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u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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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5, 2021

글 고성연

‘최대한의 삶이 최대 선’이라는 수식어가 있을 만큼 에너지가 풍부했던 1세기 전의 ‘빛의 도시’ 파리. 그곳을 주 무대로 삼던 세기의 크리에이터 4인의 창조 혼이 담긴 빈티지 가구를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오는 5월 11일부터 서울 압구정 로데오에 문을 여는 갤러리 L.993이 마련한 개관전 <Jean Prouve´: The House | Charlotte Perriand, Pierre Jeanneret, Le Corbusier>. 사랑과 우정 어린 창조적 협업을 펼친 거장 4인의 이야기가 녹아든 작품을 선보여 컬렉터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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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전쟁의 포화만큼은 되도록 피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파리는 꼭 ‘구경’해보고 싶은 곳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 소용돌이 속에서도 낭만과 혁신으로 가득한 찬란한 시절을 일궈낸 문화 예술계의 주인공들을 엿볼 수 있다면 잠자던 세포도 깨어날 것 같아서다.1920년대로 떠났다가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도 바로 그런 상상에서 탄생했을 테고 말이다. 필자의 여행에서 마주치고 싶은 ‘등장인물’ 목록은 꽤 다채롭고 방대하지만, 그중에서도 세계 디자인 역사에 흥미로운 한 획을 그은 몇몇 거장을 빼놓는다면 몹시 애석할 듯하다. 여기에는 근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스튜디오에서 뭉쳤던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 1903~1999)과 피에르 잔느레(Pierre Jeanneret, 1896~1967) 등 3인방을 비롯해 그들과 창조적 협업을 펼쳤던 또 다른 거목 장 프루베(Jean Prouve´, 1901~1984)도 당연히 포함된다. 마침 20세기가 낳은 걸출한 이들 크리에이터 4인의 자취가 담긴 빈티지 가구 전시가 서울에서 열려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압구정 로데오에 자리한 이탤리언 브랜드 헨리 베글린 플래그십 매장에 새로 문을 연 갤러리 L.993에서 마련한 개관전 <Jean Prouve´: The House | Charlotte Perriand, Pierre Jeanneret, Le Corbu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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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또 같이, 20세기 거장들의 창조적 협업사

장 프루베, 샤를로트 페리앙, 피에르 잔느레, 르 코르뷔지에. 이들 4인의 작품을 한데 모은 전시의 미학은 ‘관계의 역학’이라는 스토리텔링에 있다. 결국 인간과 인간이 만나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빚어내는 ‘관계사’에서 비롯된 창조적 결실이 역사를 찬란하게 수놓아왔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1903년생으로 거의 1세기를 산 페리앙은 모더니즘에 매혹된 당찬 젊은 피였던 시절, 스위스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당대 최고의 모더니스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찾아갔다가 ‘여기는 쿠션에 수놓는 데가 아니다’라며 퇴짜를 맞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차린 르 코르뷔지에가 다시 일자리를 제안하면서 그의 사촌인 피에느 잔느레까지 셋이 뭉친 후 10년에 걸쳐 동행한다. 지금은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카시나에서 대부분 제작하는 이른바 ‘LC 시리즈’도 당시 셋의 협업으로 탄생한 수작이다. 그러나 페리앙은 셋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렸던 여성 크리에이터였기에 생전에는 대체로 존재감이 크지 않았고, 점차 기여도를 인정받다가 최근 들어서는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며 세계 곳곳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페리앙은 르 코르뷔지에 스튜디오를 떠난 뒤에도 그가 손을 내밀면 협업을 했고, 일본, 인도차이나반도 등 지구촌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다가 디자인·건축계의 또 다른 선구자 장 프루베와도 파트너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피에르 잔느레 역시 ‘사촌 형’의 그늘에 가려진 측면이 있지만, 섬세함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역량의 소유자다. 그는 르 코르뷔지에와 인도 찬디가르의 신도시 건설 계획을 함께 세웠고 장 프루베, 동료이자 한때 연인이기도 했던 페리앙과도 협업했으며, 실용적이면서도 미적인 완성도를 추구한 자신만의 디자인을 다수 남겼다. 피에르 잔느레와 페리앙, 장 프루베는 기능과 미를 결합시키는 철학을 추구하는 프랑스 현대 예술가 연합(The Union of Modern Artists)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따스한 손길이 깃든 하나의 집을 펼쳐놓은 듯한 공간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실용주의 디자인의 대가 장 프루베를 상징하는 작품 중 하나인 조립식 주택 ‘6X6 Demountable House(1944~1945년으로 추정)’이다. 레지스탕스로 활약하고 자신의 정신적 고향인 프랑스 낭시(Nancy)의 시장직을 잠시 맡기도 했던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집 잃은 유랑민들을 위해 설계한 이 목가적인 주택은 당시 여러 사이즈로 4백 채 정도 지어졌는데(대다수가 망가졌다), 저비용에 조립, 해체가 용이해 오늘날에도 ‘유목 건축’의 연구 자료로 활용될 만큼 가치 있는 작품이다. 지하에 자리한 전시장에서 나무 벽 틈으로 스며든 빛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무늬가 은근한 울림을 주는 이 집 안팎으로는 장 프루베의 자녀 세대가 소유했던 책상(‘Cite’)을 비롯해 ‘프루베표’ 책상, 의자, 램프 등 경매에서나 볼 법한 품목들이 존재감을 뽐낸다. 이 밖에도 페리앙이 스테프 시몽 갤러리와 아틀리에 장 프루베와 손잡고 만든 수작으로 여러 색조의 배합이 시선을 사로잡는 1950년대산 책꽂이 ‘뉘아주(Nuage)’, 르 코르뷔지에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코트 행어(‘Porte-manteau’, 1955년으로 추정), 피에느 잔느레가 인도 찬디가르 프로젝트를 하면서 지역의 티크(teak) 목재 등을 반영해 만든 의자(‘Early Edition Office Chair’)와 책장 등 빈티지 가구 애호가라면 환호할 만한 명품 가구를 실물로 볼 수 있다(전시품은 대부분 구매 가능). 또 1층에 자리한 카페를 낀 공간에서는 전시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작품들도 관람할 수 있다. 전시는 5월 11일부터 6월 11일까지. Gallery L.993(강남구 선릉로153길 22 헨리 베글린 로데오 플래그십 스토어 지하 1층). 사전 예약 필수(네이버 예약창과 전화). 문의 02-511-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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