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건축 산책> 빛이 머물다 가는 곳, 그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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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5, 2023

글·사진 박혜연 | 기획 고성연

‘일본의 지중해’ 세토내해의 맏형, 아와지시마의 재발견


집 앞 바다는 한번도 ‘파란’ 적이 없었다. 흐드러지게 빛이 머물다 떠나버리는 빛의 정류소 같은 곳을 단일 색으로 언어화하기엔, 좋아해 마지 않는 ‘파랑’과 ‘바다’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언어로는 조망하기 어려운 바다는 숨가쁜 변화를 포착하기에 눈부시게 빛나고, 차분하다가 성이 났다가 그윽해진다. 바다는 인간의 개념적 언어 너머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다. 매일매일 새로운 색이 태어난다. 이 바다 풍경 속에는 변화무쌍한 물살과 색으로 산만해진 마음을 달래주는 무뚝뚝해 보이는 섬이 하나 담겨 있는데, 한국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아와지시마(淡路島)’다. 높지 않은 산 능선이 안정감을 주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여름이 되기 전 봄날의 해무가 가득한 날은 감쪽같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신비한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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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의 신화에 따르면 아와지시마는 이 나라에서 최초로 생겨난 섬으로 전해진다. 7백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존재하는 다도해로 ‘일본의 지중해’라 불리는 세토내해(瀨戶內海)에 위치한다. 북동쪽의 혼슈, 남쪽의 시코쿠, 서쪽의 규슈로 에워싸인 세토내해에는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 시리즈를 비롯해 곳곳에 녹아든 예술로 유명한 섬 나오시마도 속해 있다. 한국의 거제도 보다 약간 넓은 아와지시마는 세토내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고질라 ‘덕후’들의 성지, ‘니지겐노모리’를 비롯해 가족 단위로 즐거운 주말을 보낼 수 있는 테마파크, 안도 다다오의 규모가 가장 큰 프로젝트인 ‘유메부타이’, ‘물의 절’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팬데믹 기간 건축가 반 시게루의 리트리트 시설인 ‘젠보 세이네이(Zenbo Seinei)’가 새롭게 들어섰다. 해외 유명 건축 미디어에서 앞다퉈 취재해 갔지만 아직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머잖아 예약이 쉽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의 명소’다. ‘쉼’과 ‘명상’만을 위한 건축, 그리고 항상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회적 건축가 반 시게루의 최신작이라 한걸음에 달려가게 됐다. ‘건축은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했다. 그만큼 우리의 삶에서 ‘쉼’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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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혼슈)에서 아와지시마로 건너가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육로인 아카시해협대교(이하 ‘아카시대교’)를 이용하거나 고베시 서쪽 아카시시에 위치한 선박 승선장에서 페리를 탄다. 보통은 차량을 이용해 건너가지만, 해안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다소 한적한 아와지시마는 수많은 (자전거) 라이더가 페리에 자전거를 싣고 건너기도 한다. 아카시대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다(3,911m). 1988년 착공해 10여 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완공 3년 전인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으로 지반이 내려앉아 길이가 1m 정도 늘어났다고 한다. 다리를 건설하면서 해저 지반에 무리를 준 영향으로 지진이 난 것은 아닐까, 하는 풍문이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아직까지 심심찮게 돌고 있다. 풍문이든 아니든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고, 아직까지도 돌이킬 수 없는 무형의 상흔을 보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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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이후 복원 과정에서 ‘문화적 재건’의 일환으로 고베에 지은 ‘효고현립미술관’, 아와지시마에 새로 들어선 반 시게루의 ‘젠보 세이네이’, 예전부터 번영의 상징이었던, 오사카 중심부에 자리한 섬 나카노시마에 새로 오픈한 ‘나카노시마 미술관’ 등 걸출한 건축가들의 작품이 점재해 있는 간사이 지방의 ‘건축’ 루트를 소개한다(이미 유명세 높은 나오시마는 제외했다). 코로나 기간 관광객 없는 일본은 활기를 잃은 모습이었지만, 조용했던 그 ‘시간’ 동안 묵묵히 준비한 시간의 결실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독학과 답사를 통해 건축가가 된 안도 다다오의 말을 빌리며 건축 기행 글을 시작하려 한다.


