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Berliners, 도시 재생의 길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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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 2017

에디터 고성연

13세기 상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가 점차 군사적 요충지로도 부각한 도시, 히틀러의 광기 어린 악행의 희생양이자 참사의 현장이 됐던 곳. 그리고 처참히 동서로 분열됐다가 지금은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창조적 영혼을 지닌 이들이 가장 머무르고 싶어 하는 핫 스폿. 베를린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왔다. 그저 통일 독일의 수도에 걸맞은 위상을 되찾으려는 정부 차원의 노력보다는 주민과 지역 커뮤니티, 그리고 많은 창의적 인력의 만남, 충돌, 자연스러운 융화에 힘입어 이색적인, 무엇보다 참으로 매력적인 크리에이티브 허브가 된 베를린은 도시 재생의 선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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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도시 베를린에서도 활기 넘치는 지역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그렇다고 떠들썩하지만은 않다. 녹음의 청신함이 물씬 풍기는 숲을 낀 공원도 곳곳에 있는데, 그중 한 작은 공원을 지나 정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알렉산드리넨 거리(Alexandrinen Straße)에 진입하면 범상치 않은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과 맞닥뜨리게 된다. 상층부의 하얀색 타워를 제외하고는 연한 갈색을 띠는 이 건축물 위에는 진노란색 불꽃을 연상시키는 작품이 자리해 시선을 절로 잡아끈다. 이곳은 현대미술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른 베를린에서도 명성 높은 쾨니히 갤러리(Ko··nig Galerie)에서 2년 전 새로 마련한 전시 공간. 근사한 조각 작품들이 자태를 뽐내는 아담한 정원과 카페, 사무실 등이 함께 위치한다. 쾨니히 갤러리를 찾아간 날, 마침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이자 개관전 주인공이기도 한 카타리나 그로세(Katharina Grosse)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발길을 들여놓자마자 왠지 모르게 차분해졌다. 투박한 외벽의 느낌과는 다르게 빛이 부드럽게 공간 내부를 감싸는 전시장은 고아한 미를 머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짝 숭고한 느낌마저 준다. 사실 이곳은 유서 깊은 성 아그네스(St. Agnes) 교회가 있던 자리였는데,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던 건물이 갤러리 주인인 요한 쾨니히(Johann Ko··nig)의 노력으로 아름다운 공간으로 거듭났다. 그렇다고 건축물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식으로 역사적인 흔적을 없애지는 않았다. 가공하지 않은 재료를 활용한 차갑고 거친 건축 조형 미학을 특색으로 하는 브루탈리즘(Brutalism)이 여전히 외관에서 묻어나되 내부는 밝아지고 온화해졌다. 최고의 현대미술 작품을 품기에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아픔을 승화시킨 ‘도시 재생’의 멋진 예

쾨니히 갤러리 프로젝트는 재생 건축의 썩 괜찮은 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베를린에서는 그다지 희귀한 사례가 아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 자체가 ‘재생’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베를린 중앙역 근처에 자리한 함부르크 반호프(Hamburger Bahnhof)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기차역을 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한 예이고, 수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먼 곳에서도 일부러 찾는 미술관 잠룽 보로스(Sammlung Boros) 역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 공습을 피하기 위해 만든 도시의 유일한 지상 벙커였다(그래서 지금도 ‘벙커’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또 참혹한 동서독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둘러싼 가슴 저린 상흔조차 캔버스로 활용한다. 1.3km 길이의 벽을 세계 곳곳의 아티스트들이 저마다의 그림과 그래피티로 채운 도시의 또 다른 명물 ‘이스트사이드 갤러리(Eastside Gallery)’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공간들이야말로 한때 전쟁과 분단의 비극으로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고 불릴 정도로 처참히 무너진, 그래서 우울함과 패배 의식으로 점철된 도시를 되살린 재생의 표징인 셈이다. 베를린은 런던, 파리, 뉴욕 등 지구촌 어느 도시와 견줘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생기 넘치는 창조 도시로 손꼽힌다. 모 언론 보도에 따르면 3백50만 정도인 베를린 인구의 10% 이상이 아티스트, 건축가, 디자이너, 음악가, 게임 개발자, 영화 제작자 등 창의 산업 분야 종사자이며, 이들이 이 도시의 경제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분의 1이 넘는다고 한다. 이른바 ‘창조 계급(creative class)’으로 불리는 일꾼들이 이끌어가는 도시인 셈이다. 유럽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인재가 모여드는 건 당연지사. 최근 5년 사이 베를린에 생겨난 문화 예술 관련 일자리만 12만 개라고 하니, 도시의 포용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인구 성장세도 두드러진다. 최근 베를린 시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오는 2030년에 도시 인구가 3백8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인기 있는 도시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이는 불과 10년 전에 내놓은 예측치(3백47만 명)와는 현저히 다른 양상이다.

