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Search of a Master’s Tr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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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06, 2024

글 고성연(예르 현지 취재)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영혼이 깃든 예르(Yerres) 탐방


어쩌다 보니 노르망디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보낸 시절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프랑스 작가 로제 그르니에는 세상을 뜨기 2년 전 마지막으로 남긴 책에서 ‘그러나 나의 도시는 파리’라고 강조하면서 애정 담은 회고적 에세이를 써 내려갔다. “내가 느끼기에 진짜 파리지앵은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그들에게는 파리에서 사는 것이 일종의 정복이다”라는 서두의 대목을 맞닥뜨리니 이 도시에서 예술혼을 치열히 불태웠을 수많은 이름이 스쳐 간다. 이를 테면 헤밍웨이, 피카소, 무하, 브랑쿠시 같은. 개인적으로 파리지앵의 삶을 열렬히 꿈꾼 적은 없었지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 후보로 주저없이 손꼽을 시공간 배경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의 파리이기는 하다. 파리가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위세를 떨쳤던, 그래서 후대에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로 불리게 된 시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재능과 에너지가 넘치는 이들을 그저 ‘관찰’하고 싶은 마음이 대부분이지만, 더러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인물도 있다. 예술가이자 후원자, 그리고 나눔을 실천했던 진정한 멋쟁이 파리지앵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는 후자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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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패션, 음악, 문학 등의 분야에서 놀라울 정도로 다채롭고 풍부하게 꽃피운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 이 문화 예술적 황금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시작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폭넓게는 <예술가들의 파리> 3부작에서 다뤘듯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제2제정이 몰락하고, 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로 자치 정부가 잠시 들어섰다가 새 정부 체제하에 전반적으로 파리가 ‘재건’되면서 오늘날까지도 상징적인 도시 풍경의 골격을 갖춘 시기를 그 흥미로운 움직임이 싹튼 여명기로 볼 수 있다(1871~1900). 만국박람회(월드 엑스포)를 위해 설계한 에펠탑을 비롯해 그랑 팔레, 오르세 기차역(훗날 미술관), 팔레 가르니에 등이 등장하고 다양한 인재가 모여들면서 ‘빛의 도시’ 파리는 그야말로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과감하게 전통과 단절한 젊은 화가들이 만든 ‘무명미술가협회’에서 역사적인 전시회(1874년)를 열었고, 모네의 걸작 ‘인상, 해돋이’를 빗대어 조롱한 한 비평가의 표현이 사조의 이름이 되어버린 ‘인상주의’도 이 시절의 소산이다. 물론 빛의 저편에는 극심한 불평등으로 신음하는 이들이 있었고, 점차 퇴폐와 향락이 판을 치고 세기말로 가면서는 불안과 절망에서 비롯된 냉소와 비관론이 팽배했지만 말이다(이 역시 예술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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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근교에서 즐기는 인상주의의 또 다른 성지
  파리라는 도시와는 꽤 인연이 있는 편이다. 흔히 ‘역마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만한 필자의 인생 여정에서 여행이나 출장의 목적지나 경유지로 가장 많이 들르지 않았을까 싶은 도시가 파리이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유학하던 시절, 우연히 유유자적하게 한 달 살기를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동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접하다 보니 늘 변화하는 콘텐츠 덕분에 숨가쁠 정도로 바삐 ‘발품’을 팔고 다니느라 교외 나들이는 별로 시도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가장 최근의 파리 일정에서는 근교로 반나절 여행을 떠나봤다.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의 휴식처이자 주요 작품의 배경이 되어준 저택과 정원 부지가 있는 예르(Yerres). 파리 남동쪽에 있는 교외의 작은 도시로 도심에서 자동차로 30~40분이면 갈 수 있고, 기차(RER D선)로도 멀지 않다(가르 드 리옹에서 예르까지 네 정거장). 기차역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절로 숨통이 확 틔는 넓은 부지에 시원하게 펼쳐진 정원과 더불어 여유롭게 들어선 건물들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예르의 작은 보석 ‘메종 카유보트’ 부지다.