“건축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매체가 아니라, 자신의 오감으로 그 공간을 체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내게 ‘답사’는 그 자체가 유일한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여행’이라는 것은 타성적인 일상을 떠나 사고를 깊게 하는 자신과의 ‘대화’인 것입니다. 여행 중에 필요 없는 것은 떨쳐버리고 맨몸인 자신과 만납니다. 그 과정에서 일진일퇴를 반복합니다. 그것이 한 인간을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치유가 흐르는 섬, 아와지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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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와 과거로 달려가는 마음을 붙잡고, 지금 여기에


반 시게루는 1994년 르완다 내전 난민을 위한 임시 주택 짓기를 시작으로, 간단히 나열하기에도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전 세계 재해 현장을 돌며 단순하고 위엄 있는 피난처와 공공 건물을 지어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도와온 사회 헌신적 건축가다. 건축계 노벨상으로 통하는 프리츠커상의 영예를 얻었으며(2014년), 이어 2017년에는 일본인 최초로 머더 테레사 사회 정의상(Mother Teresa Awards)을 받기도 했다. 이런 그가 가장 최근 한 프로젝트인 ‘젠보 세이네이(禅坊靖寧)’가 지난해 4월 효고현 아와지시마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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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는 캐노피. 기다란 형태가 ‘머물기’보다는 무한하게 ‘확장’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딘가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수평선은 자연에 없다는 그 ‘직선’의 모습으로 자체의 위용을 당당히 했다. 100m 길이의 긴 캐노피를 떠받치고 있는 목재 기둥들이 구획해놓은 빈 공간 사이사이로 하늘과 녹음이 들어왔다. 전형성을 벗어난 건물의 낯선 조형감, 현장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나무 질감. “올라오시죠”라는 말을 나지막이 건네는 듯한 2층 명상 공간으로 바로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계단이 있었지만, 우리는 계단 아래 있는 입구를 통해 들어갔다. 은은한 삼나무 향기가 실내를 메웠다. 몇 겹을 압축 가공해 단단해진 삼나무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어로 ‘스기’라고 불리는 삼나무는 ‘꽃가루 알레르기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얻었지만 꽃가루가 날리지 않는 품종을 개량 중인데, 사실 삼나무는 공기 중의 습도를 조절하며 미생물 번식을 억제해 진드기나 흰개미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친환경 재료다. 이 건축물이 숲속에 있음을 고려했을 때 업그레이드된 강도, 친환경성, 지역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 다양한 미생물로부터의 방어성 면에서 선택받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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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들어선 다음 마주하는 로비 격인 다이닝에서 환영 ‘차 세트’를 마시고 주위를 둘러보니 개방형 주방이 있다. 오픈된 주방은 ‘자신감’과 ‘신뢰’를 보여준다. 방으로 걸어가는 길, 측면 벽면이 나무 격자에 유리로 되어 있다. 유리 너머로 숲이 들어왔다. 실내 복도를 걷는데도 마치 숲속에 있는 듯했다. ‘숙방(宿坊)’이라 불리는 작은 다다미 방으로 안내받았는데, 일본에서 숙방은 승려들이 수행을 하거나 순례자들이 몸을 정화하는 숙박 시설을 의미한다. 방 내부도 외부와 마찬가지로 전부 나무로 되어 있다. 모든 가구가 천연 나무 소재이며, 심지어 플라스틱인 콘센트와 철제인 스탠드까지 나무 시트를 붙여 나무인 척 귀여운 위장(camouflage)을 하고 있다. 입구부터 화장실용 인포그래픽 역시 나무판 위에 붓으로 그린 듯 전체적인 ‘자연’ 콘셉트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내·외부를 통틀어 친환경적이며 따뜻한 디자인적 ‘일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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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방에 짐을 놓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젠 웰니스(Zen Wellness)’ 체험 공간인 2층으로 올라갔다. 자연의 파노라마 조망이 펼쳐지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앉아 있기만 해도 충분히 정신이 쉬고 갈 만큼 푸르름이 대단하고 바람이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듯하다. 푸르름 속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가 머리를 맑게 한다. 2층의 전면이 개방된 우드 덱에서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숲을 채우는 나무들은 평소 보던 나무들과 느낌이 달랐다. 마치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올라온 것처럼, 나무들과 눈높이가 맞았다. 요가, 명상 세션이 끝난 뒤의 반가운 점심시간! 젠보 세이네이의 오리지널 메뉴인 ‘젠보 요리’에 대한 셰프의 짧은 소개로 식사가 시작된다. 설탕, 기름, 유제품, 밀가루를 제외한 채식 중심에 천연 발효 조미료로 맛을 낸 요리가 주를 이룬다. 일본의 ‘발효 왕자’로 유명한 노부아키 후시키(Fushiki Nobuaki)가 감수해 개발한 음식들이다. 쌀 누룩으로 7시간에 걸쳐 만든 감주는 구수하면서도 풍미로운 천연 단맛이 일품이었다. 내부이면서 외부이기도 한 중의적 공간인 우드 덱에서 영혼의 쉼을 얻고 아래로 내려가 입구의 반대 부분에 위치한 필로티를 둘러봤다. 가장자리로 갈수록 지면의 경사로 캐노피와 지면의 간격이 넓어지면서 공간이 역동적으로 연출되었고, 그 아래에 사람 키보다 높은 천연석들이 한 자리씩 꿰찬 공간이 드러났다. 젠보 세이네이의 건축 미학에 끌렸다면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반 시게루의 또 다른 아와지시마의 신건축, 농가 레스토랑(農家レストラン 陽·燦燦)으로 향해보기를 추천한다.







