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화가들은 자연의 순수한 빛이 주는 철학적 기쁨을 예찬하고 예술가의 상상력을 더해 영혼을 두드리는 그 생명체를 화폭에 담아냈다.
분명 생기가 느껴지지만 왠지 모르게 평온한 에너지를 조용히 뿜어내는 그림을 그리는 김보희에게 그 같은 감성과 영감, 환희를 선사하는 절대적 대상이자 안식처는 ‘제주’다. 우리네 아름다운 화산섬 제주를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그녀에게 제주는 유달리 특별한 존재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도 주말이나 방학 때는 제주를 찾아 일상을 보내고 작업을 했다. 그렇게 ‘입도’한 지 거의 20년이 됐다. 2017년 정년을 맞이해서는 아예 제주로 이주했다. 그리고 내달 초 드디어 저지리에 있는 제주현대미술관에서 반세기 가까운 자신의 작업 세계를 아우르는 개인전을 가진다.
현대미술에서 동양화, 서양화를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김보희에게 동양화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기는 한다. 굳이 따지자면 동양화를 전공한 그녀는 동양화 물감만 써서 채색하는데, 종이가 아닌 대형 캔버스 작업을 주로 한다. 제주의 자연을 닮은 싱그러운 초록을 가장 사랑하고, 바다색도 ‘애정’한다. 종이와는 다른 느낌으로 캔버스 천에 스며든 물감이 오묘한 매력을 뿜어내고 추상적인 느낌에 워낙 스케일도 있다 보니 서양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했다. “보통 캔버스는 젯소 칠이 되어 나와 미끈거리는 탓에 동양화 물감이 잘 안 묻어요. 그래서 직접 물감하고 아교, 호분 등을 섞어서 밑칠을 하죠. 그 위에 다시 동양화 물감으로 하면 잘 먹어요.” 원래는 종이도 썼는데, 워낙 큰 작품을 하다 보니 자주 울거나 찢어졌고, 아크릴 같은 재료도 써봤지만 결국 자신만의 방식을 찾았다. “(굳이 구분 지을 필요 없이) 순수 미술을 하는 거고, 평면 작업을 하는 거죠.” 그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동양화 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우리의 차별적인 강점이 될 수 있는 한국의 역사와 재료를 기초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우리 것부터 기본으로 익히고 나서 서양화든 뭐든 다른 걸 자유롭게 배우면 훨씬 더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다면 그토록 큼직큼직한 작업을 즐겨 하는 성향은 타고난 것일까? ‘원래부터 스케일이 컸냐’는 질문에 김보희 작가는 잠시 멈칫하면서 긍정의 웃음을 살짝 터뜨렸다. “(제가) 체격이나 키가 크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큰 걸 좋아해서 졸업전도 큰 작품을 했어요.” 그러자 은퇴한 뒤 매니저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며 아내를 전폭 지원해주고 있는 그녀의 부군 조경환 씨가 거들었다. “(저희가) 1975년에 결혼을 해서 15평짜리 조그만 아파트에서 시작했는데, 침실을 빼놓고 나머지 공간을 다 그림 그리는 데 쓰더라고요.” 그는 김보희 작가의 커다란 졸업 작품을 보고 반했다고 한다. 체격이 아담한 그녀는 정말로 ‘통 큰’ 스타일인지 거주 공간이 커짐에 따라 작품 사이즈도 늘려갔다. 젊은 시절 해외 근무를 하기도 했다는 그는 아내가 돈을 안 쓰고 모으는 스타일이라고 은근히 칭찬을 하면서 “그런데 나중에 50평대로 이사 가니까 아예 방 2개를 터서 화실로 썼어요”라고도 덧붙였다. 결국 그는 2003~2004년께 제주도에 커다란 작업실을 둔 집을 완공해 아내의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길이가 5m 정도인 약 45평의 제주 자택 화실에서 김보희 작가는 마음껏 대형 캔버스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빠져들었다는 제주의 푸름을 큰 화폭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냈다. 심지어 1백 호(130 x 162cm)짜리 27점을 모은 어마어마한 작업(‘The Days’)도 시도했다. 제주의 초록 숲과 여미지식물원 등에서 영감을 받아 4년에 걸쳐 그린 것이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대작 속 회화적 요소들이 매우 생생한데도 위압적이거나 소란스럽지 않다. 그림 속 자연이 작가가 친밀하게 교감하면서 탄생한 결과물인 동시에 마음속 독백이기 때문이라는, 그래서 작품 외부에 그녀 내면의 평온함과 초연함, 냉정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평론이 꽤 설득력 있게 와닿는다.
