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시스템을 닮아가는 아트 생태계, 미술 한류를 꾀해야만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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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 2017

글 유진상(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전시 기획자, 미술 평론가)

‘미술 한류’가 가능할까? 미술 생태계도 점점 규모와 시스템의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 구도에서는 작은 내수 시장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미술 역시 피해 갈 수 없다. 시장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해온 필자는 ‘동시대 미술에서 한류가 가능한가’보다는 한국의 동시대 미술에 한류식 논리와 시스템을 잘 반영할 수 있을지 묻는 게 더 정확한 질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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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 즉 동시대 미술에 대해 한류 가능성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각이 있다. 왜일까? 첫째, 한류는 대중음악, 드라마, 게임, 영화 등 상업적 대중문화에서 성립되는 개념인데, 동시대 미술과 같은 고급 예술을 상업적 성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둘째, 한류처럼 ‘국가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국제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동시대 미술과 배치된다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동시대 미술을 상업적 성공과 결부하는 관점은 그 발원지인 유럽이나 미국에서 더욱 빈번히 나타난다. 프랑스의 동시대 미술 지원 정책은 문화 관광 정책과 밀접히 연관돼 있으며 영국과 독일 역시 자국 미술의 ‘성공’을 위한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국가적 정체성을 논하자면 베니스 비엔날레의 국가관 제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세기 넘게 국가적 경쟁을 올림픽처럼 강조해온 데다 심지어 시상 시스템까지 있음에도 국제 미술계에서 의미 있는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의 대표적 예술가인 한스 하케는 오래전부터 공공, 민간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중요한 미술품 컬렉션이 공공연하게 자국 작가들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왔음을 밝히기도 했다.
이미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음악 시장 헤게모니가 보편화된 클래식 음악 세계에서 굳이 상업적 지향이나 국가적 정체성의 문제점을 강조하지 않는 것처럼 동시대 미술에서도 서유럽과 미국의 우월적 지위에 대해 다른 국가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미술 한류’를 논하는 것이 불가능할 이유는 없다. 이런 노선을 추구하다가는 지나친 상업화와 대중화로 예술 작품의 내용적 수준이 하락하지 않겠냐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물론 과도한 일반화는 경계해야 한다. 또 작품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게 맞지 않는 예술가도 분명 있다. 예술은 특정한 한두 가지 방식으로만 이뤄지지 않으니까. 사실 유럽, 미국, 중국처럼 거대 내수 시장을 갖춘 지역의 예술가들은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다. 뛰어난 예술가라면 커다란 시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 미국, 중국처럼 거대 내수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군을 지녔음에도 극도로 협소한 재정적 전망밖에 제시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스타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와 쉬전의 공통점

지난여름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끈 전시는 영국 미술계의 기린아이자 슈퍼스타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들(Treasures from the Wreck of the Unbelievable)>전이었다. 고대에 예술품을 싣고 가다가 바다에 가라앉은 배에서 찬란한 유물을 건져 올린다는 허구를 바탕으로 개최된 이 전시는 패션 브랜드 구찌와 경매업체 크리스티 등을 소유한 프랑수아 피노 회장이 꾸리는 전시장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와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를 통째로 채운 1백89점의 작품으로 이뤄졌다. 한화로 7백억원 규모의 자금이 투입된 이 프로젝트는 비평가의 엄청난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지만, 흥행으로는 대성공이었다.
이 전시는 미술계에 커다란 질문을 던졌다. 거대 자본과 시장, 예술품 제작 기술의 발전과 가치 부여 방식의 다변화에 따라 예술적 가치에 대한 기존의 평가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난 20여 년간 수많은 미술관이 새로 생겼으며, 미술 시장의 규모 역시 비약적으로 커졌다. 커진 미술품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작품 제작 방식을 소량 생산, 직접 제작에서 대규모 다량 제작, 공격적 아웃소싱으로 대응하고 있다.
조각을 전공한 적 없는 허스트는 상당수의 작품을 CAD와 3D 프린팅 기법으로 제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전공과 무관하게 다른 장르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모습 역시 보편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예술가는 이제 예술감독, 혹은 자신의 작품을 관장하는 큐레이터, 프로듀서가 되어가고 있다. 허스트는 자신의 작품을 화랑 외에도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경매나 온라인 스토어 ‘othercriteria.com’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 허스트의 2008년 경매 ‘영원히 나의 뇌리 속에서 아름답게(Beautiful Inside My Head Forever)’는 매출 2억달러(약 2천2백억원)를 기록한 바 있다.
중국이 내세우는 세계적 작가인 쉬전(Xu Zhen)의 경우에는 아예 중국의 석조 공장을 사들여 그곳에서 생산하던 장식용 대형 조각을 자신의 작업에 사용한다. 그는 ‘메이드인 컴퍼니(MadeIn Company)’라는 회사를 차려 자신의 작품을 직접 ‘개발’하고 판매한다. 영국이 낳은 또 다른 스타 작가 줄리언 오피(Julian Opie)는 소위 초짜 시절 인연을 맺고 그 속에서 성장한, ‘머더 갤러리’라고 불리는 주 갤러리를 통하지 않고 각 나라마다 각기 다른 화랑을 선정해 작품을 판매한다. 한 나라에서 판매하는 작품은 다른 나라에서 판매하는 작품과 서로 겹치지 않는다. 마치 의류 브랜드인 자라나 H&M처럼 판로 관리를 하는 셈이다.

