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물방울을 머금은 유리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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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2, 2013

에디터 고성연

한갓 이름 없는 풀에도 철학은 담겨 있다고 했다. 하물며 인류의 오랜 벗인 술, 그리고 이를 담는 잔에는 얼마나 풍부한 내공과 사연이 배어 있을까. 특히 이 유혹적인 액체를 근사하게 머금는 잔의 디자인은 단지 허세 어린 맵시를 위한 ‘꼴’이 아니다. 오색찬란한 술 세계에서 각양각색의 잔이 품고 있는 예술과 과학의 절묘한 조화는 생각보다 흥미롭고 깊이도 있다. 먼저, 언젠가부터 우리네 삶에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든 ‘신의 물방울’을 담는 와인 글라스의 미학을 살펴본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크리스털 잔들이 늘어서 있다 해도, 그 소재와 두께에 따라 잔의 벽을 타고 흐르는 소위 ‘와인의 눈물’이 미끄러지는 느낌이 오묘하게 다를 만큼 섬세한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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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이 2개 있다. 하나는 매우 세련되고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황금 술잔이고, 다른 하나는 투명한 유리잔이다. 물거품처럼 얇고 투명한 유리잔이다. 당신은 (좋아하는) 와인을 따라 마신다. 이때 어느 잔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와인을 아는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알아낼 수 있다.”中에서


1930년, 영국의 서체 디자인 전문가인 비어트리스 워드라는 인물은 형태보다 내용을 중시해야 한다는 디자인 방법론을 다룬 한 강연에서, 이처럼 이상적인 타이포그래피를 투명한 술잔에 비유한 표현으로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 그녀는 “누구나 한 번쯤은 수백만원짜리 황금 잔을 써보고 싶겠지만 와인 애호가라면 아마도 투명한 크리스털 잔을 골랐을 것”이라며 “투명한 잔은 ‘내용물’의 아름다움(색깔)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도자기 잔이나 금속 잔 대신 ‘글라스’를 택했다면 그 사람은 단연 ‘어떻게 보이나’보다 ‘어떤 역할인가’에 대해 먼저 고민하는 ‘모더니스트’라고 강조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명제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와인의 색이 왜곡돼서는 안 된다’는 워드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핵심 요소인 ‘미각’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리’에 해당하는 잔대(stem)가 ‘몸통(bowl)’을 떠받치고 있기에 ‘스템웨어(stemware)’로 불리기도 하는 와인 글라스의 비약적인 발전은 20세기 중반부터야 시작됐다. 와인은 그 역사가 1만 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될 만큼 오랜 연륜을 지녔지만, 와인 잔의 경우에는 납이나 크리스털로 만든 제품이 17세기 말 영국에서 처음 출현했을 정도로 소재와 모양새의 고급화, 과학화가 비교적 늦게 이뤄진 것이다. 워드가 한 세대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빛깔도 빛깔이지만 ‘잔의 품질은 와인의 맛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크리스털 잔’을 옹호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 와인이 지니고 있는 부케, 미감, 밸런스 등은 그 와인을 담는 잔의 모양과 품질에 영향을 받는다는 논리를 펼치면서 말이다. 이러한 논거를 미학과 과학의 조화를 담은 ‘작품’으로 뒷받침한 세기적 혁신의 주인공은 ‘진정한 모더니스트’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고(故) 클라우스 J. 리델(1925~2004)로, 2백50년 넘게 유리 제품을 만들어왔다는 오스트리아 리델(Riedel) 가문의 9대손이다.
