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02, 2014
지상 최고의 디자이너들을 발굴해낸 이탈리아 마에스트로 Giulio Cappellini. 이탈리아의 지성 조 폰티(Gio Ponti)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는 점에서 밀라노를 칭송했다. 밀라노 출신인 줄리오 카펠리니는 그런 맥락에서 이 도시가 진정으로 자랑할 만한 인물이다. 자신의 이름을 단 명품 가구 브랜드 카펠리니를 이끌면서도 1970~80년대부터 탁월한 감각과 열린 마음으로 다수가 열광하는 ‘이탈리아’에 갇히지 않고 전 세계를 무대로 탁월한 재능을 발굴하고 키워낸 ‘탤런트 스카우터’이기 때문이다. 단지 회사가 고용하는 외부 디자이너와의 관계라기보다는 창조적인 파트십을 일궈내 세계적인 대가가 된 다국적 디자이너들의 ‘대부’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는 카펠리니. 밀라노에서 직접 만난 그의 세상은 여전히 참 둥근 듯했다.
1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카펠리니 쇼룸에서 만난 줄리오 카펠리니. 브랜드로서의 카펠리니는 현재 카시나 등과 함께 폴트로나 프라우 그룹에 속해 있다.
2 재스퍼 모리슨의 초기 명작 ‘싱킹 맨의 체어’의 ‘브론즈 버전’으로, 올해 선보일 예정.
3 ‘공작(Peacock)’이란 이름이 딱 어울리는 의자. 스튜디오 드로르(Studio Dror)의 2009년 작품.
4 파격적인 감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파비오 노벰브레의 테이블 ‘오르그(Org)’는 사진처럼 실제로도 견고하게 세워진다.
영국이 자랑하는 스타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과 톰 딕슨, 21세기에 가장 각광받고 있는 디자이너 듀오인 프랑스의 부룰렉 형제, 파격적인 미니멀리즘으로 디자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일본의 구루 구라마타 시로와 ‘저팬 웨이브’의 신성으로 꼽히는 디자인 그룹 넨도, 고전미와 현대적 요소를 환상적으로 엮어내는 네덜란드 출신의 마르셀 반더르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 언어로 유명한 호주 출신의 거성 마크 뉴슨. 디자인에 조금 관심을 갖고 있다면 누구나 들어본 적 있을 법한 굵직굵직한 다국적 이름들을 담은 이 명단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바로 세계 디자인계를 주름잡는 ‘미다스의 손’ 인 줄리오 카펠리니(Giulio Cappellini)라는 인물을 초기에 만나 세상에 존재감을 각인시킨 슈퍼 디자이너들이라는 점이다. ‘매의 눈’을 지닌 카펠리니가 발굴하거나 키워낸 스타 디자이너들을 일부나마 열거해놓은 이 목록에는 아직도 ‘참신한 미래의 재목’으로 채워질 빈칸이 많이 남아 있는 듯 보인다.
타고난 ‘촉’을 열정적으로 펼쳐온 ‘크리에이터들의 크리에이터’
올해 만 60세인 줄리오 카펠리니는 그 자신도 성공한 디자이너이면서도 아트 디렉터로서 국적을 가리지 않고 찾아낸 최고의 인재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아트 디렉터로 디자인계에서는 ‘크리에이터들의 대부’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라틴어로 ‘제작자(man as maker)’라는 뜻을 지닌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출현 시기를 놓고 학자들은 한 손에 물건을 쥔 채 다른 손으로 추가 작업을 할 수 있을 만큼 단단히 물건을 잡는 것이 가능한 존재가 나타난 시점으로 본다는데, 카펠리니는 이처럼 ‘지능적인 손’만 갖춘 게 아니라 ‘재능을 감지하는 눈’도 타고난 듯하다. 그는 어쩌면 그렇게 지치지도 않고 새로운 재능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색깔이 다양한 인재들을 다독이며 리더십을 발휘할까? “저는 항상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다른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는 게 결코 쉽지는 않지만 늘 흥미롭지요.” 지난해 서울에서 잠시 담소를 나눈 데 이어 지난 4월 가구박람회가 열린 주에 밀라노의 카펠리니 쇼룸에서 마주한 그는 마침 자신이 일본의 ‘떠오르는 별’로 키워낸 넨도의 리더 오키 사토(Oki Sato)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친구나 스스럼 없이 지내는 삼촌, 혹은 아버지처럼 다정해 보이는 카펠리니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처음 인연을 맺은 것도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였다. 당시 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키 사토는 신진 디자이너들의 등용문인 ‘살로네 사텔리테’에 참가했다가 카펠리니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이 만남으로 넨도는 2006년 카펠리니 브랜드와의 첫 작품인, 눈송이 모양을 모티브로 삼은 스크린 ‘유키(Yuki)’를 선보이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오키 사토는 열정이 가득하고 긍정적이며 굉장히 열린 사람이에요. 그 덕분인지 그의 작품은 다분히 실험적이고 현대적이지요.”