#사람과 자연의 공생, 유메부타이





안도 다다오(Tadao Ando)의 살아 있는 흔적들


한창 오사카의 간사이 국제공항이 지어질 시기에, 매립을 위한 대규모 토사 채굴로 아와지시마 북동쪽에 위치한 광대한 대지가 발가벗겨졌다. 이후 환경 재생 운동이 확대되면서 이 황폐한 대지를 회복하기 위해 안도 다다오에게 설계 의뢰가 건네졌다. 토지 재생이라는 점에서 나오시마와 결을 같이했지만 시작점으로 삼을 수 있는 초록이 다 사라진 상태였다. 오사카 출신으로 세계적 건축가로 입지를 다지고 있던 안도는 고민 끝에 거친 캔버스 위에 ‘사람과 자연의 공생’이라는 모토로 ‘꿈의 무대(유메부타이)’를 설계한다. 본래 ‘유메부타이(Awaji Yumebu-tai)’는 아카시대교가 개통되는 1998년에 맞춰 완성될 예정이었다. 막 착공하려던 무렵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일어나 공사가 중단됐다. 진원지였던 아와지시마를 정밀 조사하던 중 부지 내 활성 단층이 발견되었고, 이에 설계 변경과 건설에 2년이라는 기간이 더 소요되었다. 경사면의 상부에 세우려던 호텔을 아래쪽으로 옮기고 지진 희생자들을 추도하기 위한 계단식 화단을 디자인했다. 가로세로 4.5m의 화단 1백 개로 구성된 햐쿠단(百段苑)에는 진혼의 의미로 국화와 효고현의 꽃인 백야국을 포함해 계절별로 다양한 색채가 어우러지는 헌화단이 조성되었다. 계획 변경으로 생겨났지만, 현재는 유메부타이에 당도하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하이라이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나는 건축이 너무 말을 많이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용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빛으로 가장한 자연이 이야기하게 해야 합니다.”_by 안도 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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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양지 바른 곳에서 햇볕을 흠뻑 받고 있는 햐쿠단을 부지 북쪽 상단에 위치시키고 그 아래로 빗물을 활용하는 순환 시스템을 사용한 계단 폭포와 수산 가공 공장에서 버려진 1백만 장의 조개껍데기를 재활용해 수작업으로 붙인 ‘조개의 해변’을 비롯한 국제 회의장, 호텔, 일본 최대급 온실인 ‘기적의 별 식물관’, 프롬나드 가든, 야외 극장 등을 포함한 해양 공원. 필자에겐 세 번째 방문이지만 늘 햇볕이 쨍쨍한 더운 날씨에도 햐쿠단의 끝까지 올라가보게 된다. 눈 아래에 펼쳐지는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기하학적 콘크리트 매스들로 작품을 ‘그려낸’ 안도 다다오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어서다. 단단하고 육중한 콘크리트의 반듯한 네모 속의 다채로운 여린 꽃들, 콘크리트 첨탑을 반 이상 휘감아 덮어버린 담쟁이덩굴, 10여 년 전의 방문 때보다 많이 부식되고 변색된 콘크리트, 어른 나무가 되어 울창해진 30년 전 묘목들. 건축은 완공되었을 때 끝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시작이다. 시간을 관통해 변화된 자연과의 어우러짐과 이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 공간의 건축의 한 부분인 것이다. 회색 콘크리트가 자연과 만든 하모니를 감상하다 보니 저 멀리 수평의 바다가 시야에 스며 들어온다.