미술 시장의 상업성과 예술성은 별개인가?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예술가의 경우 작품 생산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예술가가 작품 소장이나 컬렉션을 위해 만들어야 할 작품의 수요 역시 가파르게 증가한다. 많은 작가들이 비엔날레와 같은 비평적 무대를 위한 작품과 시장에서 판매할 작품을 동시에 제작한다. ‘투 트랙’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런 예술가를 상업적이라 비난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비평가의 비난 대상은 세계화(globalization)다. 그러나 이미 세계화는 동시대 미술의 핵심적 특질이 되어버렸다. 이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예술품의 질과 수준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의 질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적 재능뿐 아니라 투자와 기술적 자원, 그리고 비평적 지원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더 많은 엘리트 작가들이 ‘전문가 혹은 전문 업체(third party)’가 참여하는 아웃소싱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 개발을 기술적으로 뛰어난 제3자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적용하려면 작품 개발을 위한 투자가 선행돼야 하고, 지속적인 작품 판매가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이는 현재 국내 시장의 수요만으로 불가능한 시스템이다. 반드시 해외 시장을 전제로 전략을 짜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동시대 미술의 논리 역시 대중음악이나 영화 시장의 그것과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 기존 화랑 시스템에 대해서도 재평가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해외 시장을 개척해온 몇몇 화랑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화랑은 작가의 작품을 그대로 ‘떼어다가’ 이윤을 붙여 국내 시장에 재판매하는 식의 경영을 해왔다. 한류가 아니더라도 이런 식의 경영에는 곧 한계가 닥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랑 역시 대중문화 산업처럼 ‘에이전시’로 체제를 바꿔야 한다. 대부분의 대중음악 에이전시에는 A & R(Artist & Repertory)이라는 부서가 있다. 여기서는 예술성과 시장성을 면밀하게 따져 곡을 고르고 개발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한다. 한국 대중음악의 힘은 A & R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화랑 역시 함께 일할 작가를 선발하고 그들과 작품을 제작하는 단계부터 홍보, 판매에 이르기까지 국제 시장을 목표로 하는 적극적 R & D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단색화 붐’은 민간 화랑이 주도해 장기적 마케팅 전략과 투자를 통해 핵심적인 국가적 문화재를 창출한 사례다. ‘단색화’는 세계 무대에서 거둔 상업적 성공만이 아니라 한국 미술의 1960~80년대를 주목해야 할 시대로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백남준’만큼이나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대대적인 리셋이 시급한 한국의 미술 생태계

한국의 동시대 미술 현장은 ‘리셋’이 필요하다. 시장, 관객, 미술관, 교육, 제도 등 모든 부문에서 비효율과 패배주의가 두드러진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주창한 ‘기대 감소의 시대’나 요즘 빈번히 회자되는 ‘헬조선’ 같은 패러다임이 비평가와 예술가 사이에서 비평적 배경으로 굳어가고 있다. 이 가운데 외부 변화가 심상치 않다.
당장 아시아의 미술 환경만 놓고 봐도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모양새다. 갈수록 규모도 커지고,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국내 화랑은 컬렉터들이 해외로 눈을 돌린다고 불안한 기색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올해 한국국제아트페어(KIAF)는 2백7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한다. 완판을 기록한 화랑은 대부분 해외 화랑이다. 시장 콘텐츠 경쟁력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시점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작가를 양성해내는 미술대학의 경쟁력은 언젠가부터 거론조차 되지 않고 있다. 오늘날 교육은 젊은 예술가들의 역량에 대한 관심보다는 미리 짜인 커리큘럼이나 교수의 관점을 이식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미술 현장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존재감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그렇다고 다른 미술관들이 그다지 의미 있는 이슈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미술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있는 데다, 그럴 만한 소양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모든 예술 분야 가운데 창작 인구가 가장 많은 분야가 미술인데도 이런 상황으로 몰고 온 1차적 책임은 스스로 영향력을 키우지 못한 미술인들에게 있다. 젊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상업화에 반감을 품을 것이라는 생각은 섣부른 기우일지도 모른다. 상당수의 젊은 작가들은 시장이 바뀌지 않으면 스스로 시장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최근 젊은 예술가를 주축으로 미술 장터가 생기면서 기존 미술 시장에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일은 변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지나친 엄숙주의와 예술적 근본주의에서 벗어나면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예술가들과 시장의 요구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창작을 마음껏 하고 역량을 키워나가도록 지원해줘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비평을 보노라면 돕기는커녕 마치 중세의 교부철학처럼 이들의 정신세계를 억압하려는 듯 보인다. 시장이 ‘너희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제대로 된 시장 환경을 제공해줘야 한다. 물론 예술가들 역시 막무가내로 시장 조성을 요구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시장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예술과 정책만큼이나 예술과 시장 역시 서로 상대방에 대한 무지를 해소해야 할 필요가 있는 관계다. 미술 한류는 아마도 여러 문화 예술 분야 중 맨 마지막 주자가 될 것이다. 이처럼 사방이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한류가 일어난다면 그건 전적으로 예술가들의 재능에 기인하는 것일 터다.
한류는 이제 우리의 동시대 문화가 서구를 추종하는 모방적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기준으로 하는 주체적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의 동시대 미술 역시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는 단계로 진입해야 할 것이다. 예술가 한 명 한 명 모두 세계의 중심이 되어 백남준의 말처럼 ‘글로벌 그루브’에 참여하는 시점이 어쩌면 곧 다가올지도 모른다. ‘리셋’의 의미를 되새기고 체질 자체를 바꾸려는 행보에 나선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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