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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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7, 2026

글 고성연(타이베이 현지 취재)

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2025

타이베이 중산구 엑스포 공원 부지에 가면 한쪽 끝은 고정하고 다른 끝은 받치지 않은 ‘외팔보’ 형식의 블록이 여러 방향으로 돌출해 있는 하얀색 건축물이 있다. 지금은 증축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인 타이베이 시립미술관(TFAM)은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최초의 현대미술관으로 1983년 문을 열었다. 또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생겨난 1998년 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이하 TB)의 무대로 나선 이래 30년 가까이 유서 깊은 국제전의 플랫폼 역할을 해오고 있기도 하다. 오랫동안 짝수 해에 열리다가 팬데믹의 여파로 지구촌의 수많은 미술 기관이 그랬듯 ‘홀짝’이 바뀌는 운명을 맞이해 지난 2023년부터는 홀수 해에 개최되고 있는 타이베이 비엔날레. 3개 층에 걸쳐 20,000㎡(약 6천50평)가 넘는 시원한 전시 공간을 품고 있기는 하지만 오롯이 하나의 미술관에서만 펼쳐지는 타이베이 비엔날레가 올해 내건 전시 제목은 <지평선 위의 속삭임(Whispers on the Horizon)>. 대만의 복잡다단한 근현대사에 바탕을 두면서도 시공간을 초월하고, 개인과 집단의 서사를 아우르는 울림인 인간 본연의 ‘갈망’을 얘기한다. 지난해 11월 초 막을 올린 TB 2025는 전시 기간이 5개월에 가까운 역대급 대장정을 펼칠 예정인데(2026년 3월 29일까지), 주말이면 발 디딜 틈 찾기 힘들 정도로 붐비는 건 물론이고 평일에도 꾸준히 다수의 관람객들이 찾을 정도로 호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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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서쪽 끝, 일본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작은 섬나라 대만. 16세기 포르투갈 항해사들 사이에서 경치에 대한 칭송으로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모사(Formosa)’라 불리게 된 이 나라는 잘 알려졌듯 참으로 굴곡진 근현대사를 지니고 있다. 특히 21세기 전까지는 한국과는 닮은 구석이 무척 많다. 19세기 말부터 민족을 고달프게 했던 전쟁과 식민지화(일본의 지배), 가파른 경제성장, 민주화의 시련 등 주요 궤적이 비슷하다. 이번 타이베이 비엔날레 기획을 맡은 샘 바더윌과 틸 펠라트(베를린 국립 함부르크 반호프 미술관 공동 관장)는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민지 역사부터 정체성의 변화하는 흐름까지, 이곳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가는 무언가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늘 대화에 열려 있다는 인상을 주는, 베를린에서 온 감독 듀오는 올해 제14회를 맞이한 타이베이 비엔날레의 대장정을 전시 면적만 110,000㎡(약 3만3천2백 평)가 넘는 미술관 3개 층을 수놓은 기획전 <지평선 위의 속삭임(Whispers on the Horizon)>으로 펼쳐냈다. 37개 도시 출신 작가 72명의 작품 1백50점을 선보였고, 회화, 조각, 영화, 사진,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34점의 신작과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지평선’은 알려진 것과 바라는 것 사이의 경계선, ‘속삭임’은 소통의 연약함, 침묵 속에서도 지속되는 목소리, 지워져도 계속되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는 결코 붙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으로서의 ‘갈망(yearning)’이라는 커다란 주제로 향한다.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이며, 연약하면서도 저항적인’ 속성을 지닌 갈망이다. ‘상상력과 변화로 연결하는 실’ 같은 동력을 지닌 갈망은 아주 작은 속삭임이 멀어진 간극을 메울 수 있고, 아주 작은 몸짓으로도 우리가 세상을 상상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음을 얘기하고자 한다.
이번 비엔날레는 풍부한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깊이를 지녔으면서도 사뭇 대중적이다. 글로벌 팬데믹을 계기로 우리 인류가 서로 가까워진 듯하면서도 더 작은 단위로 쪼개졌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스몰 월드’라는 주제를 ‘음악’을 매개로 펼친 지난 2023 타이베이 비엔날레가 살짝 ‘마라 맛’ 같은 강렬한 매력을 내보였다면, 2025 버전은 전시장을 관통하는 서사의 흐름이 훨씬 더 보편적이면서도 인상적으로 와닿는다. 단단한 벽 대신 직물 칸막이를 활용해 시야 확보와 동선의 흐름을 유연하게 한 점도 눈에 띄었다. 아마도 현지 관람객들은 그러한 체감도가 더 높았을 것 같다. 커미션 신작, 그리고 주제에 맞춰 선정한 작품과 더불어 세심하게 고른 30여 점의 TFAM 소장품이 대만의 과거와 더 넓은 세계, 그리고 개인의 기억과 집단적 역사를 연결하는 대화의 창으로서 조화로운 울림을 이뤄내는 덕분이다. 단적인 예로 전시의 ‘개념적인’ 축을 이루는 세 가지 오브제로 대만인에게 소박하지만 짙은 감성으로 다가오는 ‘일기’, ‘자전거’, 꼭두각시 ‘인형’이 제시된다. 실물은 전시되지 않지만 근현대를 관통하는 다양한 사진과 문서가 상징적 연결 고리로 미묘하게 작동하게 한다는 의도를 담았다. 예컨대 우리나라 영화 팬들에게도 친숙한 허우샤오셴(Hou Hsiao-Hsien) 감독의 <인형사>(1993)에 등장하는 리티톈루(Li Tien-Lu)의 인형은 공예에 헌신한 삶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끈기를 말한다. “우리는 오직 이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비엔날레를 만들고 싶습니다. 타이베이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드는 역사, 언어, 그리고 모순에 귀 기울이는 비엔날레 말입니다.” 샘 바더윌과 틸 펠라트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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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Interviews