“건축과 예술의 본질적인 협력은 건축의 그 투명하고 견고한 차가움에 대해 열기를 머금은 인간적인 것, 비합리적 신비함, 전율적인 정열을 대결시키는 것이며, 건축의 물러설 수 없는 목적성에 대해 예술의 무(無)목적성을 대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극이 되어 긴장하고 대항합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동안 강인한 인간의 정체성이 생성됩니다.”_by 다로 오카모토(岡本太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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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아와지 지진의 상흔이 아무는 과정에서 건축된 유메부타이, 효고현립미술관이 우리에게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잊을 만하면 느껴지는 땅의 흔들림에 여전히 깜짝 놀라며 지진을 경험한 그날 하루는 온전히 코앞에 쉬어지는 숨에 집중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미소를 더 짓게 된다. 자연재해 앞에 인간이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서서히 함께 힘을 모아 회복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단단함이 안도가 주로 사용한 재료인 콘크리트와도 닮았다고 느껴졌다. ‘재해’를 뺀 ‘자연’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는 영감을 주고 한 조각의 빛을 아낌없이 주지만, ‘재해’가 붙은 ‘자연’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들을 앗아가기도 한다. 지진의 상처를 딛고 이겨낸 도시에서 예술을 ‘감상’한다는 건 또 다른 감흥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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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으로 초대된 빛, 고베 효고현립미술관

안도 다다오는 사실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한국에도 그의 대표작이라 할 뮤지엄 산을 비롯해 최근 완공된 마곡 지구의 LG아트센터 서울, 그리고 제주도에도 작품이 여럿 있다. 그의 시그너처 재료인 노출 콘크리트를 고집하는 것을 두고 ‘내 창조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도전’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안도 다다오에게 어쩌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콘크리트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원한 건 콘크리트가 아니라 콘크리트가 만들어내는 ‘공간’, 즉 ‘여백’이었을 테니까. 콘크리트는 그 자체가 구조재이며 마감재이기 때문에 건축 본연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으며, 마치 조소가의 흙처럼 건축가에게는 원초적인 재료다. 이로 인해 그는 ‘공간’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백을 통해 빛, 물, 나무, 바람, 하늘 같은 자연의 요소를 초대했다.


