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loni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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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7, 2014

에디터 고성연(밀라노 현지 취재)

현대 디자인 세계에서 밀라노는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와 같은 존재감을 지닌다. 밀라노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패션 위크’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데다 소수 관계자들의 향연이 아닌 도시 전체가 후끈 달아오르는, 모두를 디자인에 물들게 하는 매혹적인 박람회인 ‘iSaloni’야말로 그 존재감의 핵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라고 불리는 세계 최대 디자인 행사로, 매년 4월이면 이 도시를 가장 상업적인 동시에 가장 창조적으로 수놓는 봄의 제전이다. 밀라노의 상인들이 한 해 수입의 절반을 4월에 거둬들인다고 할 만큼 엄청난 열기를 뿜어내는 이 디자인 축제의 현장은 어땠을까?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편집인, 그리고 작가이기도 했던 이탈리아의 지성 조 폰티(Gio Ponti)는 현대의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이탈리아다운 곳이라고 말했다. 로마나 피렌체처럼 찬란한 문화를 지녀서가 아니라 고루하거나 형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롭고 특출 난 것을 향해 전진하는 ‘현재진행형’ 도시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방법으로 해나가는 것, 그러면서도 마치 5백 년 전부터 그 일을 해온 것처럼 훌륭히 해낸다. (중략) 이것은 (이탈리아의) 전통이다!” <건축예찬>이란 조 폰티의 저서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전통에 대한 진실한 보답은 현대성을 추구해나가는 것이란 점에서 밀라노야말로 가장 이탈리아답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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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의 물결인가, 타협적 확장인가? 경계를 넘어서는 브랜드들
지구촌 최대 규모의 디자인 축제가 열린 지난 4월 초(8~13일)에 밀라노를 방문했다면 분명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불황’이라는 단어는 가구, 제품을 아우르는 디자인업계에도 짙은 그늘을 드리워왔지만 올해는 그런 그림자를 떨쳐내려는 듯 유달리 도시 전체에 활기가 넘쳤다. 자못 참신하고 실험적인 시도부터 극단적으로 상업적이면서도 호화로운 스타일까지 그 모든 요소가 꿈틀거렸다. 실제로 로 피에라(Rho Fiera) 역 근처에 자리 잡은 피에라 밀라노 박람회장을 찾은 공식 방문객 수는 지난해에 비해 13% 증가한 35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참가국 수는 1백60여 개국. 전시장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장외 전시를 일컫는 ‘푸오리 살로네’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인구가 밀라노에 흔적을 남기고 돌아간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브랜드나 디자이너라면 다 찾아오는 이처럼 방대하면서도 다채로움이 물씬 풍기는 행사를 놓고 굳이 ‘트렌드’를 논하는 건 솔직히 큰 의미가 없다. 일각에서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좀 더 실용적이고 경쾌해졌다고도 하고, 이탈리아의 풍부한 감성과 세련미 넘치는 스타일이 한결 눈에 띈다고도 하며, ‘돈의 논리’에 따라 러시아, 중국, 중동 등 경기 침체에도 별 영향 없이 지갑을 꺼내 들 수 있는 실질적인 수요처에 초점을 두는 분위기가 더 짙어졌다는 시각도 있다. 확실히 전통과 현대미, 동서양의 장점을 수용한 ‘융합적인’ 디자인이 눈에 많이 띄긴 했다. 또 에르메스, 마르니, 펜디, 보테가 베네타 등 럭셔리 패션 브랜드, 벤틀리, 푸조, 마세라티 같은 자동차 브랜드, 삼성전자, 밀레를 비롯한 가전업체가 ‘리빙 디자인’에 한층 열을 올리며 전시회에 대거 참가해 장르의 경계가 더 허물어진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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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에 대한 집중은 반짝 화두가 아닌 핵심, 대리석에 눈길
이처럼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케 하는 상황에서는 ‘근본’인 소재에 집중하고, 이를 디자인과 맞물려 제대로 작품 수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전통 강호들의 탄탄한 실력이 외려 더 부각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단지 창의적인 융합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브랜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를 얼마나 실생활에서 가치 있게 녹여내느냐의 여부일 테니까. 바로 이런 배경 때문에 최근 들어 보다 지속성 있고 견고한, ‘믿을 만한’ 소재가 끊이지 않고 조명받는 게 아닐까? 올해 전시에서는 유난히 대리석을 활용한 수작이 많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혼성 듀오’ 숄텐 & 바이징스의 대리석 테이블 ‘솔리드 패턴(Solid Patterns)’은 아마도 미학적인 완성도 면에서 가장 크게 호평받은 작품이 아닐까 싶다. 토스카나에 기반한 대리석업체인 루체 디 카라라(Luce di Carrara)의 빼어난 대리석을 소재로 한, 튀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마음을 훔치는 수작이다. 세계적인 명품 가구 브랜드 B&B이탈리아의 앙증맞은 ‘버튼 테이블(Button Tables) ’도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기분 좋을 정도로 광택이 나는 실린더형 베이스와 가장자리가 살짝 추켜올라간 매끈한 대리석 상판의 조합이 매력적인 이 귀여운 테이블은 요즘 주가가 치솟고 있는 영국의 2인조 스타 디자이너 에드워드 바버와 제이 오스거비의 작품이다. 대리석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신성 듀오인 스튜디오 포르마판타스마가 용암과 금속, 유리 등을 결합해 빚어낸 실험적인 작품 시리즈 ‘드 나투라 포실리움(De Natura Fossilium)’도 인상적이다. 팔라초 클레리치(Palazzo Clerici)에서 전시된 이 작품은 소재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이 듀오의 연구 정신과 예술성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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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적이거나 동화적이거나! 꿈을 꾸게 하는 가구들
소재 얘기를 조금 더 보태자면 패브릭의 강세는 여전했다. 탁월한 재질의 면, 리넨, 울, 벨벳 등 각종 천 소파와 의자가 활개를 쳤다. 색감으로는 파스텔 톤의 인기도 이어졌다. 묘한 느낌의 엷은 핑크 색조와 보라색 계열 등 색감이 한층 화사하고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경우가 다분히 눈에 띄었다. 올해도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디자인계의 여왕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의 손길이 닿은 B&B이탈리아의 ‘허스크(Husk)’ 시리즈가 좋은 예다. 소파 버전으로는 처음 선보인 이 작품은 한결 톡톡 튀면서도 보다 포근한 느낌을 풍겨 모던한 세련미로 잘 알려진 B&B이탈리아의 기존 분위기보다 더 친근하고 즐겁게 다가온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위스의 강자 비트라(Vitra)가 내놓은 패브릭 체어 ‘이스트 리버(East River)’도 동심을 자극하는 수작이다. 혹자는 이런 경향을 두고 ‘꿈을 디자인한다’라는 해석을 달기도 했다. 지겹도록 이어지고 있는 경기 침체에 대한 반발심의 여파일까? 일상의 가구로라도 현실을 잊게 해주는 디자인은 단지 럭셔리가 아니라 꿈이라는 시각이 담긴 것이다.