방대한 비엔날레의 전시 작품을 빈약한 지면에 담는다는 건 하이라이트만 솎아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일이다. 게다가 여유 있게 찬찬히 들여다보면 한 점, 한 점 소중한 작업이고 깊이 파고들어야만 의미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기에, ‘주요 작품’이라는 단어도 미안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다. 그래서 이번 비엔날레에서 서로 다른 층의 공간에서, 저마다 다른 매체에 담아낸 흥미로운 서사를 풀어내면서 ‘갈망’이라는 키워드의 다면적 메시지를 가만히 곱씹게 하는 1980년대생 작가 3인과의 짤막한 인터뷰를 소개한다.

interview with
치우지얀(CIOU Zih-Yan)

1985년생, 대만 먀오리 산이 출생


치우지얀(CIOU Zih-Yan), ‘위장 비행장(Fake Airfield)’(2025). TB 2025 커미션 신작. Photo by 고성연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온전해질 수 있을까?

미술관(TFAM) 1층 로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커다란 설치 작품은 ‘위장 비행장(Fake Airfield)’(2025)이라는 커미션 신작(2025)이다. 자세히 보면 두꺼운 판지로 만든 비행기로 안에 설치된 작은 모니터를 통해 영상도 흐른다. 제목처럼 대만의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공군을 속이려고 건설된 위장한, 실제로 존재했던 ‘가짜 비행장’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물론 전시장 다른 편에 위치한 영상에서의 모습처럼 지금은 땅이 농지로 바뀌어 활주로의 흔적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대만 사람들은 이러한 과거를 알지 못한다. 작가는 과거란 우리 안에 남아 있거나, 흔적의 형태로 존재한다면서 ‘사건’과 ‘기억’의 완전한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낸다.


Q 1985년생으로 위장 비행장이 있던 시기보다 훨씬 나중에 태어났는데, 어떻게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나요?
7년여 전, 가족 문제로 윈린(雲林)으로 이사를 했고 직장 때문에 커우후(口湖)와 베이강(北港)을 오가며 거의 매일 옛 활주로를 지나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오래된 콘크리트 구조물을 발견했고, 조사 끝에 이곳이 일본 특공대 가미카제의 비행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죠. 저를 매료시킨 점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군이 지역 주민과 전통 사찰 장인을 동원해서 대나무, 종이공예, 그림 기법 등을 이용해 수많은 미끼 항공기를 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군사기지 대부분은 현존하지 않고, 몇몇 구조물은 농부들이 직접 철거하기 어려워 현장에 남아 결국 주변 자연경관의 일부가 됐습니다. 이 역사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벙커처럼 대부분 잊혔죠.