태양은 공간이 만들어질 때까지 그 빛이 얼마나 멋진지 깨닫지 못합니다(The Sun doesn’t realize how wonderful it is until after a room is made).” _by 루이스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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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일어난 한신-아와지 대지진을 추모하는 사회적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문화 부흥’의 상징으로 효고현립미술관(兵庫県立美術館)이 2002년 개관했다. 이 지역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를 맡았다. 별도로 전신격인 효고현립근대미술관(1970)이 있지만 현재는 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효고현립미술관은 일본과 해외의 현대 조각, 판화 등 약 1만 점 이상의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 ‘예술의 전당’으로도 불린다. 근대 조각의 시조 격인 오거스트 로댕을 위시해 알베르토 자코메티, 헨리 무어 등 유수한 작가들의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 출신으로 일본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거장 이우환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2019년에는 안도의 건축 모형과 드로잉 등을 전시하는 ‘안도 갤러리(Ando Gallery)’가 관내에 오픈했다. 오사카 외곽에 있는 안도 다다오의 걸작으로 현재는 방문이 어려워진 ‘빛의 교회’나 유서 깊은 건물 파사드는 놔둔 채 내부 공간을 탈바꿈시킨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 피노 컬렉션이 자리한 파리의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 레노베이션 프로젝트 등의 다양한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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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고현립미술관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안도 다다오의 건축 미학이 여러모로 투영된 작품이다. 기단 위에 3개의 직육면체 건물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바다 쪽으로는 커튼월을 사용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과거 철공소의 흔적을 남기듯 철을 북쪽 파사드에 사용했다. 내부로 들어가면 역시 노출 콘크리트가 등장한다. 건물 사이에 위치한 지상 2층에서 지하 주차장까지 연결된 나선형 계단, ‘빛의 우물(Light Well)’을 보면, 20세기를 수놓은 미국의 현대건축 거장 루이스 칸이 늘 강조했던 ‘빛’이 멋진 주연으로 등장하는 콘크리트 무대가 펼쳐진다. 빛은 아름다운 콘크리트의 나선형 곡선을 타고 내려가 시간마다 다르게 조각된다. 형체가 없던 빛은 물체에 의해 아름답게 인지되고 발견된다. 우리가 순간순간 감지하지 못하는 자연의 느리고 미묘한 변화를 안도만의 간결한 조형 언어로 번역한 공간이 이곳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옥외(바다마루)에 놓인 조각 작품인 커다란 연두색 풋사과(‘청춘’)는 안도 다다오가 미국 시인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을 모티브 삼아 디자인했는데, 미술관의 아이콘으로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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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예술의 조우, 오사카 나카노시마

