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명품 패션 거리 몬테 나폴레오네 지역에서 프라다, 에르메스, 티파니앤코, 돌체앤가바나 숍이 밀집한 스피가 거리(Via della Spiga) 의 초입에는 지난 36년간 위상을 지켜온 갤러리 닐루파가 있다. 거리를 따라 가로로 펼쳐진 쇼윈도 속으로 이곳의 운영자 야샤르가 큐레이션 작업을 한, 동양과 서양, 빈티지와 컨템퍼러리 가구의 매력적인 믹스 매치가 눈길을 잡아끈다. 펜디, 디올 등 명품 브랜드들이 여기에서 구입한 디자인 퍼니처로 플래그십 스토어를 꾸미는 것은 물론 야샤르의 절친인 미우치아 프라다, 마크 제이콥스, 리카르도 티시 등 패션계의 셀러브리티들도 자신들의 자택에 ‘닐루파표’ 가구를 다수 소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다른 고객인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스테파노 필라티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 이 갤러리 앞을 지날 때면 야샤르가 연출한 아름다움에 탄복하며 언젠가 ‘그녀의 가구’에 둘러싸여 살게 되기를 꿈꿔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 자신도 밀라노의 대표적인 패셔니스타로 손꼽히기도 하는 야샤르. 올해 새롭게 오픈한 닐루파 디포(Nilufar Depot)에서 그녀는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실크 의상에 자신의 뿌리인 중동을 상징하는 자신의 패션 시그너처인 터번을 쓴 채 맞이했다.
1957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태어난 야사르는 6세 때 가족과 함께 밀라노로 이주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신의 뿌리에 자긍심이 강한 부모님 아래 자라난 그녀는 대학 시절 동서양 문화의 가교 역할을 해온 도시 베니스에서 동양어를 전공하며 자연스럽게 예술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선구적인 비즈니스 감각으로 명품 페르시안 카펫을 밀라노에 판매해온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그녀는 1979년 카펫을 간판으로 내세워 갤러리 닐루파를 설립했다. 탁월한 안목으로 중동 현지에서 고른 이국적인 카펫들은 서양 문화에 대한 우월 의식이 높은 밀라노의 상류층에도 감탄을 불러일으키며 갤러리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전공인 어학 능력을 바탕으로 중동을 넘어 인도와 중국 등을 돌며 엄선한 다양한 카펫을 들여왔고, 밀라노 최초로 보풀 없이 굵고 평평하게 직조하는 킬림(Kilim) 기법의 카펫을 선보이며 새로운 유행을 선도했다. 고전적인 취향 일색인 페르시안 카펫 갤러리와 달리, 컨템퍼러리함을 지향하는 서양인의 취향과 어우러지면서도 예술성 높은 동양의 빈티지 카펫을 쏙쏙 골라오는 그녀의 남다른 컬렉터 재능이 갤러리 닐루파를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카펫을 인테리어에 접목해 공간에 연출하는 큐레이터적인 재능 역시 큰 무기였다. 1989년 갤러리를 현재의 패션 중심지로 이주한 그녀는 주기적으로 테마를 정해 카펫 전시를 펼쳤다. 화려한 꽃 문양이 돋보이는 카펫을 과감하게 연출한 <장미>전을 시작으로, 벽 인테리어로 벽지와 페인트가 유행하던 1980~90년대의 유행에 과감히 맞서 그것을 카펫으로 대체하는 연출을 펼치며 주거 공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후 인도와 스칸디나비아, 프랑스와 티베트 등 동양과 서양, 빈티지와 컨템퍼러리 카펫을 과감하게 믹스 매치한 전시를 선보이며 이질적인 것들의 묘한 조화가 자아내는 참신한 매력을 제대로 보여줬다. 야사르는 “갤러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고객층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새롭고 좋은 취향을 지속적으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면서 ‘탐험과 교차를 통해 새로운 창조’가 닐루파의 모토라고 밝혔다.
4 올해 새롭게 선보인 초대형 갤러리 닐루파 디포. 밀라노 북부의 3층짜리 은 식기 공장을 오페라 극장처럼 레노베이션해 장관을 연출했다. 사진 제공 Amendolagine Barrachia
1980년대 후반, 카펫으로 점철됐던 그녀의 인생 항로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도래했다. 카펫 구입차 북유럽으로 떠난 출장에서 스칸디나비안 가구를 만난 것이다.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 루이스 포울센(Louis Poulsen), 에로 사리넨(Eero Saarinen) 등이 펼쳐낸 유려한 곡선의 가구와 조명에 사로잡힌 그녀는 예기치 않게 카펫 대신 가구를 사서 밀라노로 돌아온다.