Q 고증을 위해 현장 조사를 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작품으로 풀어내게 되었습니까?
당시 일본은 대만을 ‘침몰 불가능한 항공모함’으로 만들고자 했고, 단기간에 대만 전역에 50개 이상의 비행장을 건설했습니다.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인 ‘베이강 비행장’도 그렇게 탄생했고요. 모든 비행장이 위장은 아니었지만 베이강 말고도 일란(宜蘭), 핑둥(屏東)에도 가짜 활주로가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이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저는 이 모형 비행기들이 전쟁 필수품이었지만 취약한 재료와 ‘제로 전투기’의 단순한 복제품이라는 한계로 특징지어진 존재였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 식민주의와 권위주의 통치하에서 대만 사람들이 경험한 이중적인 반식민주의와 주체성의 모순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Q 대만 먀오리에 뿌리를 둔 하카족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카족이든, 대만인이든, 혹은 둘 다이든, 작가님의 공동체가 오랫동안 갈망해온 게 있다면요?
저의 하카족 혈통은 예술 활동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데, 특정 주제 의식을 다룰 때 드러나는 게 아니라 방법론 중 하나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관점, 그리고 일상에 대한 성찰로 작용합니다. 대만은 식민 통치와 권위주의적 지배의 역사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경험이 정권에 의해 억압되거나 지워졌습니다. 그러나 지워져야 했던 과거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전체 모습을 온전히 인지할 수는 없지만, 영향력은 여전히 느껴집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움’은 사건과 기억의 완전한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 열망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수평적이지 않은 관계에서 비롯된 한계는 ‘갈망’도 비튼다

대만과 한국의 근현대사 궤적은 많이 닮았지만, 사회 정서에서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청일전쟁 이후 반세기에 이르는 식민 통치에도 대만과 일본은 대체적으로 서로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필자도 틈만 나면 이 점에 대해 현지의 지인들에게 묻고는 했다.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만은 ‘일치시대’ 전에도 대만은 중국의 한 섬이었고, 그 전에도 네덜란드(17세기) 등 다양한 외세의 점령을 받은 터라 정체성 다지기에 고심했기에 기본적인 정서가 좀 달랐다는 얘기가 있다. 첫 식민지였던 대만의 모범 사례로 만들기 위해 일본이 애를 썼고, 그 과정에서 대만 경제를 활성화된 부분도 작용했다. 왕야오이의 2채널 영상 작품 ‘공동 제작(CO-PRODUCTION)’은 20세기 초 대만 영화 산업의 선구자 격인 실존 인물 다카마쓰 도요지로에서 착안해 오랜 지배하에 놓였던 관계의 종속성을 현시대의 에피소드를 통해 다시 들여다본다. 현시대의 일본인 조감독과 대만인 프로듀서가 영화 제작을 위해 다카마쓰의 자취를 밟으며 여정에서 나오는 대화가 흥미롭다.


interview with
왕야오이(Wang Yao-Yi)
1987년생, 대만 타이난 출생, 현재 타이베이 거주

왕야오이(Wang Yao-Yi), ‘공동 제작(CO-PRODUCTION)’(2025). Two-channel video. Courtesy of the artist, Commissioned by Taipei Biennial 2025.
Image courtesy of Taipei Fine Arts Museum.
Q ‘공동 제작’은 이미 전시된 적이 있고, 이번에 타이베이 비엔날레에서 의뢰받아 추가 제작된 걸로 알고 있는데, 새롭게 추가된 요소와 그 의미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채널은 2024년 술랑 문화공원 레지던시에서 제공된 자원을 활용해 제작했습니다. 일본인 조감독과 대만인 프로듀서가 다카마쓰가 걸었던 역사적인 장소를 방문하며 영화를 제작하려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채널은 이번 비엔날레의 의뢰로 제작한 두 번째 채널은 선불교의 공안(kōan, 公案)인 ‘벽돌을 닦아 거울을 만드는 것(磨磚成鏡)’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이는 은유적으로 헛된 행위로 이해되며, 등장인물들이 결국 완성하지 못하는 첫 번째 채널의 영화 프로젝트를 가리킵니다. 두 채널은 각각의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고 별도로 시청할 수 있지만 함께 보면 상호 텍스트적인 대화를 형성하죠.