‘김보희 교수의 자연에 대한 탐구는 교육 현장을 떠나면서 더욱 집중될 것이다. 어디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기 세계로의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녀의 모교이자 긴 교직 생활을 했던 이화여자대학교의 아트 센터에서 2017년 여름에 열린 전시에서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이렇게 축복의 글을 선사했다. 그의 기대와 바람처럼 김보희 작가는 사시사철 생명력이 있고, 겨울에도 ‘초록’이 존재하는 제주로 완전히 이주하면서 작업 이력의 새 장을 써나가고 있다. 그녀가 좋아하는 야자나무를 비롯해 초록 식물로 가득한 자택의 정원에 둘러싸여, 제주와 함께하는 자신의 예술 여정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다. 묵묵히 제 갈 길을 걷던 작가에게 점점 더 많은 기회가 열렸다. 2020년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초대전 <Towards>는 싱그러운 야자수와 용설란, 비취색 바다 등으로 수놓은 김보희의 ‘낙원’을 더 많은 대중에게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지난 5월 중순 부산에서 열린 아트 페어 아트부산 2022에서도 전시장 여러 곳을 대형 작품으로 장식하는 특별전에서 가로 길이가 5m가 넘는 김보희의 회화(194 x 520cm) ‘투워즈(Towards)’(2021)를 선보였다. 지난봄 내내(4월 29일부터 6월 30일) 국립현대미술관이 강남구청, CGV와 더불어 진행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도 김보희의 작품이 낙점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은행을 통해 소장한 작품을 미술관 바깥의 다양한 플랫폼에서 소개하는 프로젝트로 서울 강남역과 신논현역 사이 760m 구간에 ‘투워즈’ 시리즈를 포함한 김보희의 회화 25점을 미디어아트로 재구성한 영상을 내보내며 ‘라이트 쇼’를 펼쳤다.
그리고 이번 여름, 이제 70대에 접어든 김보희 화백의 예술 여정에 방점을 찍을 만한 전시가 기다리고 있다. 제주 저지리의 아름다운 숲속에 자리한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오는 8월 9일부터 10월 30일까지 김보희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내년 6월엔 갤러리바톤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다).제주도에 터전을 마련한 지 20년이 된 그녀에게 이 전시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 전시를 위해 대형 캔버스 작품도 따로 제작했다. 필자가 그녀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벽면을 채운 이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작품에 등장한, 김보희 작가와 일상을 함께하는 반려견 ‘레오’의 근사한 실물도 함께 접해 더 기분 좋은 방문이었다. “제주현대미술관 전시장에 7~8m 되는 벽면이 있거든요. 그 자리를 보면서 (이 작업을) 마음먹고 한 거예요.” 작업실에서의 감상도 의미 있었지만 공간감이 확실히 다른 전시장에 걸렸을 때의 느낌은 또 다르리라. 특유의 싱그러운 녹음이 더 매력적으로 짙어질 한여름, 제주를 한번 더 찾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 같다.
2 김보희 작가의 제주 작업실이자 생활공간인 건물 외관.
3 동양화 물감과 붓 등 여러 재료와 도구가 모여 있는 김보희 작가의 작업실 내부.
4 김보희 작가의 회화 작품이 걸려 있는 제주 자택 거실.
5 국립현대미술관(MMCA) 과천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에서 선보인 김보희 작가의 작품 ‘자화상’(2020), 캔버스에 채색, 162 x 130cm, 작가 소장. 전시는 오는 9월 25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6 오는 8월 9일부터 10월 30일까지 김보희 작가의 개인전이 펼쳐질 저지리 제주현대미술관의 외관.
7 김보희, ‘Towards’(2022), Color on Canvas, 162 x 130cm 8 김보희, ‘Untitled’(2005), Color on Korean Paper, 130 x 320cm overall, 2 pieces.
7, 8 Courtesy the artist and Gallery Baton ※ 1~6 이미지 Photo by SY Ko
[ART + CULTURE ’22 Summer SPE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