도심의 검은 큐브,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


‘검은 큐브’ 모양이 인상적인 미술관이 지난해 오사카 중앙부 나카노시마(中之島)에 세워져 도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어로 시마(島)는 ‘섬’이란 뜻의 단어다. 도지마강과 도사보리강 사이에 끼어 있는, 아니 오롯이 자기 구역을 확고히 지키고 있는 듯한 나카노시마는 동서 약 3km, 면적 50ha의 좁고 긴 물고기 모양을 띤 도심의 섬이다. 나카노시마섬 안에는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코린트식 원기둥으로 떠받친 파사드가 매력적인 나카노시마 도서관, 벨기에 국립은행을 모델로 건축된 아름다운 돔형 지붕이 특징인 일본은행 오사카 지점, 그리고 오사카 최초의 수상 공원인 나카노시마 공원이 자리한다. 또 메이지 시대가 갓 막을 내린 시점인 1918년에 지어 20세기 초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사카시 중앙공회당도 위치한다. 그보다 더 앞선 에도시대부터 전국 각 번(藩)의 창고가 모여 쌀을 포함한 다양한 물자 판매가 이뤄졌던 ‘천하의 부엌’이라 일컬어지던 오사카의 중심이기도 했던 이 작은 섬은 풍부한 문화적 유산의 토대 위에 미래의 뜻깊은 유산이 될 건축물들이 세워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섬 내부를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건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옮기는 발걸음마다 멈춰 서야 하는 매력이 충분하고도 남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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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JIA 일본 건축 대상의 최종 심사에서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Nakanoshima Museum of Art, Osaka)이 하치노헤시 미술관과 함께 선정됐다. 대형 건축사와 일본의 여러 유명한 건축가들을 제치고 당당히 공모에서 선정된 엔도 가쓰히코(遠藤克彦)가 설계를 맡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땅속에 매립한 형태의 국립국제미술관과는 대조적으로 지상의 커다란 직육면체 모양의 건축물이다.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을 설계한 엔도 가쓰히코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지역의 시청을 비롯한 제법 굵직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전도 유망한 건축가다. 건축을 ‘사회 자본’으로 재발견하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사회에 기여한다는 건축 철학을 지닌 건축가답게 ‘본인의 색깔’을 단단히 하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그 지역에 꼭 맞는 건축을 한다. 그는 이 미술관의 건축 철학으로 ‘파사주(passage)’를 꼽았다. 프랑스어로 보행자 전용 아케이드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을 의미하는 파사주는 ‘연결’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뮤지엄이면서도 도심 속 사람들이 머물다 갈 장소로서 ‘길’을 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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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로비 격인 보이드(비어 있는 공간)에서 전체 공간을 바라보면, 1층에서 5층까지 시원하게 뚫려 있고, 그 안에서 놀이기구처럼 교차 배치한 에스컬레이터의 역동적인 모습이 간단하면서 대담한 검은 큐브 모양과 대조적인 느낌도 준다. 각 층마다 다른 느낌으로 공간을 경험할 수 있으며, 실내의 메탈릭한 루버재(羽柄材)는 차분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조성한다. 필자가 방문했던 6월에는 개관 1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사에키 유조(佐伯祐三) – 자화상으로서의 풍경>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의 반 고흐’라 불리기도 하는 사에키 유조(Yuzo Saeki)는 30여 년의 짧은 생애(1898~1928) 동안 불꽃 같은 ‘예술혼’을 불태웠던 인물. 주로 파리와 오사카, 도쿄를 오가며 거리에서 마주친 풍경들을 주로 유화로 담아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기간은 4년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방대한 양의 작업을 했다니 입을 다물지 못하며 5층의 커다란 전시실에 가득한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니 활활 타오르던 예술혼이 느껴졌다. 인생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질’이라고 했던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체력이 바닥 나 있었던 그가 붓을 내려놓지 않고 보여준 투지와 집중, 예술에 대한 열정이 작품에 진지하게 잘 묻어 있다.


지하형 예술 벙커, 국립국제미술관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 바로 옆에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한 국립국제미술관(NMAO)이 이웃해 있다. 전위적인 모습의 메탈 가닥들이 춤을 추고 있는 조형을 지나면 입구로 통한다. 대나무의 생명력과 현대미술의 발전과 성장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 매립된 구조의 미술관 입구를 찾으려면 이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과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내부로 들어서면 티켓 창구, 매점, 보관함 등이 위치한 로비가 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자리한다. 지하 3층까지 들어간 깊은 공간이지만, 천장이 전체적으로 유리 소재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빛이 잘 스며드는 편이다. 이곳 역시 보이드 공간의 천고가 높아 시원시원한 느낌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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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제미술관은 원래 1977년 만국박람회(엑스포) 기념 공원 내에 세워졌지만 시설이 노후되어 2004년 오사카 나카노시마에 완전 지하형 미술관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외벽은 없지만 단순하면서도 큼직하게 나눠진 공간은 작품을 감상하기에 손색이 없고, 국내외 현대미술 8천여 점의 컬렉션을 안전하게 보유하고 있는 ‘예술 벙커’ 같다. 설계는 작고한 아르헨티나계 미국인 건축가 시저 펠리(Cesar Pelli)가 맡았다. 그는 뉴욕의 세계 금융 센터, 한때 세계 최고층 건물이었던 88층의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비롯한 커튼월을 사용한 다수의 세계적 랜드마크 건물을 건축했다. 초고층 건축물 전문가인 그가 이 미술관을 완전히 지하에 매립하는 형태로 설계한 건, 약간의 ‘일탈’이었을까, 주변 조건들을 고려한 의도적인 설계였을까. 아마도 주변에 이미 충분히 높은 스카이라인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지하에 건물을 지음으로써 지상을 사람들이 편히 지나다닐 수 있는 ‘광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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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깃든 교토의 미술관 풍경

