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nds & Artketing series_4 아라리오(Arario)
그래도 작은 위안이 있다면, 느려진 삶의 속도에 맞춰 가끔 동네 산책길을 한가로이 거닐 때 느껴지는 맑은 공기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꽤 많은 이들이 주거지와 가까운 동선 내에서 일상을 보내면서 ‘나의 집’, ‘우리 동네’를 한층 소중하고 애틋하게 대하게 된 점도 새겨볼 만하다.
세계 곳곳의 도시들이 부르짖어온 창조적 지역 재생과 지속 가능한 성장에 집중하기에 적합한 시기가 ‘바로 지금’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우리네 아름다운 화산섬 제주에서는 원도심과 가까운 탑동의 골목 상권에 다시 활력이 감돌고 있어 눈길이 간다. 6년 전쯤 이곳에 미술관을 열면서 변화를 주도했던 아라리오의 또 다른 당찬 행보 덕분이다. 현대미술과 지역의 개성이 묻어나는 디자인을 품은 ‘아트 호텔’이 들어선 ‘아라리오 타운’에 가봤다.
제주국제공항에서 자동차로 15분 정도 소요되는 탑동의 한 골목. 빨강 바탕의 벽에 ‘Creamm’이라는 글자가 적힌 건물을 마주하고 알파벳 ‘d’가 찍힌 연회색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연신 휴대폰으로 ‘셀카’ 촬영을 하고 서로 찍어도 주는 아가씨들이 눈에 띈다. ‘크림’은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 1층에 있는 카페 이름이고, 맞은편 ‘d’가 적힌 빌딩은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아라리오의 복합 공간이다. 레스토랑과 상점, 숙박 시설 등을 아우른 디앤디파트먼트 제주 바이 아라리오(D & DEPARTMENT JEJU by Arar io). 제주에서 ‘핫한’ 카페답게 실내에도 수다 삼매경에 빠진 듯한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크림의 m자를 지나쳐 걸으면 한눈에 봐도 맵시 있게 새 단장한 건물이 하나 더 시야에 들어온다. 옥외에 드러나는 계단으로 이어진 콘크리트 건물을 사이좋게 차지하고 있는 매장은 렌털 바이크 숍 포터블(1층)과 ‘하나밖에 없는 디자인 백’을 내세우는 글로벌 업사이클링 브랜드 프라이탁(2층). 이 지점에서 아예 길 건너편을 보면 아라리오에서 운영하는 인기 빵집인 ABC 베이커리가 보인다. 이외에도 이 동네에는 수제 맥줏집 맥파이, 이자카야 미친부엌 등 맛집이 은근히 모여 있다.
사실 관광 코스로 각광받는 중문, 한림 등과는 달리 제주 원도심에서 이처럼 활기를 띠는 길거리 풍경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원도심의 북쪽에 위치한 탑동은 1990년대만 해도 해변가 지역다운 운치와 활기를 띠면서 동문시장을 비롯해 극장, 카페 등 상업 시설이 많았지만 이후 2000년대 넘어서면서 점차 기운을 잃어갔고, 꽤 오랫동안 낙후된 동네로 존속해왔다. 그러다 골목 상권이 변화를 맞이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6년 전쯤이다. 사업가이자 세계적인 현대미술 컬렉터, 작가이기도 한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이 그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다. 2014년 가을,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 동문모텔 I, 동문모텔 II 등 미술관 단지를 세우고 근처에 음식점과 카페 등을 직접 열기도 하면서 이 동네 골목 상권에 점차 활력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2017년 출간된 <골목길 자본론>에서 저자 모종린 교수는 원도심 재생을 목적으로 미술관을 연 김창일 회장을 가리켜 ‘도시 기획자’라고 불렀다(그는 천안에서 이미 고속버스터미널과 현대미술 갤러리, 백화점 등을 묶는 상업 단지를 성공적으로 만든 이력도 있다). 모종린 교수는 개인이 꾸리는 사립 미술관 차원에서 복합 문화 단지를 건축해 상업 시설을 직영하고 주변 상권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한 사례는 드물다고 강조하면서 제주의 아라리오뮤지엄이 골목 비즈니스 활성화에 필요한 유동 인구를 창출하는 ‘첫 가게’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제주의 홍대’로 부르기엔 유동 인구와 가게 밀집도가 부족하기에 ‘아라리오 프로젝트’가 완성됐다고 평가하기는 이르다고 덧붙이면서. 실제로 지난 3~4년 동안 탑동 인근은 그리 왕성하다고는 할 수 없는 시기를 겪었다. 외부 변수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미술관과 몇몇 음식점만으로는 모객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2020 여름, 아라리오의 탑동 재생 프로젝트 2막이 열리고 있다. 그동안 그저 지켜본 게 아니라 ‘지속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 고민을 거듭했고, ‘지역성’이라는 키워드를 찾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파트너들과 함께했다.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이나 뉴욕 모마, 런던 테이트 같은 사례를 보면 미술관 중심으로 사람이 모이잖아요. 하지만 탑동에서 미술관만으로 그렇게 하기는 힘들었어요. 저희가 제주도를 잘 모르고 사업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제주에서 만난 김지완 대표는 애초부터 품어온 근본적인 의도는 ‘미술을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아라리오뮤지엄을 계기로 문화 예술이 일상에 스며드는 도시 재생을 꿈꿨다는 것. 그의 말을 들으니 절로 떠오르는 해외 갤러리가 하나 있다. 