 반가운 기회다. 한 미술사학자는 이 시점에서 미학적 본질을 토대로 단색화라는 용어부터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 가지 색깔이라는 뜻의 ‘모노크롬(monochrome)’, 그리고 ‘그림(畵)’이라는 개념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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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술계에서는 소위 ‘단색화’ 열풍이 불고 있다. 각종 신문 잡지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크게 확산되는 열풍이라고 보도하고, 한국의 대표적 현대미술인 ‘단색화(單色畵)’를 표기할 때 한국식 발음에 따른 ‘Dansaekwha’라는 영어 표기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드높다. 영문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지난해부터 불기 시작한 단색화 열풍이 곧 터질 거품인지, 아니면 이제 출발점을 막 떠난 것인지, 과연 무엇이 진짜 얼굴이냐고 새삼스럽게 묻기도 한다.
이 열풍의 원인은 무엇일까? 단색화 바람은 1970년대에 한국 현대미술계의 일각에서 부각됐던 미학적 가치가 이제야 세상에서 진정한 빛을 발하며 일어난 현상일까? 혹은 일부 상업 갤러리들이 추진한 비즈니스 전략의 영향 때문일까?
역사적으로 중요한 미술 경향은 대부분 미술사와 미학,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사회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한국의 단색화 바람도 그러한 요소들이 밀접하게 맞물려 나타난 것인데, 그 연결 고리와 몇몇 역사적 사실만 제대로 이해하면 열풍의 원인을 쉽게 알 수 있다.

‘단색파’ 작가들의 다양한 방법론적 개성

작가마다 다양한 개성과 독특한 방법론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른바 ‘단색화 작가’로 분류되는 이들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각적으로 각각 미묘하게 비슷하거나 조화된 색들이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박서보의 ‘묘법’을 예로 들어보자. 갈회색조나 청회색조 등의 오일 물감이 미처 다 마르지 않은 캔버스 위에 연필로 타원형을 연결하며 그리듯 자연스러운 선을 그려나간다. 반복되는 그 선은 규칙적이지만 획일적이지 않고, 타원의 형태는 비슷할 뿐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거친 붓으로 도자기에 안료를 바른 귀얄 무늬 분청사기 같은 모습인 듯, 무아지경으로 물레질을 반복하며 백자를 빚는 조선 도공의 손길을 통해 태어난 듯한 모습이다.
보릿고개를 겪어야 했던 가난한 시절, 불경 소리를 들으며 신문 위에 펜을 휘적거리며 ‘긋기’ 시작했던 최병소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방법론을 취한다. 그는 ‘그리기’를 부정했고 ‘칠하기’를 부정했다. 그는 “지우는 것보다 마음이 편한 것이 없었고 비우는 것보다 더 큰 홀가분함이, 가벼움이, 기분 좋음이 없었다”라고 한다. 검은색 볼펜으로 신문지 앞뒤의 활자와 여백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우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를 또다시 4B 연필로 지워나가면 신문지는 군데군데 찢기고 너덜너덜해져 이미 정보 전달의 사회적 기능을 상실해버린 ‘물질’이 되고 만다. 해외에서 그의 작품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마니아들이 적지 않은 데 비해, 시공간의 물질성이 매우 강렬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상의 특성 때문인지 ‘단색화’라는 타이틀을 내건 전시에 그의 이름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색화에 대해 말하기를 원한다면 일종의 정신적 승화 상태로 느껴지는 최병소의 작품이 지닌 ‘반복의 미학’과 1970년대 한국 사회와 정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우환은 ‘단색화’를 언급할 때마다 “최병소는 대단히 중요한 작가입니다”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독특한 제작 방식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하종현. 그는 공장에서 하얀 제소를 칠해 화방에서 판매하는 흰 캔버스가 아니라 올 굵고 구멍 숭숭 뚫린 마대 천을 사용한다. 한국의 토담집을 연상시키는 황토색이나 희끄무레한 색의 물감을 흙손 같은 도구로 캔버스 뒤에서 밀어 올리고 앞에서 다시 밀어내기를 반복하는 그의 고유한 방법론은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중국 회화에서 ‘양면 채색법’은 문자 그대로 종이의 앞뒤 모두를 채색해 선명도를 높이는 방식인 데 비해, 고려 불화나 조선 시대 초상화는 한지의 뒤쪽에서부터 물감이 배어 올라오는 은은함을 중시해 신비한 기품을 더해왔다. 전통적인 ‘배채법(背彩法)’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음에도 물감을 캔버스 천의 앞뒤에서 올 사이사이로 밀어내는 하종현의 작품 제작 방식은 전통적인 한국의 문화적 잠재태(潛在態)가 한국 현대미술에서 되살아난 전형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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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單色)’이 아니라 ‘단색조(單色調)’

