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ig and Smal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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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 2022

글 고성연

로버트 테리엔_가나아트센터 회고전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현대미술 콘텐츠가 빛을 발하는 요즈음, 서울을 찾은 사뭇 대조적인 스타일의 미국 캘리포니아발(發) 작가 2인에게 눈길이 간다. 몹시 정교하고 섬세한 상징적 이미지의 퍼레이드가 인상적인 래리 피트먼(Lari Pittman), 그리고 의자나 접시 같은 일상의 오브제를 커다랗게 확대한, 그러면서도 극도로 절제된 미니멀한 느낌의 조각으로 유명한 로버트 테리엔(Robert Therrien)이다. 전자는 직접 만나볼 수 있었지만 (다음 호에 인터뷰 글이 실릴 예정이다), 후자는 안타깝게도 2019년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됐다. 그래서 4월 12일 가나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at that time>展은 로버트 테리엔(1947~2019)이 작고한 이후 처음 열리는 개인전이자 작은 회고전의 성격을 띤다. 평범한 일상의 오브제를 사람 키를 훌쩍 뛰어넘는 크기의 작품으로 빚어내 관람객으로 하여금 초현실적인 풍경의 주인공이 되도록 만드는 ‘체험의 미학’으로 주로 알려진 테리엔의 작업 세계는 사실 그보다 훨씬 더 폭넓고 풍부한 면면을 지니고 있음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전시다. 오는 5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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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고 여유 있는 공간 구성 덕분에 관람객들에게 작품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선사하는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면 조각적인 느낌의 나무 탁자 위에 동글동글한 모양의 작은 오브제가 놓여 있는 모습이 먼저 시야에 담긴다. 전시 작가 로버트 테리엔(Robert Therrien)이 자신의 초상처럼 여겼다는 ‘눈사람’ 조각인 ‘No title(snowman)’(2018)이라는 작품인데, 마치 반갑다고 첫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테리엔은 눈을 구경하기 힘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했지만 원래 시카고 태생으로 어릴 적 눈사람을 만들던 추억을 자신만의 간결한 이미지로 다듬은 조각으로 표현해냈다. 함께 전시된 나무 탁자는 2009년 작품 ‘No title(desk)’로 작가가 이 앙증스러운 조각을 그 위에 놓아두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이렇듯 첫 전시 섹션에는 아기자기한 소품과 단순미를 품은 드로잉 등 평면 작품도 볼 수 있는데, 혹시 테리엔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대표작을 해외 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다면 살짝 의외라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In a Big Big World’라는 팝송 가사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커다란 테이블, 접시 등 ‘기념비적 조각’ 작업으로 흔히 알려져 있어서다. 하지만 그는 작은 작품을 만드는 데도 관심이 많았고, 실제로 소소한 오브제는 물론 드로잉, 사진, 판화 같은 다수의 평면 작품을 남기는 등 2차원과 3차원 매체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다. 이번 <at that time>展은 그의 다면적인 작업 세계를 두루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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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작고 이후 첫 개인전_‘mini-maximalist’?