바우하우스의 철학을 연상케 하는 와인 글라스 디자인 왕국 리델
‘와인 글라스의 대부’로 통하는 클라우스 리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전쟁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다음, 부친과 함께 잿더미에서 다시 가문을 일으킨 ‘오뚝이 근성’이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스와로브스키 가문의 지원으로 화학을 공부한 그는 이학도 출신답게 분석적인 데다가 뛰어난 심미안까지 갖췄다. 1973년에 처음 선보인 ‘소믈리에 시리즈’는 이러한 복합적인 자질과 열정의 산물이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도시 오르비에토에서 소믈리에들과 한 가지 와인을 여러 가지 모양의 글라스에 따라 마신 뒤 가장 완벽한 맛을 표현해주는 글라스를 찾는 실험을 했는데, 이를 통해 와인의 특징에 따라 잔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야 한다는 결론을 얻고는 야심 차게 실천에 옮긴 것이다. 내공이 만만찮은 장인들이 직접 입으로 불어 만드는 수공 작업으로 탄생한, 다리가 길고 날렵하며 매끈한 데다 몸통에 무늬가 없는 이 시리즈는 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색깔을 입힌 화려한 잔들이 판을 치던 당시에는 그야말로 ‘파괴적 혁신’이었다. 특히 커다란 볼을 감싸는 우아한 곡선미가 몹시도 빼어난 부르고뉴 그랑 크뤼 잔의 경우에는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받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영구 소장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실용성을 주축으로 한 절제미를 중시한 바우하우스의 철학에 영감을 받은 듯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장식을 배제했는데도 은근히 아르누보풍의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담고 있는 리델의 와인 잔. 중요한 건 이러한 디자인에는 ‘존재의 이유’가 뚜렷하게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와인이 인간의 오감에 제공하는 ‘메시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과학적인 잔의 꼴과 소재를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미학적 감성을 입힌 디자인이라는 주장이다. 와인 문화가 점점 더 확산되면서 갈수록 많은 이들이 이러한 ‘술잔의 철학’에 힘을 보태는 듯하다. 현재 리델 말고도 독일의 슈피겔라우(Spiegelau)와 프랑스 브랜드인 셰프앤소믈리에 등 보르도, 부르고뉴, 스파클링 와인, 화이트 와인 등 와인 종류에 따라 디자인한 크리스털 잔을 만드는 글라스 메이커들이 활약하고 있다. ‘잔의 과학’에 유독 고집스러울 정도로 열중해온 리델은 단지 레드, 화이트, 스파클링 등으로 와인을 나누지 않고 개별 품종의 특성에 따른 제품군을 내놓고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 피노 누아, 시라 등 품종에 맞춰 와인 글라스의 볼 크기, 지름, 높이, 입구, 경사각 등의 요소들에 변화를 줌으로써 복잡다단한 디자인 스펙트럼을 완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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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잔의 꼴은 와인 맛에 영향을 미칠까?
이러한 와인 잔에 얽힌 디자인 철학은 네 가지 맛을 느끼는 혀의 부위가 다르다는 사실을 기초로 한다. 단맛은 혀의 끝 부분, 신맛은 양옆, 쓴맛은 목에 가까운 안쪽, 짠맛은 혀 아래쪽에서 ‘섭렵’한다. 와인이 혀의 어느 부위에 먼저 닿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예컨대 잔의 볼이 통통하면 와인이 산소와 만나 유유자적 놀면서 본연의 향을 잘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창출된다. 또 입구가 위로 갈수록 좁아지면 와인의 향을 보다 오랫동안 가둬둘 수 있다. 따라서 보르도 레드 와인 잔은 특유의 짙은 타닌 성분이 덜 느껴지면서 다층적인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도록 볼이 적당히 넓은 계란형을 띤다. 그 때문에 볼부터 입구까지 경사가 거의 없어 와인이 혀끝부터 안쪽으로 널찍이 퍼진다. 하지만 같은 레드 와인이라도 보르도 와인에 비해 향이 풍부하고 산도가 높은 부르고뉴 잔의 경우, 볼 부분이 더 풍만해 섬세한 아로마의 발산을 도와주는 한편 입구가 살짝 바깥으로 말려 있다. 와인이 혀 중간이 아니라 끝 부분에 떨어지게 함으로써 향을 오래 만끽하는 동시에 산미는 완화해 목 넘김이 부드러워지도록 정교하게 디자인됐다. 와인 잔 효과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대상은이라는 책을 펴낸 박찬일 셰프도 지적했듯이 샴페인일 것이다. 방울방울 춤추는 기포를 오래 잡아두기 위해 보통 플루트처럼 생긴 기다란 잔을 쓰는데, 특급 빈티지의 경우엔 얘기가 달라진다. 크뤼그(Krug)와 같은 프리미엄 샴페인의 경우엔 보르도 특급 레드 와인에 비견되는 깊은 풍미를 지녀, 중간은 넓게 퍼졌다가 끝 부분은 좁아지는 잔을 권유한다. 이러한 잔에 따른 맛의 차이는 한 품종의 와인을 각기 다른 잔에 담아 시음해보는 ‘글라스 테이스팅’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화이트 와인 중에서 갓 벤 풀의 신선한 내음이 난다는 소비뇽 블랑을 마신다고 치자. 향이 잘 발산되도록 비교적 몸통이 넓지 않고 입구가 좁은 전용 잔을 사용하면 코를 입구에 갖다 대기만 해도 상큼한 향이 쏙 올라오는 느낌이다. 이를 둘레는 더 좁지만 입구가 얇지 않고 다소 뭉툭하게 말린 듯한 저가의 ‘조커 잔’으로 바꿔 들이켜보면, 혀 양쪽으로 와인이 무분별하게 떨어지면서 섬세한 뉘앙스가 수그러드는 게 감지된다. 이를 종이컵에 옮기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종이 냄새가 와인 본연의 향을 음미하는 걸 방해하기 때문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향이 날아가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의심 섞인 질문이 절로 솟구친다. 그런데 이 와인을 다시 처음 사용한 전용 잔에 따라 붓고 들이켜면 원래의 상쾌한 아로마가 거짓말처럼 다시 느껴진다. 이번에는 다른 화이트 와인 품종인 샤르도네와의 비교! 대개 샤르도네 잔은 오크 통 숙성을 거친 특유의 묵직한 향이 잘 발산되도록 잔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고 볼은 넓다. 와인이 입안에 떨어지면 혀 전체를 감싸면서 부드럽고 크리미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를 소비뇽 블랑 잔에 옮기면 맛이 달라진다. 무겁지 않은 과일 향은 잘 올라오는 편이지만 혀 뒤쪽에서 쓴맛이 나면서 왠지 거친 질감이 느껴진다. 전체적인 균형감이 깨진 것이다. 믿기 힘들다면, 한번 몸소 참여해볼 것을 권유할 만한 흥미로운 체험이다.
