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책, 예술, 그리고 삶의 연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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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7, 2026

글 고성연(타이중 현지 취재)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Taichung Green Museumbrary)

한 도시의 랜드마크가 될 운명을 지닌 건축물이 막 공개될 즈음, 묘한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현장에 동참한다는 건 굉장히 흥미진진한 일이다. 지난 12월 중순 대만 중부의 거점 도시 타이중의 야심 찬 문화 프로젝트로 드디어 베일을 벗은 ‘뮤지엄브러리(Museumbrary)’ 얘기다. ‘타이중 그린 뮤지엄브러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이 콤플렉스는 단어 조합에서 짐작할 수 있듯 푸릇한 자연 속에서 미술관과 도서관이 하나로 느슨하게 묶이는 개념의 새로운 문화 플랫폼이다. 실제로 이 콤플렉스는 타이중 도심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멀지 않은 수아닌 경제무역단지 내 공원인 센트럴 파크의 한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시정부 차원에서 2013년 국제 공모전으로 건축가를 선정해 오랫동안 진행해온 공공 프로젝트인 만큼 화제성도 남달랐다. 더구나 그 주인공은 건축계 최고 권위를 지닌 프리츠커상을 거머쥔(2010년) 세지마 가즈요(Kazuyo Sejima)와 니시자와 류에(Ryue Nishizawa)가 이끄는 일본 건축 스튜디오 SANAA였다. ‘가볍고, 투명하고, 열린’ 건축을 지향하는 SANNA의 스타일답게 뮤지엄브러리의 외관은 마치 8개의 하얗고 네모난 상자가 구름처럼 살짝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양새다. 건축만으로도 글로벌 여행자들을 불러 모을 이 매혹적인 플랫폼은 안으로 들어가보면 한층 더 다면적인 매력을 품고 있다. 오프닝 전에 만난 건축가 듀오가 얘기했듯 ‘자주 찾다 보면 많은 연결 고리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위한 발품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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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공원 옆 ‘미술관+도서관’


