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Renaissance Portra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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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2, 2014

글 고영림(패션 칼럼니스트)

이번 시즌 패션 광고는 르네상스 초상화를 닮았다. 강렬하거나 난해해서 놀라움을 주는 대신 우아하면서도 쉽고, 질서가 있으면서도 최소한의 요소로 완벽을 추구한다. 과장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고, 진실하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생략하고, 순간이 아닌 영원불변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2013 F/W 패션 광고와 르네상스 초상화, 그 닮은꼴에 대한 이야기.

경기가 얼마나 회복되고 있는지, 회복되더라도 호황을 맞이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 패션 산업계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2013~14년 겨울 패션 광고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불변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오늘 구입한 상품이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휘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 보인다. 어렵고 힘들지만 인생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오늘을 견뎌내자고 소비자를 북돋는다. 이번 시즌 제작된 패션 광고는 과장되지 않고 편안해 보인다. 하지만 편안함 속에 에너지가 녹아 있다. 절제의 미덕이 묻어나면서도 약하지 않다. 클래식하다. 이번 시즌 패션 광고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패션 광고, 고요함을 그리다
패션 광고는 상품이나 브랜드를 알리는 역할 외에도 변화하는 소비자의 취향이나 문화 트렌드를 반영한 시각예술의 한 장르이기도 하다. 패션 사진의 차이는 모델의 자세를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방식의 차이이기도 한데, 이번 시즌 광고 사진 속 모델의 태도는 정적이면서도 고요한 것이 특징이다. 코오롱 스포츠(Kolon Sports) 광고의 장동건과 탕웨이를 떠올려보라. 활동성을 강조해온 아웃도어 브랜드가 움직임 가운데 순간을 잡아내는 대신, 언제라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은 영원을 표현한다. 장동건은 크게 외치는 대신 편안히 서서 읊조린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 있고 누구라도 편안하게 감싸주기에….” 탕웨이가 대답한다. “당신은 혹독함을 이겨낼 용기와 뜨거운 가슴을 가졌기에… 추울수록 당당하다”라고. 혹독한 추위는 경제적 상황을, 당당하면서도 편안한 태도는 혹독한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결연한 자세를 대변하는 듯하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오늘날, 트렌드는 절제가 미덕이라고 말한다. 많이 가질수록 행복했던 과잉 소비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고,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고요한 삶 속에서 느낄 만한 건강한 미학을 제안하고, 어두움으로 가득한 불확실한 현실을 대체할 만한 내면의 정신세계를 추구한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부연 설명은 잡다함이 되고, 정리된 간소한 생각 안에서 완벽함을 지향한다. 근원을 탐구하고 모더니티(modernity)와 전통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아름다웠던 시기를 재해석해 오늘의 역사를 새로 쌓으려고 한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예술에서 정신이 테크닉보다 강조되었던 시기, 르네상스. 이번 시즌 광고 속 모델의 표정과 자세에 르네상스의 미의식이 녹아 있는 이유이다.
르네상스 초상화, 본질을 논하다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와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lfflin)의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술을 번역한 안인희는플 “르네상스 미술은 현실을 단순화해 명료하다. 이성적이고, 건강한 자연주의를 지향해 회화 속 인물들이 안정적이고 진지하다. 힘과 에너지와 위엄을 보이면서도 자연스럽고, 견고하며, 우아하다. 또 비형이상학적이다. 클래식하다거나 고전적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진중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넉넉한 동시에 명료하다. 소녀가 아닌 성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주변과의 조화까지 배려하는 아름다움의 단계이다. 고전 미술이 감동을 주는 것은 표현의 아름다움이 내용과 내면과도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괴테(Johan Wolfgang von Goethe) 역시 “르네상스 미술은 온화하고 고귀하다. 내면의 확고함이 있으며 자연스러우면서도 균형미가 있다. 또 인간의 본질과 현실의 삶에 대한 예술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라고 칭송했다. 르네상스 회화의 핵심은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생략하는 데 있다. 생략의 미학은 모던함의 미학과 맞물려 있다. 르네상스 초상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불확실한 시대에 가능한 한 단순하게 완벽함을 추구할 수 있는 비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메디치(Medici) 가문을 알 것이다. 메디치가는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탄생한 르네상스 시대의 대부호이자 권력가이며 예술가들의 후원자였다. 르네상스 클래식의 탄생 배경에는 메디치가와 같은 부호들의 귀족화된 미의식이 깔려 있다. 아르놀드 하우세르(Arnold Hauser)는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화된 미의식 덕분에 그 결과물이 화려함보다 간결함을 추구하며 요란스럽지 않다”라고 설명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움이란 육체적 아름다움과 정신적 아름다움의 결합을 뜻한다. 다재다능하고, 교양 있고, 지적이면서도 품위 있고(그러나 너무 무겁지는 않아야 한다), 동시에 여유와 마음의 평정을 지녀 태연자약하며, 허식과 과장을 피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여성을 아름다운 여성이라 칭했다. 반면, 과격하게 움직이거나 과장되고 자기현시적인 우아함은 오히려 고상하지 못하다고 치부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는 이미 패션에 대한 책이 쓰인 시기이기도 하지만,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의 회화론,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의 회화론이 쓰인 시기이기도 하다. 르네상스 시대 아름다운 예술의 존재 의의는 그 결과물뿐만 아니라, 예술을 표현하는 ‘사람’과 표현되는 ‘사람’의 정신, 그 내면의 본질까지 중요시한다는 철학에 있다.
