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아트에 빠진 파리지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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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 2016

글 김민서

해외 미술 컬렉터들 사이에서 한국 현대미술이 재조명받는다는 소식은 이제 놀라운 뉴스는 아니다. 심지어 한때 베어브릭 수집에 열을 올렸던 몽블랑 코리아 지사장 에릭 에더(Eric Eder)처럼 우연히 한국 미술에 매료된 걸 계기로 진정성 있는 아트 컬렉터로 거듭나는 경우도 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대단한 ‘큰손’이 아닌 개인 컬렉터들이 한국 미술을 바라보는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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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낯선 이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여백이 많은 이우환 작가의 작품과 그 너머에 걸려 있는 김창열 작가의 물방울 시리즈다. 국내외에서 내로라하는 한국 대표 작가의 작품 두 점을 마주하고 나니, 이 집 안에 잠들어 있는 또 다른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올해 몽블랑 코리아의 지사장으로 취임한 에릭 에더(Eric Eder)는 자청해서 서울에 왔다. 6~7년 전에 한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의 전무로 근무하며 서울에 머문 적이 있는 그는 한국 문화에 익숙하다. 나중에 한국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K-컬처에 깊이 빠지기도 했지만, 사실 아트에 대한 기호는 ‘국적’과는 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우연히 한국 아티스트들을 좋아하게 되면서 미술 전반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국 미술을 계기로 베어브릭에서 아트 컬렉터로
어릴 때부터 마블 같은 카툰을 좋아했던 그는 베어브릭을 열심히 모았다. 2003년 일본에서 일하던 시절 마블을 모티브로 한 베어브릭을 처음 보고 구입했다. 베어브릭이 워낙 꾸준히 새 상품을 내놓는지라 그도 그 사이클에 맞추다 보니 어느덧 ‘베어브릭 컬렉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아마도 2백 개 넘게 갖고 있었을 거예요. 사이즈가 큰 건 10개 정도고요. 일본에서 살았을 때도 그렇지만 싱가포르, 홍콩으로 출장을 가거나 유럽에 머물 때도 사들였던 터라 항상 짐 가방에 베어브릭이 들어 있었죠. 인터넷으로 살 때도 있었고요.”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들이 태어난 뒤 그는 베어브릭에 예전처럼 관심을 두지 않게 됐다. 3~4년 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베어브릭을 마지막으로 수집을 중단하기로 결심하고는, 의미 있는 몇 개만 남겨두고 전부 옥션에 내놓았다. 상품 구색이 너무 다양한 데다 신제품이 빠르게 쏟아지다 보니 도저히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도 했다. 그는 한창 베어브릭을 수집하던 당시에는 무라카미 다카시와 나라 요시모토 같은 일본 작가도 좋아했다며 아들 레오의 장난감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 안에는 무라카미 다카시 쿠션부터 나라 요시모토 인형이 가득했다. 그가 미술 작품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는 배병우 작가의 사진 작품을 구입한 2008년 무렵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근무하던 그는 틈날 때마다 미술관과 갤러리를 방문했는데, 그러던 중 리움 미술관에서 배 작가의 사진을 처음 접하게 됐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나무’로 유명한 배 작가의 작품 중에서 그가 구입한 건 ‘절벽’ 사진이었다. 나중에 그가 작가를 직접 만났을 때 알게 됐는데, 사실 사진 속 절벽의 배경은 작가의 그리운 고향인 여수였다. 서울 한남동 집 2층 계단 벽에 걸어놓은 배병우 작가의 사진은 그가 처음으로 구입한 한국 작가의 작품이자 작가의 고향 사진이었던 것. 그의 집에는 배병우 작품 외에도 사진 콜라주로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원성원 작가, 현대사회에서 소비되는 여성을 표현하는 김인숙 작가, 2014년에 리움미술관에서 전시한 바 있는 일본 작가 히로시 스기모토 등 사진 작품이 몇 점 더 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에릭 에더의 K-아트 컬렉션
흥미로운 점은 그의 K-아트 컬렉션 대부분이 외국에서 처음 접하고 구입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왠지 작품들과의 인연이 그리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원성원 작가 사진은 사진 예술 축제인 ‘파리 포토’에서 첫눈에 마음을 빼앗겼고, 이우환 작가의 작품은 도쿄를 여행하다가 어느 갤러리에서 구입했다. 거실에 건 커다란 김창열 작가 작품은 한국을 떠나 파리에 있을 때 어느 갤러리에서 보고서는 왠지 한국과 연결돼 있는 느낌이 들어 샀다고 한다.
김창열 작품은 두 점 더 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 중에서 자신의 생년월일에 발행된 신문지에 물방울을 그려 넣은 그림들인데, 갤러리 오너가 갖고 있던 기존 작품을 보고 작가에게 제작을 의뢰해 구입했다. 이우환과 김창열 두 작가가 프랑스 죄드폼 국립 미술관(Galerie Nationale du Jeu de Paume)에서 초대전을 열었던 유일한 한국 작가라는 걸 보면 두 작가의 작품이 특히 프랑스 사람들에게 남다르게 다가가는 게 아닐까 싶다. “서울에 살기 전 한국은 남·북한 같은 분단 이미지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K-팝, K-드라마, K-푸드, K-아트 등 한국에도 강력한 고유문화가 있잖아요. 최근 들어 세계의 인식도 빠르게 바뀌고 있고요. 세계 유명 컬렉터들이 한국 미술을 수집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조지 넬슨의 소파, 장 푸르베 조명등, 정원에 놓은 찰스 & 레이 임스 라운지 체어 등 디자이너 가구도 눈에 띄는데, 파리에서 사용하던 해묵은 것들이라고 한다. 크기는 작지만 이 집에서 가장 고가인 앤터니 곰리(Antony Gormley)의 조각도 거실 한 자리를 차지한다. 카툰에서 망가와 팝아트, 조각, 서정적인 한국 현대미술까지, 작품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아도 관심 분야가 꽤 다양한 편이다. 아직 자신의 취향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는 그는 갤러리스트 출신인 아내 윤정미 씨의 조언에 귀 기울인다. 하지만 투자가 목적이 아닌지라 결국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작품을 택하는 편이다. 자신의 소신을 믿고 스펙트럼을 넓혀갈 에릭 에더의 한국 미술 컬렉션에 더욱 기대를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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