건축계 거장 SANAA ‘듀오’의 또 하나의 이정표

고속철을 타고 내린 타이중 도심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15분가량 달렸을까. 자못 화려한 파사드를 입은 컨벤션 센터(TICEC)가 스쳐 지나가고는, 드디어 뮤지엄브러리를 실물로 마주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도시의 표정’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건축과의 조우를 틈만 나면 추구해온 입장에서 타이중이 글로벌 랜드마크로 당당히 내세운 뮤지엄브러리가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아마도 21세기 들어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일본 가나자와), 뉴 뮤지엄(미국 뉴욕), ‘시드니 모던’으로 불리는 NSW 주립미술관 신관(호주 시드니) 등 지구촌의 주요 미술관 프로젝트를 맡아온 SANAA의 궤적을 우연히 접해왔기에 호기심이 조금은 더 강하게 발동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로를 지나 차에서 내리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하나, 둘, 셋, 서로 다른 모양새의 건물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온다. 하얀 블록을 비스듬하게 포개놓은 듯한 유리와 금속 소재의 담백한 건축물이 햇빛을 받아 살짝 투명하게 빛나고, 외벽은 그물 모양의 은백색 알루미늄 커튼 월이 전반적으로 감싸면서 경쾌한 질감과 개방성을 불어넣는다. SANAA 특유의 ‘공기 같은’ 건축 언어가 묻어나는 모습이다.
인상적인 건 뮤지엄브러리의 정문으로 들어가면 반겨주는 ‘열린 공간’이다. 미술관과 도서관 사이에 자리한 이 공간은 커다란 분수가 흐르는 로비 같은 역할을 하면서, 뒤로 가면(남쪽) 센트럴 파크로 바로 이어지는 ‘열린 통로’이기도 하다. 총 면적 57,996㎡(약 1만7천5백 평)에 이르는 뮤지엄브러리는 다양한 크기의 8개 덩어리로 이뤄져 있지만 작은 다리와 계단, 엘리베이터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도서관은 7층, 미술관은 6층 건물이고, 5층에는 이를 이어주는 듯한 느낌의 작은 정원도 ‘컬처 포레스트(Culture Forest)’라는 이름으로 들어서 있다. 또 1층에는 아담한 카페와 아트 숍도 별도의 원형 공간에 들어서 있다. 아마도 첫 방문에는 ‘미로’처럼 느껴질 법한 면면이 많은데, 살짝 헤매면서 여기저기 숨은 공간을 발견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필자의 경우에도 도서관에서 발견한 ‘최애’ 만화책 시리즈가 꽂혀 있는 서고라든지, 미술관에서 길을 살짝 잃다가 예술 작품을 벗하면서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투리 공간 같은 즐거운 마주침이 몇 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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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없는 포용적 공간
“저희가 머릿속에 그린 큰 그림 중 하나는 ‘공원 같은 건축’이었어요. 그러자면 탐험할 거리가 많아야겠죠. 이 공간에 다양한 상호작용과 연결 고리가 있는 요소를 넣은 이유입니다. (그걸 마주치며) 사람들이 거닐 수 있도록요.” 좌중 앞에서는 과묵한 SANNA의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처럼 유연한 연결성에 대한 건축 철학을 듣노라니, SANAA가 그들의 화려한 커리어에서도 역대급이라 할 수 있는 문화 예술 프로젝트인 뮤지엄브러리의 설계와 여러모로 결이 잘 맞는 협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미술관과 도서관의 전통적 경계를 허물고 전시와 독서가 어우러지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환경을 조성한다는 개념 자체가 SANAA의 참여적이고 열린 건축적 지향점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팬데믹을 거치면서 장기간 이어진 이 프로젝트는 당초 책정된 예산보다 늘어난 5억3천 대만달러(한화로 약 2천5백억 원)의 자금이 소요됐다. 사실 뮤지엄브러러의 탄생 자체는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추진된 전략적 구상의 소산이다. 크게 보면 대만의 ‘문화적 르네상스’라는 비전에 부합하고, 타이중 입장에서는 지난 2010년 제2의 도시로 부상하면서 새로운 이정표가 될 만한 ‘통합’의 상징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산간 지역이 주를 이루는 타이중현과 고층 건물이 치솟아 있는 산업 기지인 타이중시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주민들에게 창조적 영감과 자부심을 불어넣고 지역 정체성을 공고히 할 만한 공간이야말로 이상적인 돌파구로 여겨졌다. 원래 구상은 ‘타이중시 문화센터’였다고 하는데, 타이중시 문화국과 SANAA의 협업이 전개되면서 ‘공원 속 도서관’이자 ‘숲속 미술관’이라는 경계를 넘나드는 포용적인 ‘그린 뮤지엄브러리’라는 개념의 중심축을 잡게 됐다. 그 결과, 타이중시가 소장한 서적과 미술품을 뮤지엄브러리로 옮겨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동의 플랫폼을 새 보금자리로 삼게 됐다. 배경이야 어쨌든 타이중 시민들과 더불어 여행자에게도 멋진 선물이 건네졌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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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미술관의 흐뭇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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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비엔날레를 연상시키는 개관전
10년 넘게 공을 들인 걸출한 문화 프로젝트인 만큼 뮤지엄브러리의 공개와 함께 그 공간에서 진행될 현대미술관의 개관전에도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정식 명칭은 타이중 미술관(Taichung Art Museum, TcAM). 그 시작을 기념해 ‘작은 비엔날레’를 연상시킬 정도의 규모와 내용을 내세운 첫 기획전을 내놓았다. 다국적(20개국 70여 명) 작가들이 참여한 <모든 존재의 부름: 내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나요(A Call of All Beings: See you tomorrow, same time, same place)>(4월 12일까지). 미술관을 둘러싼 자연과 도시 경관에서 영감을 얻은 이 전시는 타이중 미술관 큐레이터 팀과 링치초우(대만), 알라이나 클레어 펠드먼(미국), 안카 미훌레츠-킴(루마니아/한국)이 공동으로 기획했다. 독립 큐레이터 출신으로 40대에 초대 관장을 맡은 라이이신(Yi-Hsin Lai) 관장이 이끄는 미술관답게 젊고 열정적인 팀이다. 도교 철학부터 토착 우주관, 비서구적 관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론을 접목해 자연, 문화, 그리고 종 간 관계에 대한 다채로운 사고와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 전시에는 다국적 작가들의 신작과 더불어 대만 중부 거장들의 뿌리를 느낄 수 있는 소장품이 조화를 이룬다. 건축의 유기적 연결성이 반영되듯, ‘첫 작품’은 미술관 건물 6개 층에 걸친 5개의 전시실로 이동하기 전부터 말을 건넨다. 로비의 동그란 분수 곁에서는 돌과 흙, 금속, 콘크리트 등의 재료가 ‘날것’ 그대로 보이는 나선형 설치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더 드릴(The Drill)’이라는 별칭을 지닌 아드리앵 티르티오(Adrien Tirtiaux)의 이번 전시용 커미션 작품이다. ‘Post-Museum Evidences’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미술관을 짓는 과정에서 남겨진 다양한 건축 자재를 활용한 작품으로 5층의 D 전시실까지 재료의 구성과 모양새를 달리해가면서 치솟아 있다. 그리고 건축적 조화를 넘어 67헥타르(약 20만 평)나 되는 공원 등 주변의 생태·문화적 풍경과 어우러지면서 미술관 정체성을 드러내는 대형 커미션 작품 2점도 선보였다. ‘열린 로비’ 같은 ‘퍼블릭 스페이스’에 놓여, 장기간 관람객을 만나게 된다(2년 주기). TcAM 아트 커미션의 첫 작가 중 하나는 대만 출신 마이클 린(Michael Lin). 그의 작품 ‘Processed’(2025)는 안내 데스크 역할을 하는 원형 파빌리온의 지붕 위를 대만 전통 직물에서 차용한 패턴으로 수놓고 있다. 지상 레벨보다 높은 층에서만 보이는 작품인데, 작가는 “전체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역할도 필요합니다”라고 담담히 설명했다.