형태(形態)를 넘어 형상(形像)으로, 교토시 교세라 미술관


공간을 구축하는 형태로서의 매체를 넘어 형상의 ‘상(像)’을 쌓아가는 미술관이 되고자 하는 핵심 가치를 설계에 담아낸 교토시 교세라 미술관(Kyoto City KYOCERA Museum of Art)은 3년여의 개조와 증축을 거쳐 2020년 문을 열었다. 재개관하자마자 지구촌을 낯선 공포에 떨게 했던 코로나19 사태로 다소 고요한 시간을 거쳤지만 알찬 컬렉션과 근대 일본화를 포함해 현대 디자인과 미술까지 아우르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미술관이다. 레노베이션을 이끈 공동 설계자이면서 미술관 관장이기도 한 건축가 아오키 준은 부동의 건물 자체보다 이 공간을 보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새긴 이미지들이 시간을 관통하면서 변화하고 쌓여간다고 했다. 다중노출된 겹겹이 쌓인 사람들의 ‘상(像)’, 즉 이미지들이 풍요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핵심이라고 봤다. 바로 이 같은 신념을 기조로 삼아 헤이안 신궁으로 가는 ‘오카자키 프롬나드’ 산책로의 한편에서 완만한 경사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미술관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냈다. 현존하는 일본 공립 미술관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임을 존경하듯, 내재된 잠재력을 최대한 아름답게 끌어내면서 설계를 한 마음과 완성도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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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는 단지 물리적인 형태를 제공할 뿐, 시간성이 부여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문화 속에서 ‘상’을 쌓아가는 미술관. 교토의 고즈넉한 동네 히가시야마의 산자락 아래 위치한 교세라 미술관은 예전보다 더 대중에게 친근한 형태의 제스처를 취하며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현 시대의 미술관은 더 이상 ‘방문’을 하는 곳이 아닌 편하게 들러가는 곳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저 ’작품’만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느끼고 둘러보기 위해 편한 발걸음으로 오고 가는 곳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회적 공유적 공간으로서 미술관의 담벼락이 낮아지고 있음을, 옛 건물의 정서를 현대적으로 잘 살려내며 새로운 건축물로 거듭난 교세라 미술관을 통해서도 상기하게 된다.



대담한 공간과 정교한 디테일, 교토국립박물관



교토국립박물관은 ‘국립’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박물관 소장품, 기증품을 포함해 1만4천6백 점 이상의 도자기, 고고학, 회화, 조각, 서적, 염색, 금속공예, 칠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미술품과 문화재를 소장·전시하고 있다. 역사도 1세기가 훌쩍 넘는다. 1897년 제국교토박물관으로 개관했는데,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메이지 고도관(구 제국 교토 박물관 본관)’은 궁정 건축가 도쿠마 가타야마(片山東熊)의 설계로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2014년, 1백17년 만에 새롭게 문을 연 ‘헤이세이 지신관’은 옛 정문이였던 지금의 서문에서 가까운 부지에 위치하고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신관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일본의 또 다른 건축 거장 다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가 건축 설계를 맡았는데, 그렇게 새로 탄생한 모던한 이미지의 신관과 구관의 대조적인 조화가 매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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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생으로 이제 80대 중반이 된 다니구치 요시오는 다른 일본의 건축 거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장인 정신’으로 임하는 설계 철학을 바탕으로 건축 스튜디오 자체의 규모를 크게 꾸려오지 않았고, 당연히 프로젝트 수도 상대적으로 많지 않으며, 미디어에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스타덤’을 향한 치열한 경쟁으로 때로는 이름값이 빠르게 명멸하는 건축 세계에서 드물게 ‘그’ 자신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완성해나간 ‘그의 작품’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영롱한 빛을 발현하고 있다. 교토국립박물관에서의 산책은 또 다른 한 세기에 걸쳐 다양한 문화, 예술 전시로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나갈 다니구치 요시오의 ‘장인 건축’을 즐긴다는 점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건축에 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아직도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_by 다니구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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