이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띠고 있지만 결코 ‘한 가지 색으로 된 그림(단색화)’이 아니다. 1970년대에 각기 다른 독특한 방법론과 미학으로 한국의 추상미술을 선도해왔다고 자부하는 박서보, 최병소, 하종현, 정상화 등의 전성기 작품들을 최근 유달리 ‘단색화’라고 부르는 움직임이 있음에도 말이다. 단색화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한 가지 색으로 된 그림’을 뜻하는 서구의 ‘모노크롬 페인팅(monochrome painting)’이라는 용어를 한국어로 직역한 것이다. 따라서 ‘단색화(Dansaekwha)’라는 영어 표기를 하더라도 그 의미는 서구적인 ‘모노크롬’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서구에서 개념이 확정된 용어를 쓸 경우, 어떤 번역어도 그 개념의 하위개념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적어도 일본의 미술 경향인 모노하(ものは)나 구타이(ぐたい), 한국의 민중 미술(Minjung Misool) 등의 명칭은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 필자는 이들을 ‘단색조’ 예술이라 불러왔다. 10여 년 전에는 ‘단색조 회화’라는 말이 필자를 포함한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통용되기도 했다. 최근 필자는 이 작가들의 작품을 ‘단색조 예술’이라고 확장 통칭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단지 ‘회화’의 범주에 그치지 않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물질성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작품들의 측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한 필자의 주장은 최근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전문가 특강에서 큰 공감을 얻었다).
모노크롬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작품 제목으로 쓰고 자신의 푸른 색을 IKB(International Klein Bleu)로 명명한 것으로 유명한 작가는 프랑스의 이브 클랭이다. 그러나 클랭을 포함해 20세기 초 말레비치의 흑백 회화에서 이탈리아 작가 피에르 만초니의 ‘아크롬(achrome, 색이 없다는 뜻)’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서구 모노크롬의 범주에서 다루는 작가들 역시 단순히 자신들의 작품에서 ‘한 가지 색’의 의미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또 정신성과 물질성을 광범위하게 다루는 것은 물론이다.

역사적 기원, <다섯 가지 흰색전>과 이우환

1975년 일본 도쿄화랑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색(韓國 五人の作家 五つのヒンセク)>이라는 긴 제목의 전시를 열었다. 그러나 그 전시는 이미 1970년대 초엽부터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한 화랑주 야마모토 다카시와 일본 비평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 그리고 재일 작가 이우환의 주도로 준비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미협이 주관한 제1회 앙데팡당전(1972)에서 허황과 이동엽의 흰색 회화를 주목했고 서승원, 권영우, 박서보와 함께 5명의 한국 작가로 구성된 전시를 기획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인들이 기획하고 전시한 단색조 예술의 최초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백자를 애호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1970년대까지 일본에서 ‘한국’ 하면 떠올리는 것은 ‘흰색’이었던 것일까. 그들은 1970년대 한국에서 다시 발견한 ‘흰색’은 서구의 백색 모노크롬 회화에 비해 “백색은 도달점으로서의 하나의 색채가 아니라 우주적 비전의 틀 그 자체”(나카하라 유스케)라고 표현했다. 일본인들은 서구 모노크롬 회화에 비해 무언가 다른 한국 작품들이 보여주는 섬세한 중성색의 느낌을 말하기 위해 굳이 한국어 ‘흰색’, 즉 ‘흰새쿠 (ヒンセク)’라는 용어를 썼다. 그러나 오히려 한국 측 비평가(이일)는 그들을 “혹시 모노크롬의 것으로 묶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이후 수많은 전시와 비평에서 ‘한국의 모노크롬’이라는 말을 유행시켰고, 서구 모노크롬이나 모더니즘 개념과 혼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용어의 사용은 참으로 신중해야 한다. 한편 일본에서 <다섯 가지 흰색전>을 추진하게끔 한 이우환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일본 모노하 운동의 이론적 지주로서 활약했는데, 1972년 한국의 명동화랑에서 모노하 맥락의 전시를 연 뒤에는 다시 회화 작업을 병행했다. 그러나 이우환의 예술은 ‘관계항’과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바람으로부터’, ‘조응’, ‘다이얼로그’ 등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갈 뿐 한국의 단색조 예술과는 운동사적으로도, 미학사적으로도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 굳이 관련이 있다면 그들의 한국인 예술가로서의 우정 관계 정도일 것이다.

미학적 가치와 정치, 경제, 사회사

단색조 예술 경향은 그룹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만든 ‘흰색’의 개념에서 시작됐으나 곧바로 박서보 작가를 중심으로 한 <에꼴 드 서울>이나 <서울현대미술제> 같은 대형 전시를 통해 한국에서 확산됐다. 활동하는 작가들의 숫자도 전국적으로 수백 명에 달했다. 1970년대의 ‘집단 개성’이라는 묘한 신조어를 낳으면서 일종의 정치적인 미술 운동사로 비치기도 했던 그것은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을 국전 중심의 미술계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러면 그 미학의 본질은 무엇일까? 조선 백자의 미학적 토대는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미적 개념이다. 단색조 예술이 1970년대 일본인들의 조선 백자에 대한 향수와 식민지 시절의 미적 개념을 넘어서는 미학을 정립하려면 많은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노력이 아직도 많이 필요하다. 그것이 식민주의의 극복이자 ‘기학(氣學)’이나 성리학 등 우리 전통 사상과 문화를 현대미술에서 깊게, 새롭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아울러 서구 모더니즘 개념과 비교되는 미학을 논의하려면 현재 학계와 비평계의 아마추어리즘을 좀 더 벗어날 필요가 있다. 1970년대에 단색조 예술은 언더그라운드 실험 미술과 달리 엘리트주의 아방가르드로서 건재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양면이었던 새마을 운동과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개발도상국으로 발돋움했던 한국의 현대미술의 표상이던 단색조 예술, 그것이 오늘날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몇몇 학술 연구자들의 애정 어린 연구가 지속돼왔기 때문이며, 그 학술적 토대가 자본주의 경제의 필요성과 맞물린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사회 현상과 함께 발아된 단색조 예술이 이제 그 미학적 해석을 더하며 비판과 함께 성장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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