지역 문화와 생태, 그리고 예술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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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 같은 존재감을 지닌 양혜규의 ‘우주나무’
그리고 또 다른 TcAM 아트 커미션 작업은 베를린과 서울을 기반으로 세계 무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양혜규가 맡았다. 그녀가 대만에서 전개한 첫 대형 커미션 작업이자 블라인드 신작인 ‘유동 봉헌–삼합 나무 그늘(Liquid Votive–Tree Shade Triad)’(2025). 양혜규 작가는 그동안 한국과 대만을 비롯해 여러 문화권에서 전해지는 고목 숭배 전통에서 영감받아 천장에 매달린 나무를 은유하는 ‘유동 봉헌’ 시리즈를 선보여왔는데,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당 중앙에 주로 놓이는 한국의 당산나무는 ‘우주나무’로 여겨진다고 한다. 수직으로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수평으로는 사방의 중심축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타이중 현지의 절과 숲 등을 찾은 현지 답사를 바탕으로 오래된 나무의 문화적 상징성을 담아낸 이번 ‘우주나무’ 작업은 짙은 녹색을 주된 색깔로 삼고 겨자색, 붉은색(버건디), 황갈색 등 자연의 색을 닮은 저채도의 블라인드로 구성해 온화하면서도 풍성한 색감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무려 27m에 이르는 미술관의 아트리움 공간에 놓여, 이를 둘러싼 나선형 경사로를 타고 올라가며 다각도로 감상할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물리적으로 ‘크다’라는 느낌이 위압적일 수도 있고, 고압적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나무에서 포착한 건 사실 그런 느낌보다는 우러러보면서 휘청한 느낌이나 존경할 만하지만 친근한 느낌, 밤에는 미스터리하지만 신비로운 느낌이에요.” 오프닝 주간에 현지를 다시 찾은 양혜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타이중 미술관의 ‘우주나무’는 저녁이 되어 어둠이 내려앉으면 신비한 오라를 빚어낸다. 작품을 밝혀주는 LED 조명과 초록색 반딧불이를 연상시키는 레이저 빛의 반짝거림이 공간을 아름답게 물들이는데, 이 풍경은 특히 공원 쪽에서 바라보면 미술관 건물 전체를 밤의 수호신처럼 감싸는 듯해, 더 낭만적으로 와닿을 수도 있다. 2004년 폐쇄된 옛 군용 공항 부지에 조성되어 아직은 그다지 울창한 느낌이 들지 않는 공원이지만, 뮤지엄브러리를 찾는다면 ‘책 삼매경’이나 ‘미술 산책’도 좋지만 초록이 점차 여물어가는 자연의 풍경도 꼭 눈에 담아 오기를 권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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