평면 작업이든 부조든, 조각이든, 그리고 규모가 크든 작든 일상적인 오브제에서 비롯된 로버트 테리엔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단순미와는 다르게 복합적인 추상성을 품고 있다. 기름을 담은 캔의 이미지가 그에게는 ‘예배당’을 상징하는 간결한 도상으로 승화되는 식으로 말이다. 햄 로고에서 따온 귀여운 악마 이미지를 나무 패널, 종이 등 여러 재료에 단순화된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사례도 있는데(전시 작품에도 있다), 작가는 이에 대해 “내게는 가장 추상적”이라고 강조하며 “‘악마’(이미지)는 아주 많이 변모했기 때문에 그저 하나의 ‘형태’로만 여겨진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명이 모조리 ‘무제(No title)’라는 점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 테고 말이다(어느 순간 테리엔은 보다 ‘친절한’ 설명을 위한 ‘부제’를 붙였다고 한다). 바로 이런 면모 때문에 테리엔을 미니멀리스트나 개념 미술 작가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일 터다. 사물을 추상적으로 단순화한 작품의 예로 이번 전시에도 소개된 2003년 작품 ‘No title(Dutch door)’을 빼놓을 수 없다. ‘더치 도어’는 위아래를 따로 여닫을 수 있도록 분리되는 문으로 3m에 이르는 높이로 확대한 작품. 1980년대 후반부터 베이지, 갈색, 검정 등 여러 색상으로 제작되었고 드로잉으로 구현되기도 했는데, 가나아트 전시에는 오렌지빛을 머금은 짙은 노란색 작품이 찾아왔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 ‘더치 도어’가 있었는데, 문이 2개로 나뉘니 아래는 닫혀 있어도 누군가가 윗문을 열고 인사를 한다든지 하는 기억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이번 전시 기획을 맡은 박민혜 큐레이터의 설명이다. ‘문’을 크게 확대한 추상적인 조각은 마치 유년기로 되돌아간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지금, 이곳’이라는 현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고. 이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기억의 잔재를 바탕으로 실재와 허구를 넘나드는 환상 같은 느낌을 경험하게 하는 작품 중 결정판은 아무래도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녹색의 접이식 테이블과 4개의 의자’(2008)일 것이다. ‘No title(folding table and chairs, green)’이라는 제목의 이 거대한 세트(펼치지 않았을 때 의자 높이가 약 2.6m)는 오래된 가구처럼 녹이 슨 모습을 하고 있고(정교한 작가의 ‘칠’ 덕분에) 놀랍게도 실제로 접히는 ‘기능성’도 갖추었다. 여기서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지 않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탁자 곁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한 명은 토라져서 자리를 박차고 휑 하니 나가버린(접힌 채 벽에 기대어 있는 의자까지 포함해) ‘있을 법한’ 일상 풍경을 연출한 것이라고. 수줍은 성격이었지만 동심 어린 유머를 지닌 작가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깨알’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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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면서도 낯선, 초현실적인 동심의 풍경 속으로

익숙하다 못해 흔한 일상의 물품을 감각을 압도할 만큼, 그래서 다분히 낯설게도 느껴지게 만드는 커다란 조각 작품으로 빚어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2013년 뉴욕 타임스와 나눈 인터뷰에서 나온 “사람들이 그런 환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떨까(What if people could walk into an environment like that)?”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걸리버 여행기>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에서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주인공’으로서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떤 평론가가 말했듯, 누구나 어릴 때 재미를 위해서든, 실제로 필요해서든 탁자 밑을 안식처로 삼았던 기억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맥락이다. 결국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진짜 ‘선물’은 (대량생산된 가구가 지닌 사회적 기능을 생각해보게 하는) 조각 작품이라기보다는 잠시마나 누려볼 수 있는 ‘동심’이 아닐까.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은 만화적 상상력, 마르셀 뒤샹에서 비롯된 레디메이드 개념과 만나 독창적인 조각이 탄생했다’는 평가를 받는 로버트 테리엔이라는 인물이 현대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한 획을 그은 배경에는 바로 늘 ‘관객’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그들이 생경하지만 아름다운 연극적인 순간을 경험토록 한 작가만의 철학이 자리한다.
다만 테리엔이 그 같은 동심의 미학을 담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기술적으로 완성도 있게 구현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던 것 같다. 평생 작가의 조력자 역할을 했던 폴 처윅(Paul Cherwick)과 가고시안 갤러리 출신의 관계자 딘 아네스(Dean Anes)의 첨언에 따르면 “미술 시장이 커지면서 갤러리도 전시 공간의 규모를 키우면서 대형 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마침 작가도 스튜디오를 옮기면서 (적합한) 작업 환경도 조성됐는데, (아무래도) 대규모 작업을 고안하고 제작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고 한다. “컴퓨터 엔지니어, 용접공, 기계공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그룹이 필요하므로 아웃소싱으로 제작했는데, 단계마다 밀접한 상의를 거쳤고, 현재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 중인 ‘접이식 탁자 세트’의 경우에는 마지막 단계에서 스튜디오로 다시 가져와 (녹이 슨 표면을 위한) ‘칠’을 다시 했습니다. ‘탁자 세트’ 중 현재 미술시장에 나와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도 합니다(나머지는 대부분 재단이나 미술관 소장이라고)”. 이 밖에도 테리엔의 천진난만하면서도 심미적 오라가 출중한 작품이 전시장 곳곳에 포진되어 있으니, ‘느림의 미학’을 즐기면서 유심히 감상하기를 추천하고 싶다. 그중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의 카트와 짝을 이루는 매혹적인 원판(disc) 시리즈는 개인적인 ‘최애’ 작품이다. 불교 수행법 중 하나인 카시나 명상에서 쓰였던 원판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는 이 작품은 모두 10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카트에 최다 9점까지 담아둘 수 있고 나머지 1점은 벽에 걸도록 하는(물론 디스크를 전부 꺼내둬도 된다), 작가 특유의 귀여운 발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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