●●  파리 태생인 카유보트는 어린 시절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예르의 저택에서 여름을 보내며 추억을 쌓았고, 실제로 이곳에서 80점 넘는 그림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녹음 짙은 숲을 배경으로 한 강둑에서 빗물이 수면 위에 떨어지며 빚어내는 동심원의 파장이 인상적인 그의 명작 ‘예르: 비의 효과’(1875)도 그중 하나다. 인상주의의 또 다른 성지인 셈이다. 여행을 떠나면 대개 절묘하게 비를 피하곤 했던 것과 달리 필자는 이날 예르에서는 비를 맞닥뜨렸는데, 어쩌면 카유보트식 첫 대면을 한 게 아닐까 생각하면(그의 ‘비’ 그림은 다 좋다) 나름의 낭만 어린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사실 필자가 ‘메종 카유보트’를 찾은 12월은 최적의 방문 시기는 아니다. 대개 봄부터 각종 기획전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정원 산책과 더불어 부지 내 레스토랑에서 소소한 미식을 즐길 수 있기에 전원풍의 여유로운 한나절을 누리고 싶다면 괜찮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겨울철에도 날 좋은 주말이면 지역 주민뿐 아니라 파리에서 찾아온 이들로 제법 붐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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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대를 열어간 화가이자 후원자, 그리고…
  겨울철이라 카유보트의 원화 작품이나 그와 관련된 다른 예술가의 기획전을 접하지는 못했지만 간만에 청초한 비 내음을 맡으며 부지 내 정원과 아담한 텃밭을 거닐다가 싱싱한 식재료로 만든 요리로 허기를 달랜 뒤 하이라이트인 저택으로 향했다. 쉬이 짐작할 수 있듯 카유보트는 상당히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자산가의 아들인 그의 부친은 판사를 지내기도 했고,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지만 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하고 파리로 돌아온 뒤에는 미술에 매진했고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렸다. 그는 경제적으로만 풍요로웠던 게 아니라 마음도 넉넉했다. 모네, 르누아르를 비롯해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당시 기준으로 후한 가격에 구입하고 전시회 비용을 대주는 등 여러모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자신도 걸출한 화가였지만 동시에 동료들의 재능을 알아본 안목 있는 후원가, 그리고 수집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부친이 두 차례나 상처하는 바람에 그는 세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이었지만 다른 형제들과 사이가 좋았고, 다 같이 문화 예술 분야의 취미를 공유했다. 그 우애와 취향의 자취를 메종 카유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구실과 뮤직 룸, 독서실 등 다채롭고 풍요로운 공간을 보노라면 19세기 부르주아 가족의 생활상이 절로 그려지는 듯하다.


●●  카유보트 집안 형제들은 가문에서 1860년부터 유지했던 예르의 저택과 부지를 귀스타브의 모친이 사망하자 1879년 처분한다.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그 뒤로 파리에서 주로 머물렀지만 워낙 조경과 원예에 관심이 많아 정원 일을 놓지 않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그는 마흔다섯 살에 프티 제네비예에 있는 자신의 정원에서 일하다가 폐울혈로 작고한다. 그는 사실 오랜 기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작품 수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기도 했고(회화 5백 점 정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생계를 위해 판매할 필요도 없었던지라 아티스트로서 평가받기보다는 후원자로 인식되는 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동생이 단명하는 아픔을 겪고 어느 정도 예감을 했는지 모네, 마네, 드가 등 인상주의 걸작을 위시한 다수의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정부가 그 가치를 간과하는 바람에 우여곡절 끝에 절반 수준인 38점만 오르세 미술관에 유증된다. 뒤늦게 다 인수하러 나섰지만 이미 마음이 상한 유족이 거절하면서 나머지 소장품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카유보트의 작업은 20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후손들이 판매를 하면서 회자됐고,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결합한 그의 진가가 점차 인정받게 됐다. 이런 배경에서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카유보트의 작품 수는 많지 않다. 하지만 기억에 또렷이 각인될 만한 주요 작품이 존재감 있게 걸려 있는데, 사실 필자가 짧은 일정 중에도 예르행을 결심한 계기는 5층 전시실에 자리한 ‘마루 깎는 사람들(The Floor Scrapers)’(1875)이라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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