이후 디자인사 공부에 매진한 그녀는 이탈리아의 디자인 거장 조 폰티(Gio Ponti), 지노 사르파티(Gino Sarfatti)의 가구를 수집하는 한편, 가에타노 페세(Gaetano Pesce),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 등 당대 거장 아티스트, 건축가들과 협업하면서 자신의 컬렉션을 확장시켜나갔다. 이처럼 카펫과 더불어 가구를 접목해 주거 공간을 대상으로 확장한 닐루파는 디자인 갤러리로서 오늘날의 명성을 이뤄냈다. 동서양, 그리고 빈티지와 컨템퍼러리의 이질적인 매력을 조화롭게 엮어내는 닐루파만의 감각이 다양한 세대와 문화권의 고객들에게 사랑받는 갤러리로 성장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 것이다.
2005년 이후 고가의 디자인 퍼니처 시장이 세계적으로 급성장하자 야샤르는 신진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을 후원하는데에도 적극 나섰다. 밀라노뿐 아니라 디자인 마이애미와 바젤에 매년 이 작품들을 거장의 빈티지 가구들과 함께 선보이며 글로벌 시장을 개척했다. 디자인 마이애미의 총감독 로드만 프리막은 닐루파가 이 행사에서 늘 최고의 방문객을 이끄는 곳이라고 말하며 야샤르를 ‘가구 딜러계의 페기 구겐하임’이라 극찬한 바 있다. 실제로 불과 몇 년 만에 닐루파가 선택한 작가들의 작품 가격은 해외 컬렉터들의 러브콜을 받으면서 몇 배로 급격히 뛰어올랐고, 그중 몇몇은 스타로 거듭났다. 세련된 감성의 디자인 가구를 자체 제작하는 스튜디오 누클레오(Nucleo)와 폐가구를 재활용하는 업사이클링 작업을 주로 하는 마르티노 감페르(Martino Gamper)가 그 대표적인 예다. 감페르의 경우, 야샤르가 ‘1백 일 동안 1백 개의 의자(100 chairs in 100 days)’라는 테마로 전시를 연출했는데, 이후 무명이었던 그는 밀라노, 런던, 상하이 등의 유수 미술관에서 초청받아 순회전까지 여는 유명 인사가 됐다.
유럽의 장기 불황으로 많은 갤러리가 문을 닫고 있는 현실에서 오히려 성장세인 닐루파의 성공에는 럭셔리 하이엔드 가구 시장에 집중한 전략이 한몫했다. 야샤르는 VVIP 시장은 경기를 크게 타지 않았고,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게 되면서 더 많은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변화의 흐름도 예리하게 읽어내야 해요. 취향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세계 경제와 산업의 발전에 따라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새로운 상류층이 등장하거든요. 이들의 기호를 충족시키고 영감을 주는 디자인을 제시하는 일은 도전적이면서도 흥미롭죠.”
변화와 실험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진화를 모색한 덕에 온갖 외풍에도 끄떡없이 버텨온 것이다. 빈티지 가구 전문가로 특히 1950년대 이탈리아 디자인을 선호하는 야샤르지만 컬렉션에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컬렉션의 기준과 관심사를 묻지만 사실 저는 특별히 한 분야를 고수하지 않아요. 향후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질지 저도 모르겠어요. 제 자신이 지루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해서 늘 새롭게 관심을 끄는 걸 찾죠.” 그러한 차원이었을까. 그녀는 올해 4월 밀라노 가구박람회 기간에 새로운 공간인 닐루파 디포를 선보여 디자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500m2에 달하는 3층의 허름한 은식기 공장을 밀라노의 오페라 극장 라 스칼라를 연상시키는 현대적인 갤러리로 탈바꿈시킨 초대형 공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수백 점에 달하는 근사한 컬렉션으로 가득 찬 3개 층이 한눈에 펼쳐지는 광경은 방문객을 절로 압도한다.
“이 개성 강한 가구를 자신의 공간에서 기존 가구와 과감하게, 그러면서도 매력적으로 매치할 수 있도록 컬렉터들에게 자신감과 상상력을 불어넣는 것이 갤러리스트로서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에요.”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각각의 실로 나뉜 다양한 테마의 공간은 훌륭한 오케스트라의 음색처럼 유기적인 하모니를 창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척 공 들여 완성한 이 거대한 프로젝프 앞에서 벌써부터 ‘더 놀라운 다음 실험’을 고민하는 그녀의 쉼 없는 열정에 더욱 감탄이 배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