5 톰 딕슨을 세상에 널리 알린 ‘에스-체어(S-Chair, 1989)’.
6 범상치 않은 감성을 지닌 디자인 구루 구라마타 시로의 ‘몬드리안’ 수납장.
7 카펠리니가 최근 관심을 지니고 있는 젊은 디자이너 그룹 중 하나인 미스트오(Mist-o)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꽃병 ‘아틀란티스(Atlantis, 2014)’.
8 카펠리니 본인이 디자인한 대표 작품 ‘봉(Bong, 2004)’.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에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입힌 혁신가
이처럼 ‘열린 마음’을 지향하는 성향은 서로 닮은 것 같다. 카펠리니는 이탈리아 디자인이 맹위를 떨친 1980년에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인물이지만 창조적 지평을 넓히는 일에서는 절대로 국적 따위에 얽매이지 않았다. 타고난 ‘촉’으로 세계 곳곳에 있는 참신한 감각을 탐지하고 그 재능의 소유자를 찾아 열정적으로 구애함으로써 결국에는 ‘카펠리니표’로 소화시켰다. 그는 1946년 설립한 아버지의 사업체를 물려받은 2세 경영인이자 크리에이터였지만 원래 선친이 고수한 스타일은 숙련된 장인들 위주로 꾸려가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카펠리니의 가치관은 전혀 달랐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문화적 사고를 갖고 기능성과 표현성, 자못 이질적인 다채로운 스타일을 묘하게 조합해내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추구한 것이다. 사업 계승자로서 장인 정신에 기반한 ‘메이커의 전통’은 유지하되 확연히 다른 자기만의 색깔과 정신을 입혀, 그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자유롭고 절충주의적인’ 브랜드로 키워나간 저력은 바로 이런 토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초기에 만난 ‘각별한 인연’으로 꼽는 일본의 구라마타 시로는 카펠리니 브랜드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이종 교합’적인 개성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존재다. 1970년에 나온 ‘파격적 형태의 가구 시리즈’인 ‘프로게티 콤피우티(Progetti Compiuti) 사이드 1’ 같은 작품이 그 촉발제였다. S자 곡선으로 휜 선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 독특한 ‘물결 모양 서랍장’은 시로 본인에게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된 첫 작품이었으며, 지금도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인기 제품이다. 카펠리니는 생전 처음 도쿄에 갔다가 갤러리에서 구라마타 시로의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9 토머스 에릭슨의 귀여운 약품 수납장 ‘PO/9208B(1992)’.
10 호주 출신의 스타 디자이너 마크 뉴슨의 미래지향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펠트 체어(Felt Chair, 1993)’.
11 펑키한 분위기와 멋진 색조가 일품인 ‘멜트다운 램프(Meltdown Lamp)’. 스웨덴의 신성 요한 린드스텐이 2013년 파스텔 톤으로 처음 선보였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크리에이터들의 삶에 미친 영향은?
프랑스의 문호 마르셀 프루스트는 참으로 많은 이들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 같다. 수십 년 전 이탈리아의 거장들도 그에게서 엄청난 감동을 받아 ‘일’을 냈다. 1978년 알레산드로 멘디니라는 걸출한 크리에이터가 모더니즘에 반기를 든 작품으로 내세운 ‘프루스트 체어(Proust Chair)가 카펠리니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필자는 멘디니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는 당시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얻은 영감을 디자인으로 표현하기 위해 커다란 바로크풍의 앤티크 의자에 마치 점묘법처럼 알록달록한 점들을 흩뿌렸다고 설명했다. 포스트 모더니즘 디자인의 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 의자는 기하적인 무늬와 직물을 입힌 ‘프루스트 지오메트리카(Proust Geometrica)’ 버전(Cappellini, 2009)과 훨씬 더 저렴한 플라스틱 버전(Magis, 2011)으로도 나와 있다. 미래지향적인 조형물 같은 스타일로 강력한 팬덤을 거느린 마크 뉴슨도 잊을 수 없는 협력자다. 뉴슨은 플라스틱으로 형체를 만들고 그 위에 알루미늄 판을 덮은 미래적인 느낌의 ‘록히드 라운지(Lockheed Lounge, 1986)’로 주목받았는데, 카펠리니는 그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카펠리니는 지인들을 통해 연락이 닿은 뉴슨을 이탈리아로 초대했고, 둘이 함께 파이버 글라스, 금속, 폴리우레탄 등 다양한 재료로 갖가지 작업을 시도했다. 1993년에 나온 독특한 유선형의 파이버 글라스 소재 의자인 ‘펠트 체어(Felt Chiar)’ 같은 뉴슨의 흥미로운 작품들이 바로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도 막역한 사이인 영국의 미니멀리스트 재스퍼 모리슨의 경우는 우연히 전시를 보고는 스튜디오로 찾아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또 하나의 명작 ‘싱킹 맨의 체어(Thinking Man’s Chair, 1998)’. 팔걸이에 작은 트레이가 부착돼 있어 음료수가 담긴 컵을 놓아두고 제품명처럼 ‘생각에 오롯이 잠기는 데’ 유용할 듯한 이 정감 가는 의자는 올해 브론즈(bronze) 버전으로 한정 판매될 예정이다.
