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bued With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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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2, 2015

글 고성연

오묘한 쪽빛 바다와 눈이 시릴 정도로 맑은 하늘, 오염되지 않은 짙은 녹음. 일본 가가와 현에 있는 섬 일대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대자연 속에서 경탄할 만한 작품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일품인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술의 섬’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발전의 논리를 들이댐으로써 주민들의 가슴을 짓누르거나 행동에 제약을 가하지 않는 인본주의적인 공생의 방식이야말로 예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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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핵심 인재군으로 지칭되는 ‘창조 계급(creative class)’이라는 단어는 많은 이들을 들뜨게도 만들었지만 동시에 의기소침하게 만들기도 했다. 지식사회에서 창조 계급에 속하지 않으면 마치 별 쓸모가 없는 존재인 양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재와 기술, 관용을 모두 갖춘 창조 도시를 언급할 때면 으레 등장하는 ‘문화 예술의 힘’도 그렇다. 결국 문화 예술이 지닌 창조적인 힘을 살려 사회적인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는 논리는 굳이 ‘도약’의 삶을 원치 않는, 그저 소소하게 잘 살아가기만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버겁고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일본 시코쿠 가가와 현에 자리 잡은 나오시마 섬과 그 주변 섬들은 바로 그런 이들이 다수 살아가는 곳이다. 한 기업인이 30년 전 버려지다시피 한 이 일대를 재생시키고자 대대적으로 펼친 프로젝트 덕분에 나오시마는 ‘예술의 섬’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섬 주민들은 그 커다란 영예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본디 섬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섬 주민들을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가장 소중한 주체로 대하고자 하는 목적이 우선했고, 또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관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느린 걸음마다 가슴이 설레는 나오시마 섬
나오시마 섬으로 향하는 페리만 타도 벌써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쪽빛 바다를 유유히 가로질러 선착장에 도착하면 구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 먼저 손님을 맞이한다. 그리고 시선을 위로 향하면 숨 막히도록 정갈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드러난다. 맑디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녹음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이곳에는 ‘꼭 가봐야 할 미술관’만도 세 군데나 되지만 자연의 풍광에 취해 발걸음을 느릿느릿 옮기게 된다. 먼저 나오시마를 예술로 재생시킨 베네세 그룹의 이름을 딴 베네세 미술관, 돌담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이곳에는 입구에서부터 세자르와 자코메티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데이비드 호크니, 리처드 롱, 재스퍼 존스, 사이 톰블리, 도널드 저드, 브루스 나우먼…. 작가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쟁쟁한 현대미술의 수작들이 공간을 과하지 않게 채우고 있다. 건물 2층으로 연결된,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야외 정원으로 나가면 가슴이 확 트인다. 배 모양 설치물에 가운데 큰 구멍이 뚫린 신로 오타케의 작품을 통해 저 멀리 세토내해(Seto-Inland Sea)가 반짝거리면서 다가오는 듯 느껴진다.
미술관과 함께 호텔까지 들어선 베네세 미술관도 그렇지만 나오시마 섬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지추 미술관과 생존 작가의 이름을 딴 희귀한 미술관인 이우환 미술관도 모두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 이중 지추 미술관(地中美術館)은 이름 그대로 ‘지하에 있는’ 미술관으로 기하학 형태의 개구부 이외에는 건물 전체가 지하에 묻혀 있다. 클로드 모네, 제임스 터렐, 월터 드 마리아, 이렇게 단 3명의 작가 작품만 전시하는데, 오로지 그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공간 디자인이 돋보인다. 자연의 하늘빛이 곧 작품이 되는 터렐의 작품 등 자연광의 작용으로 시간에 따라 달라 보이는 작품들이 주는 감동도 대단하지만 카페에 느긋히 앉아 탁 트인 창으로 구름이 동동 떠다니는 광경만 바라봐도 평온해지는 곳이다. 이우환 미술관은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의 대지 위에 자리해 그 자체가 ‘대지미술’이라 할 정도로 자연과 동화된 분위기가 부산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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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미학을 느끼게 하는 데시마 섬

나오시마 주변에는 데시마, 이누지마, 메기지마 등의 섬이 있는데, 여기서도 예술과 함께 호흡하는 재생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내년에 열릴 예술 축제 세토우치 트리엔날레는 이 섬들을 아우르는데, 과거 축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 중 원초적인 자연미가 물씬 풍기는 데시마는 느림의 미학은 물론 ‘비움’을 갈구하는 이들에게는 최상의 여행지이자 명상지가 되지 않을까 싶은 섬이다. 그건 건축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니시자와 류에가 지은 데시마 미술관 덕분이기도 하다. 기둥 하나 없이 하얀 이글루처럼 동그란 지붕을 쓰고 있는 이 미술관 안에는 언뜻 보면 아무것도 들어서 있지 않은 듯하다. 그저 천장 일부가 뻥 뚫려 있어 한쪽에서는 창창한 하늘이, 한쪽에서는 초록색 나뭇 잎사귀가 보일 따름이다. 방문객들이 명상을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제야 바닥에 물방울들이 또르르 굴러가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바닥에서 솟아난 물방울들은 외길을 가기도 하고 서로 뭉치기도 하다가 다시 바닥으로 사라져버리는데,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어딜 가는지도 모르게 이리저리 흐르다가 사라지는 우리 인생 같네.” 빛과 바람 소리, 물방울, 공기가 함께해 자연과 하나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미술관을 떠나도 데시마의 거리와 골목은 온유하고 정겹다. 그런데 간간이 마주치는 예술 작품들은 신선한 감흥을 주기도 한다. 소박한 식당 바로 옆에서도 스위스의 유명 작가 피필로티 리스트의 퍼포먼스 영상을 발견할 수 있다(‘나는 그리 만만한 여자가 아니에요’). 나오시마와 데시마에서 전통 민가를 예술로 재단장하는 이에(家) 프로젝트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 중인데, 스타벅스는 찾을 수 없지만 선착장 근처 건물 사이를 걷다 보면 놀랄 만큼 ‘현대적인’ 카페도 맞닥뜨릴 수 있다. 현란한 줄무늬와 물방울무늬로 단장된 이 카페는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은 독일 작가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작품이다. 제목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당신을 울리기도 한다’. 재치 넘치는 작품명으로 유명한 레베르거답다. 신용카드를 받지 않지만 근사한 커피와 디저트를 내주며 배시시 웃는 이곳 주인에게는 섬 사람의 소박한 숨결이 느껴진다. 어째서 ‘섬 자체가 예술’이라는 표현이 나왔는지 알법했다. J-ROUTE 홈페이지(www.jroute.or.kr)나 페이스북(www.facebook.com/joinjroute)을 방문하면 더 생생한 일본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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