크리스털의 과학
와인 하나 마시는데 왜 그렇게 번잡스럽게 신경을 써야 하냐는 볼멘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와인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저마다 취미에 대한 열정의 농도가 다르고 예산의 여유에도 차이가 있을 테니 일리 있는 말이다. 와인을 둘러싼 세계의 면면을 날카롭게 다룬 을 저술한 맷 크레이머는 “이렇게까지 하는 게 좀 지나친 것은 아닐까?” 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각 와인에 맞는 특수한 글라스가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미식가가 다양한 형태의 식기를 갖추고 있듯이, 몇 가지 정도 갖추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자신의 와인 잔 컬렉션 규모를 어떻게 꾸려가든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사기로 마음먹었다면 ‘제대로 된’ 제품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베스트셀러 의 저자 마니 올드는 무늬가 없고 투명하며, 편하게 잡히고, 실용적이되 입구 가장자리가 가장 얇은 잔을 고르라고 조언한다. 가장 훌륭하다는 소재는 크리스털인데, 여기에도 성분에 따라 몇 가지 종류가 있다. 리델처럼 와인이 지닌 본연의 향을 극대화한다는 산화연(PbO)을 함유한 ‘레드 크리스털’ 제품을 갖춘 브랜드, 그리고 슈피겔라우나 쇼트즈위젤, 셰프앤소믈리에처럼 플래티넘, 티타늄 등을 섞어 만든 ‘무연 크리스털’ 잔을 보유한 브랜드들도 있다. 이 중 가장 ‘하이엔드’로 여겨지는 레드 크리스털 잔은 일반 유리잔보다 무겁고 경쾌한 소리가 나며 투명도도 뛰어나지만, 깨지지 않도록 잘 다뤄야 한다. 전용 글라스의 사용을 ‘강력 추천’하는 샴페인의 경우, 많은 전문가들이 레드 크리스털 제품에 무게를 실어준다. 와인 속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가 글라스의 거친 면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기포가 생기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육안으로도 볼 수 없는 미세한 요철을 표면에 품은 크리스털 잔에 공기방울이 더 활기차게 피어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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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영혼을 일깨우는 매력적인 도우미, 디캔터
이 밖에 와인을 즐기는 데 잔과 함께 짝을 짓는 유용한 도구로 디캔터를 빼놓을 수 없다. 와인의 향을 일깨우는 도우미인 디캔터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사용하기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품목이다. ‘올드 와인’의 경우에는 침전물을 걸려주는 효과가 있고, ‘어린 와인’의 경우에는 빠른 시간 내 공기에 노출시켜 ‘깨어나게 만든다’는 ‘브리딩’의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와인이나 와인 글라스에 비해 다루기가 비교적 쉽다. 특별히 이상적인 모양새도 없고, 디캔팅 과정에 어려운 도구나 상식이 필요하지도 않다. 뱀, 달팽이, 오리 등 각종 생물의 유기적인 곡선을 근사하게 풀어낸 디캔터부터 피사의 탑과 같은 유적이나 건축물을 연상케 하는 디캔터까지…. 아름다운 디캔터에 와인이 깨끗하게 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이들이 꽤 많은 걸 보면, 제일 중요한 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즐기면서 체득하는 것이다. 와인과 함께 여물어가는 인생에서 크리스털 잔이든, 디캔터든 결국 우리의 벗일 뿐이지 정복 대상이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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