패션 광고, 르네상스 초상화를 닮다
“과거의 초상화는 사진으로 대체되었으며, 오늘날 패션모델의 이상적인 자세와 구성은 전통적인 회화 거장들의 작품에서 차용한 것”이라는 앤 홀랜더(Anne Hollander)의 표현은 이번 시즌 패션 광고 사진 트렌드와 딱 들어맞는다. 발렌티노(Valentino)와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의 2013 F/W 시즌 광고는 르네상스 초상화 속 여인이 현대의 옷을 입고 환생한 듯 보인다. 알렉산더 맥퀸의 광고는 복식사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의상을 입은 모델을 꼿꼿한 자세로 세워 촬영했다. 고요하고 정적이지만 주먹을 쥔 모델의 자세에서 여전사의 결연함까지 느껴진다. 반면, 발렌티노의 광고는 사진임에도 회화적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검은색 배경 앞에 선 모델은 르네상스 회화 속 여인처럼 과장되지 않은 정숙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은유적인 우아한 손동작을 통해 시선의 흐름을 조절한다. 또 르네상스 정물화적 표현을 혼용해, 하이힐이나 핸드백을 예술 작품처럼 보여준다. 입체감을 주기 위해 명암 대조 기법을 사용한 르네상스 회화처럼 모델의 신체 일부가 검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오리를 들고 있는 랑방(Lanvin)의 광고 사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백조를 모사한 르네상스 회화 ‘레다’를 떠올리게 한다. 그 밖에 ‘파란색 상자’를 강조해온 티파니(Tiffany) 역시 지난 가을에는 우아한 한 편의 클래식한 초상화와 같은 광고를 선보였다. 샤넬(Chanel)과 랑방의 이번 리조트 컬렉션 광고 또한 클래식한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넬리 로디 트렌드랩(Nelly Rodi Trendlab), 까린(Carlin, 국내 사무국 지엘아이 컨설팅) 등과 같은 트렌드 정보업체는 트렌드와 관련해 2013~14 F/W 시즌 주목해야 할 사진작가로 쉬자너 요흐만스(Suzanne Jongmans, www.galeriewilms.nl), 헨드리크 케르슈텐스(Hendrik Kerstens), 에르빈 올라프(Erwin Olaf), 줄리아 헤타(Julia Hetta) 등을 소개했다. 모두 르네상스의 미학을 현대화해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로, 에르빈 올라프와 줄리아 헤타는 상업적인 패션 광고 사진과 잡지 에디토리얼 사진 작업도 겸하고 있다. 이들 작가들은 16~17세기 유럽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장 클루에(Jean Clouet),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로히어르 판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 등과 같은 거장의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작품을 선보인다. 독일 작가 헨드리크 케르슈텐스는 딸을 모델로 사진 작업을 하는데, 모델의 자세와 소품, 빛의 효과가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네덜란드 작가 쉬자너 요흐만스 역시 상품 포장재를 사용해 르네상스 초상화를 위트 있게 재현한다. 그의 작품 속에서 르네상스는 문화적 가치를 상징하며, 작품 속 포장재는 현대의 물질주의와 소비 풍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상징한다. 한편 쉬자너 요흐만스는 정적이면서도 고요한 인물 표현과 관련해 “평온함은 작품뿐만 아니라 내 자신이 삶에서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라고 설명한다. 줄리아 헤타는 이번 시즌 질 샌더 네이비(Jil Sander Navy)와 올라 카일리(Orla Kiely)의 광고 사진 제작에 참여했다.
옆면 초상화가 의미하는 것
이번 시즌 광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옆모습을 담은 초상이다. 갭(GAP), 질 샌더(Jil Sander), 디올(Dior), 타임(Time),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등 여러 브랜드가 옆모습의 광고 사진을 제작했다. 옆모습 초상은 로마 시대 황제의 모습을 새겨 넣은 동전 디자인이 모태로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한 초상화 양식이다. 옆면이라는 특성상 사진 속 모델은 보는 주체가 아닌 보이는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해 이은기 교수는 관련 논문에서 “보이는 대상은 보통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관찰, 기념, 숭배하게 하고 종국엔 하나의 아이콘이 되도록 하기 위한 장치이다. 르네상스 옆면 초상화는 신중함, 꿋꿋함, 절제, 결연함, 명예, 정숙함, 올바름을 상징하기 위한 표현 양식”이라고 설명한다. 옆면 초상화에서 모델의 얼굴 표정은 잘 드러나지 않고, 착용한 액세서리나 의상의 실루엣이 더욱 부각된다. 질 샌더가 지적인 브랜드라고 느껴지는 것이나, 디올 광고 속 핸드백이 다른 광고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이러한 장치가 제 몫을 하기 때문이다.
패션 광고, 인문주의의 영역으로 편입되다
르네상스 시대를 인문주의(humanism) 시대라고 한다. 정신을 가꾸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오늘날, 기업 하는 사람들은 소비자에 대해 알기 위해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 던진다. 발전 동력을 찾고자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연구하고, 발전 방안으로 기술의 융합을 고민하던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새삼스레 관심을 갖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패션은 이미 예술 장르로 편입된 지 오래다. 사람들은 내 눈앞에 있는 물건이 지닌 의미와 가치에 관심을 갖고, 외양이 창조되기까지의 정신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패션이 본질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고 패션 광고에 철학을 입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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