카사마니아(Casamania)의 금빛 새장처럼 생긴 LED 램프 ‘트위티(Tweetie)’나 전위적인 느낌이 강한 이탈리아 브랜드인 에드라(Edra) 특유의 도발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소재의 의자 ‘지나(Gina)’는 실제로 예쁜 동화나 환상적인 일탈을 연상케 할지도 모르겠다. 또 스페인의 카펫 브랜드인 나니 마르퀴나(Nani Marquina)의 신작 ‘라바리(Rabari)’는 런던에 거점을 둔 스튜디오인 도시 레비엔(Doshi Levien)이 공들인 작품으로 인도 유목인의 감각적이고 행복한 느낌의 자수 미학을 솜씨 있게 펼쳐냈다. 건축가를 고용하는 전통을 지닌 이탈리아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요즘 세계적으로 상승세인 조르제티(Giorgetti)의 암체어 ‘무브(Move)’는 부스에 들른 방문객들이 한번씩 앉아보려고 경쟁을 펼칠 정도로 고혹적인 자태를 지녔다. 30조각의 물푸레나무를 활용해 제작했다는 이 안락의자는 물 흐르는 듯한 프레임의 곡선미가 우아하면서도 꿈을 향한 열망을 나타내듯 은근히 역동적인 분위기를 함께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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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와 품격을 갖춘 오피스 가구와 수납의 미학
다른 한편으로는 절제된 디자인과 실용미를 내세운 오피스 가구를 비롯해 각종 수납장과 소품이 꽤 두각을 나타냈다. 폴트로나 프라우(Poltrona Frau)에서는 회의 탁자, 책상, 책장 등 대대적인 오피스 가구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깔끔하면서도 ‘디테일’의 강점이 뒷받침되어 윤택한 느낌을 자아냈다. 마지스(Magis)는 프랑스의 슈퍼스타 듀오인 로낭, 에르완 부룰렉 형제의 오피스용 테이블과 수납장을 내세워 주목받았다. 연철로 된 다리의 간결한 꼬임이 아름다운 ‘오피시나(Officina)’ 시리즈와 역시 단순미가 돋보이는 ‘테카(Theca)’ 수납장은 이들 형제의 명성에 걸맞은 완성미를 풍긴다. 사무실이 아닌 가정의 영역에서도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프리미엄 수납장들의 행보가 두드러졌다. B&B이탈리아에서는 올해 최초로 우아한 옷장(wardrobe) 시스템인 ‘백스테이지(Backstage)’를 선보였는데, 까칠한 성격만큼이나 완벽주의로 유명한 거장 안토니오 치테리오의 야심작인 만큼 기능적으로도 우월하다. 벽과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이 옷장은 문을 열면 마치 별도의 방에 들어간 듯 섹션별로 나뉜 공간이 효율적으로 펼쳐지는데, 에너지 절약형 LED 램프가 은은하게 빛을 발하며 편리성을 더해준다. 거실이든 부엌이든 사무실이든 경계 없이 어디에든 놓을 수 있는 전천후 수납장인 조르제티의 ‘타운(Town)’도 화제가 됐다. 최근 떠오르고 있는 건축가 카를로 콜롬보가 디자인한 이 작품은 월넛으로 감싼 고급스러운 캐비닛으로 와인 글라스를 넣는 찬장이나 책장, 심지어 신발장으로도 활용 가능한 다용도성이 특징인데, 넓은 공간에서는 가리개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겉에서 보면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공간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면서 되도록 속살이 보이지 않게 감춰두지만, 내실을 들여다보면 경첩 하나도 놀랍도록 부드럽게 작동할 뿐만 아니라 많은 걸 유연하게 품어내는 ‘수납의 미학’이 부각됐던 4월 초의 밀라노 현장. 이를 되짚어보노라니 절도 있는 수납 시스템처럼 세상도 아귀가 맞게 돌아갈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 잔인했던 4월의 후반부가 못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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