12 카펠리니가 아트 디렉터로 합류한 제일모직의 명품 가방 브랜드 콜롬보(Colombo)가 일본 디자인 그룹 넨도와 올봄 선보인 한정판 ‘포켓(Pocket) 컬렉션’.
13 넨도를 이끄는 디자이너 오키 사토는 가방과 핸들의 관계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캔버스 천과 악어가죽을 소재로 동일한 사이즈지만 디자인은 각각 다른 8개의 백을 만들어냈다. 역시 한정판.
한국과의 인연으로 패션에도 도전하다
이처럼 많은 인연을 만나 세계적인 아트 디렉터로 발돋움한 카펠리니는 지치지도 않는지 창조 반경을 더 넓히고 있다. 그는 최근 제일모직이 인수한 이탈리아 명품 악어 백 브랜드 콜롬보(Colombo)의 아트 디렉터로 활약하면서 ‘패션 액세서리’에도 도전장을 내밀며 한국과도 인연을 맺게 됐다. 물론 자신의 풍부한 관계망 속 ‘다국적 인재’를 동원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디자인 그룹 넨도의 오키 사토가 그 첫 주자다. 카펠리니는 “핸드백 자체는 새로운 분야지만 콜롬보와 같은 이탈리아 전통 강호와의 작업이라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최근 디자인계에서도 서로 다른 분야 간에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화두이며, 결국 디자인은 하나로 통한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특히 자신의 고향인 밀라노에서 탄생한 브랜드인 콜롬보인지라 애정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제 어머니도 그러셨고, 아내도 콜롬보 백을 갖고 있기에 친숙한 브랜드지요. 대량생산이 아닌 섬세한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가치 있는 전통을 계승해온 콜롬보가 고유의 DNA를 잃지 않으면서도 젊은 감각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콜롬보-넨도의 첫 컬래버레이션 시리즈에 대해 그는 만족했을까? 실험적인 기지가 돋보이는 넨도의 첫 작품인 ‘포켓(Pocket) 컬렉션’은 포켓과 백의 기존 관계를 반전시켜 마치 커다란 포켓 안에 또 하나의 가방이 들어 있는 듯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가방과 짝을 이룬 선글라스 케이스, 미니 백, 휴대폰 케이스와 키홀더가 앙증맞다. 카펠리니 못지않게 열정이 넘치는 넨도는 가방과 핸들의 기초적인 관계를 연구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를 엮어낸 ‘8 백스(8 Bags)’를 자진해서 디자인했다. 콜롬보의 상징인 악어가죽을 최상급 캔버스 소재와 간결하면서도 세련되게 조합한 이 시리즈는 카펠리니의 마음에도 꼭 들었던 것 같다. 한정판으로 나온 ?8 백스’ 시리즈를 판매 포트폴리오에 올려두면 어떻겠냐는 필자의 제안에 그는 “안 그래도 생산을 진행하도록 강요해볼 생각”이라며 웃었다. 카펠리니가 지휘자로 나선 콜롬보의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를 이끌 다음 타자는 역시 그가 몹시도 아끼는 네덜란드의 스타 디자이너 마르셀 반더르스가 될 듯하다. 노끈을 얼기설기 묶어놓은 듯한 모양새지만 열 경화성 수지를 흡수한 끈이라 100kg이 넘는 하중을 견딜 수 있는 ‘매듭 의자(Knotted Chair, 1996)’를 카펠리니와 함께 데뷔작으로 선보여 바로 스타덤에 오른 반더르스는 현재 ‘모오이(Mooi)’라는 브랜드를 이끄는 동시에 내로라하는 기업들과 협업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특징인 넨도와는 달리 섬세하고 화려한 아르데코풍을 연상케 하는 감각적인 디자인 언어를 구사하는 반더르스는 과연 어떤 작품을 창조해낼지 살짝 궁금해진다.
노장은 아직도 꿈을 꾼다, 설렘을 담은 눈빛
대체 자신의 작업에 몰두할 시간이 있는지 걱정될 정도로 바쁜 그는 전 세계를 누비면서도 여전히 ‘새로움’에 목말라 있는 듯하다(눈여겨보고 있는 한국 디자이너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 노장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꿈’을 언급했다. 세계를 무대로 수집한 이미지로 가득 찬, 그래서 언어의 장벽을 굳이 느낄 필요가 없는 아름다운 책을 엮어내는 것이란다. ‘디자인의 사해동포주의’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풍부한 다문화적 바탕에 카펠리니라는 브랜드가 지닌 특유의 정교함과 실험 정신을 부단히 투영시켜온 그다운 꿈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