인재, 기술, 관용의 토대 위에서 자라나는 다양성과 역동성

창조 도시 이론의 대가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는 그가 생각하는 창조 계급이 융성하는 도시를 위해서는 3개의 ‘t’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기술(technology), 인재(talent), 관용(tolerance)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인재’는 단순히 그 사회의 우수한 교육 인프라에서 양성되는 뛰어난 인력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바깥세상의 다채로운 개성과 장점을 갖춘 인재가 유입되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혼종의 시대’에 걸맞은 인적 환경은 서로 다른 시각이 부딪치고 어우러지는 ‘우연한 충돌’의 작용으로 창조성을 꽃피우는, 다양성이라는 요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인재가 모이게 하려면 사회 차원의 관용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이다. 지금 베를린에서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제대로 빛을 발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일각에서는 독일과 일본 같은 나라들이 창조 도시를 키워나가는 데 있어 다양성 면에서 뒤처진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적어도 베를린은 그 반대편에 있는 좋은 예일 것이다. “낮은 진입 장벽 덕에 많은 소매상, 기술 기반의 스타트업, 보다 최근에는 레스토랑 경영자들이 혜택을 입었다.”(<모노클(Monocle)>에서 발간한 단행본 <베를린> 중에서). 이 도시의 포용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베를린 시내에 있는 폭스바겐 그룹의 한 전시장 풍경만 봐도 그런 면모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시야에 들어온 이곳은 언뜻 봐도 평범한 자동차 쇼룸 같지는 않았다. SF 영화에서 나올법한 미래적인 디자인의 공간에 용도를 가늠하기 힘든 첨단 장치들이 세팅돼 있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몸이나 얼굴을 동원해가면서 뭔가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 <Ars Electronica>라는 전시였는데, 특히 수백 개 펭귄 인형 앞에서 관객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흥에 겨운 역동적인 모습에 절로 시선이 꽂혔다. 알고 보니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모은 ‘펭귄 미러(Penguins Mirror)’라는 작품. 센서를 장착한 인형을 바라보면서 동작을 취하면 펭귄들이 이에 즉각 반응하면서 양방향으로 연신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귀여운 군무를 보는 듯했다. 이렇듯 관람객들이 첨단 시스템에 몸소 참여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체험으로 호응을 자아낸 이 전시에 참가한 디자이너들의 프로필을 보면 미국, 영국, 한국, 일본, 아르헨티나 등 꽤나 다국적이다. 서로 작품의 작동 메커니즘을 알려주고 체험 현장을 지켜보면서 웃음보를 터뜨리는 관객들 역시 외모만으로도 다채로운 지구촌 식구의 면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비극의 아이콘에서 선망의 핫 스폿으로 거듭난 배경의 또 다른 주인공

인구에 비해 면적이 적지 않은 데다(891.85㎢) 창조 도시로 쑥쑥 성장해가는 도시여서일까. 독일의 수도다운 첨단과 전통, 역동성, 인프라가 다 존재하면서도 (적어도 아직까지는) 여유로움과 관대함이 묻어나는 이곳에서는 어느덧 뉴요커, 파리지엔에 못지않은 자부심이 투영된 ‘베를리너(Berliner)’라는 단어가 자주 들린다. 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전쟁과 냉전 시대의 아픔을 가장 많이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징적인 도시가 바로 베를린이 아니던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분할 통치 체제를 맞이하면서 자유주의 진영이 차지한 서독의 수도 서베를린, 공산주의 진영이 차지한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으로 갈라져야 했던 기구한 운명이 그 유명한 베를린 장벽을 탄생시켰다. 1989년,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통일을 일궈냈지만, 베를린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부활의 길로 접어들었다. 유럽 여느 대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와 임대료 덕분에 젊은이들, 특히 힙스터, 미술가, 건축가 등 문화 예술 분야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이 배경에는 아마 한 도시의 시장으로는 뉴욕 시장 부럽지 않게 대중적인 인기와 유명세를 누린 인물인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가 있다. 2001년 40대 후반의 나이로 시장에 당선된 보베라이트는 동성애자임을 당당하게 밝힌 세련된 언변과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로, 베를린을 ‘가난하지만 섹시한(poor but sexy)’ 도시로 묘사하면서 유럽에서 젊은이들과 예술인이 가장 선망하는 핫 스폿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 일조했다. 관광 인프라를 키우고 일자리 늘리기를 추진하면서 한때 메르켈 총리의 대항마로도 주목받았지만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신 국제공항 건설이 꼬이면서 정치 노선에 비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결국 2014년에 조기 사임했다.

강제 복원이 아니라 참여적, 창의적인 재생의 매력

보베라이트 시장의 중도 하차에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기도 했다. 언론에서 신임 시장인 미하엘 뮐러(Michael Mu··ller)를 두고 ‘덜 매력적인(less glamorous)’라는 표현을 대놓고 쓰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뮐러 시장이 대중적인 인기가 덜하다 해도 베를린의 성장 엔진은 여전히 기운차게 돌아가고 있다. 물론 베를린이라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집세가 고공 행진을 하면서 인기 있는 미테 지역이나 크로이츠베르크에 살던 이들이 변두리 지역으로 이동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고, 지금도 주거난이 이슈가 되고 있다. 이주자가 많아지면서 노동자 인권, 임금 차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베를린에 흐르는 창조적인 에너지와 패기, 관대함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여러모로 비싸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보데, 페르가몬, 알테스 등 박물관과 미술관이 몰려 있는 ‘박물관 섬(Museumsinsel)’을 다 돌아볼 수 있는 입장권이 18유로인 점을 감안하면(물론 문화 부흥과 관광 진흥을 위한 정책 차원의 가격이기는 하지만) 뉴욕, 런던, 파리, 베니스의 살 떨리는 물가 수준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연 많은 도시의 부활이 많은 이들의 선망을 받는 이유는 그 과정이 단순한 정부가 주도한 복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 창업가, 아티스트가 자연스럽게 뭉치고 의기투합해 협업을 꾀하는 공동체적인 힘에 이끌린 면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베를린에는 ‘도시 안에 여러 도시가 있다’는 표현이 있을 만큼 저마다의 개성이 묻어 있는 서브컬처가 꿈틀거리는 지역이 많은데, 아마도 자생적인 부활, 자유롭고 다채로운 영감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파란만장한 역경을 딛고 유럽의 핫 스폿으로 거듭난 베를린. 이제는 ‘가난하지만 섹시한’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지만 ‘부유해졌어도 여전히 매력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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