Q 대만에서 영화 제작에 고군분투하는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바탕에는 대만에서 최초로 촬영한 다카마쓰 도요지로의 실화를 전제로 하는데, 이 영화는 소실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의 대만 발전상을 묘사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는 대만 문화계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인가요? 어떻게 접하게 됐는지요?
그가 만든 <대만 실상영화(Taiwan Jikkyō Shōkai)>는 더 이상 볼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기록물이 많습니다. 대만 일제강점기 당시 가장 널리 배포됐던 신문에는 다카마쓰가 촬영했던 장소와 촬영 기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어, 내용도 어느 정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노동운동가였지만, 일본 식민 정부의 요청으로 대만에 와서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상업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대만에서 여러 영화관을 소유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한때 좌파 청년이었던 그가 식민 정부를 위해 일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러한 호기심이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Q 대영상 작품 속 주인공은 대만이 더 이상 식민지도 아니고 계엄령하에도 있지 않은 시대의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대만 영화 산업은 세계화와 자본 전쟁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작품 속 ‘공동 제작’이라는 현실이 대만 사람들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던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반영하는 걸까요? 일본인 조감독과 다카마쓰는 서로 포개지는 캐릭터인가요?
대만 영화 산업의 난관에는 여러 복잡한 요인이 얽혀 있지만,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지역 문화가 지배적인 외국 문화에 종속되는 경향입니다. 이는 우리가 여전히 이러한 외국 문화가 상징하는 근대화를 ‘동경’, ‘갈망’하는 상태에 갇혀 있음을 시사합니다. 제 작품에서 일본인 조감독은 대만인 프로듀서에게 영화 제작 기술을 가르치며, 둘 사이에 짧은 멘토 관계가 형성됩니다. 다카마쓰는 멘토인 이토 히로부미의 소개로 대만에 와서 영화를 촬영했고, 대만인 가이드의 안내로 섬 곳곳을 여행하며 촬영했습니다. 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다카마쓰 도요지로를 암시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 관계는 일본과 대만의 식민 관계를 반영합니다.




interview with
아침 김조은(Joeun Kim Aatchim)

1989년생, 한국 출생, 미국 뉴욕 거주


#아주 작은 속삭임이 ‘울림’이 되는 순간들

이번 비엔날레에는 ‘번역된 도자기’로 명성 높은 이수경, ‘한지·먹·불’의 회화로 유명한 김민정, 송은미술대상 대상 수상자 탁영준 등의 한국 출신 작가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아침 김조은 작가가 커미션 작업인 실크 드로잉 시리즈 ‘침 Crush’로 2층 전시장을 인상적으로 수놓으며 그 대열에 합류했다. 이름 ‘조은’의 한자 뜻인 ‘아침의 은혜’를 담은 작가명을 쓰는 그녀는 지난해 여름 글래드스톤 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 <최소침습(Minimally Invasive)>을 선보였는데, ‘완판’과 더불어 미술계의 호응을 얻었다. <최소침습> 프로젝트는 한자 뜻에 따라 ‘최最/소小/침侵/습襲’ 4장으로 나뉘는데, 작년 서울 전시에서는 ‘작음’, ‘적음’ 등에 주목한 ‘소小’만 펼쳤고, 비엔날레 감독들은 이 전시의 프롤로그에 해당되는 LA 전시를 보고 작가의 뉴욕 스튜디오를 직접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반년쯤 뒤 비엔날레 초청으로 이어졌다.