스위스 출신의 부부 갤러리스트가 영국을 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장해나간 하우저 앤드 워스(Hauser & Wirth).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떠오른 ‘브랜드’로 주목받는 갤러리인데, 그 인기의 배경에는 단순히 작품만 파는 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독특한 마케팅 전략이 있다. 영국 서머싯에 위치한 하우저 앤드 워스의 더슬레이드(Durslade) 농장은 서점, 레스토랑, 호텔, 갤러리 등을 아우르는데, 연간 수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핫플’이다. 또 스코틀랜드에 파이프 암스(Fife Arms)라는 ‘아트 콘텐츠’로 버무린 빈티지 호텔도 운영 중이다. 갤러리가 대형화 추세를 띠면서 이렇듯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하고, 유통까지 아우르는 전략이 구미 지역에서는 잘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 물론 단순히 자금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화적, 지리적 환경을 고려할 때 절대로 쉽게 모방할 수는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미술은 (오랜 세월이 걸리는) 하나의 ‘문화’이자 ‘기초 체력’ 같은 거라 한 기업에서 홀로 감당하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현실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도록 하는 뭔가 특별한, 외지인만이 아니라 지역인들도 사랑하는 ‘소매(retail)’ 유통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차분하게 고민하고,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아이디어를 모색했습니다.” 그러다 지역 커뮤니티와 호흡하는 활동에 대한 가치를 추구하는 디앤디파트먼트 프로젝트(이하 ‘디앤디’)의 서울점을 2013년부터 운영해온 밀리미터 밀리그람을 만나면서 물꼬가 트였다. “갤러리와 미술관 일 때문에 출장을 자주 다닌터라 디앤디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는데, 서울점을 직접 방문해보고는 영감을 얻었지요.” ‘디앤디’는 일본의 디자이너자 한국에서도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저자이기도 한 나가오카 겐메이가 ‘재활용’과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 ‘지속성’에 기초한 ‘롱 라이프(long life) 디자인’을 키워드로 시작한 프로젝트다. 이후 지역 파트너와 함께 해당 지역의 상품 브랜딩에 초점을 맞춰 음식, 출판, 여행 등을 다루는 편집매장을 일본(도쿄·오사카·교토 등 아홉 곳), 중국(황산) , 서울(이태원) 등에 두고 있다. 그렇게 제주점이 탄생하게 됐는데, 유일하게 아라리오는 숙박 시설을 겸비한 공간을 꾸리게 됐다. 그것도 객실과 로비 등 공유 공간에 구매 가능한 미술품을 전시한 ‘갤러리 호텔’의 형태로 말이다.
아라리오가 운영하는 제주 공간은 전반적으로 디앤디의 결과 비슷하다. 본사와 제주 현지에서 공수한 ‘롱 라이프 디자인’ 상품을 접할 수 있는 매장, 구매 가능한 재활용품이나 가구가 곳곳에 눈에 띄는 공유 공간, 제주의 제철 식재료로 만든 메뉴(예컨대 5월 가오픈 기간에는 제주에서 잔칫날 먹는 돔베고기)를 제시하는 d식당 등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 펼쳐져 있다. 밝고 경쾌하지만 공간 전반적으로 배경음악이 나오지 않아 ‘고요함 속 집중’이 가능하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아무래도 ‘하이라이트’는 디앤디 프로젝트 자체에서 오랫동안 품어온 바람이기도 했다는 숙박 공간일 터다. ’d 룸’이라 불리는 객실이 13개 있는데, 규모 작은 호텔이지만 꽤 인상적이다. 따스한 감성의 인테리어도 그렇지만 녹색 식물이 곳곳에 놓여 있어 ‘힐링’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흔한 비닐봉지 대신 신문지를 접어 넣은 휴지통이라든지 맥주잔을 재활용해 만든 양치질용컵이라든지, 제주 지역의 생산업자들과 협업해 생산한 스낵이라든지, 곳곳에 눈요깃거리가 많다. 먹거리를 예로 들어 보자면 ‘김경숙 해바라기 농장’에서 만드는 육포, 제주 ‘흑돼지라면’ 을 표방하는 돗멘, 우도 땅콩 등이 그렇다.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사전에 회원을 모집해 가오픈 기간에 숙박 체험도 할 수 있었던 터라 ‘인스타그램’으로 입소문이 많이 났다. ‘회원제’라고는 하지만 진입 장벽(연간 회비 5만원)이 낮은 편이다. “저희가 해나가는 활동을 지지한다는 최소한의 표현이라고 할까요. 그런 의도에서 만든 기준입니다.” 아라리오의 디앤디 제주점이 앞으로 펼칠 중요한 활동은 지역 생산자들과의 연대다. ‘공부회’라는 방식으로 품질과 철학을 지닌 업자들을 지속적으로 찾아 협업한다는 계획이다.
또 요리든 식재료든 디자인이든 각 분야의 장인급 전문가를 초청해 단기 체류를 하면서 노하우와 철학을 나누는 프로그램 d 뉴스도 꾸려나갈 예정이다. “처음 오픈했을 때는 디앤디가 지닌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으로 만들어지지만, 그 뒤에는 운영하는 회사의 정체성과 지역성이 반영되면서 자율성이 자연스럽게 부여됩니다. 좋은 상품, 좋은 생산자를 찾고 같이 성장해나가는 게 관건이 될것 같습니다. 숨어 있는 분들이 계실 수 있잖아요.”
미술이 일상에서 살아 숨 쉬는 문화 예술 도시를 만든다는 취지로 시작해 도심 재생 프로젝트까지 당찬 도전장을 던진 아라리오의 행보. 한국인이 사랑해마지않은 제주의 원도심이 대상 지역이라는 점에서, 또 글로벌 브랜드를 추구하는 현대미술 갤러리가 성장과 확장을 꾀할 수 있는지 가늠케 하는 21세기형 브랜딩 전략이라는 차원에서도 관심있게 지켜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