Q 작가님의 <최소침습> 프로젝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챕터인 ‘소小’를 서울 전시에서 전개한 데 이어 이번에는 ‘침 Crush’라는 작업을 선보였는데, 어떤 결의 작업인가요? 커미션 작업인데 예술감독들과 어떤 교감이 있었나요.
제가 삶의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침잠하던 시기에 그린 작품들입니다. 여기에서 ‘침 Crush’는 큰 충돌이라기보다 바깥으로 나아갈 힘이 사라지고 안쪽으로 계속 파고드는 상태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아요. 부서지는 순간이 아니라, 부서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더 낮추고 더 작게 접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침(侵)’은 그렇게 이어진, 아주 작은 속삭임 같은 움직임에 대한 기록입니다. 원래 비교적 대형 설치 작업을 구상하기도 했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스튜디오에 오래 머무르며 작업하는 방식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게 되었어요. 그 결과, 제 삶이 저를 이끄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이어갈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작업을 제작하게 됐고, 이를 하나의 군중처럼 세우는 설치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작업은 저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저와 함께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같이 자고, 서로를 관찰해오면서 완성한 그림들입니다. 완성된 결과라기보다 가장 처음 몸짓에서 멈춘 초안이에요. 완성보다 연약한 속삭임이라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시기였고, 그 점이 이번 전시의 주제와도 잘 맞닿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Q 섬세한 외과수술 기법을 가리키는 ‘최소침습’이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가 작가님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조금 더 공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고국을 떠나 장기간 체류하면서 타지에서 겪은, 다소 무섭고 생소하지만, 의외로 위로가 되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요?
흥미롭게도 ‘최소침습’이라는 말 자체가 제 개인적인 기억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실제로 최소침습적 수술을 받고 회복하던 시기에, 조용히 음미하게 된 말이었어요. 몸에 남는 상처는 최소화하면서도, 삶에는 분명한 변화를 남기는 방식이라는 점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가장 작은 몸짓으로 가장 크고 오래 남는 영향, 가장 짧은 만남이 가장 긴 기억이 되는 것. 저는 그것이 제가 욕심내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형태라고 느꼈습니다. 15년간 해외에서 생활하며 저는 늘 타인의 삶과 공간을 조심스럽게 통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은 때로는 낯설고 두려웠지만, 동시에 제 삶의 감각을 더 섬세하게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 작업 또한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크게 동요시키기보다 조용히 기억에 남는 방식이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최소침습’은 작업의 방법이자, 15년 동안 타지에서 살아오며 제가 몸으로 익혀온 하나의 태도에 가깝습니다.


Q 스스로의 작업 방식을 ‘투명주의(transparentism)’라고 규정했습니다. 실크라는 투명감 있는 재료에 드로잉을 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게 된 계기,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스스로의 상처를 보듬는 ‘치유’로 연결할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얼마 전 같은 질문을 받았는데, 이렇게 답한 적이 있습니다. “투명주의는 제 시간과 경험이 층층이 쌓여 형성된 하나의 삶의 철학입니다. 기억은 불러올 때마다 아주 얇은 새 종이에 복사되듯 한 겹씩 더해지고, 그렇게 조금씩 달라진 기억 위에 또 다른 기억이 얹혀 부활한다고 생각합니다. 겹, 즉 ‘layer’는 제 작업에서 시간을 뜻합니다. 저는 한 장을 완성하기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만들어진 초안을 겹쳐 보며 짝을 찾습니다. 그렇게 작업은 하나의 영속적인 초안으로 남습니다.” 이 방식은 저에게 상처를 즉각적으로 봉합하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을 보듯 시간을 두고 친밀해지는 법, 그리고 기다리는 태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실크라는 투명한 매체 위에 드로잉을 이어가는 일은, 그런 태도를 몸으로 연습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실크 드로잉은 결과라기보다 제가 스스로를 보듬어온 시간의 흔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아침 김조은, ‘Minimally Invasive: Chapter 침 Crush’(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François Ghebaly,
Los Angeles / New York. Image courtesy of Taipei Fine Arts Museum.







Art+Culture ’26 Winter Special

01. Art + Culture 보러 가기
02. 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2025_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갈망한다 보러 가기
03. 라스베이거스 문화 예술 산책_‘네온의 도시’가 창조하는 세계 보러 가기
04. 멜버른(Melbourne) 리포트_진정으로 ‘잘 먹는’ 생태계로 향하는 푸드 업사이클링 보러 가기
05. Taste of Luxury Brands_미식으로 경험하는 브랜드의 정수 보러 가기
06. 경주로 떠난 미술 여행_‘코리아 판타지’를 새로 쓰는 서라벌의 미술관들 보러 가기
07. 아뜰리에 에르메스_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산과 친구되기〉_생태적 감각으로 마주한 세계 보러 가기
08. 10 Exhibitions_Remember the Exhibition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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