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bulae Natur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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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3, 2015

에디터 고성연(밀라노 현지 취재)

밀라노에서 엑스포처럼 굵직한 행사가 개최될 때는 도시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전시장 바깥에서 벌이는 장외 열전이 더 흥미로울 수도 있기 때문.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가 2015년 밀라노 엑스포를 기념해 선보인 ‘자연 이야기’는 바로 ‘장외(fuori) 엑스포’를 대표할 만한 영감 충만한 프로젝트다. 자연과 음악, 음식, 예술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독특한 향연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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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고전적 사례의 족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발전한 최초의 현대 예술이다.” 뉴욕 출신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애덤 고프닉의 말이다. ‘일상의 식탁’을 굳이 예술을 들먹이며 설명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요리라는 영역이 자연에서 영감을 받고,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혁신을 거듭하는 창의적인 속성을 지닌 것만은 분명하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2015년 밀라노 엑스포의 주요 테마 중 ‘아트와 푸드(arts & foods)’가 포함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라틴어로 ‘자연 이야기(fabulae naturae)’라는 뜻을 지닌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아트 프로젝트는 그 이름처럼 생명과 에너지의 근원인 자연의 요소에 초점을 맞췄다. 자연애를 바탕으로 지구의 미래를 둘러싼 함의를 무대, 음악, 그림, 요리의 앙상블을 통해 다각적으로 담아낸 제냐의 창의적인 향연은 “새로운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해나간다”는 이탈리아의 지성 조 폰티(Gio Ponti)가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의 영감이 빚어낸 아트 퍼포먼스, 현실과 상상의 매혹적인 경계

지난 5월 2일, 밀라노 도심에 위치한 한 건물. 여기저기 시원하게 벽면을 덮은 커다란 유리창들을 아름다운 색조를 띤 꽃이 온통 도배하다시피 장식하고 있다. 건물 안팎에 자리 잡은 청신한 나무와 어우러진 느낌이 상쾌하다. 바닥에는 은색의 얇은 금속판이 깔려 있는데, 나뭇가지가 뻗어나간 모양새를 닮았다. 군데군데 다양한 꽃 패턴을 정교하게 새긴 도자기 접시가 벽에 걸려 있기도 하다. 마치 도심 속의 숲을 연상시키는 이곳은 원래 에르메네질도 제냐 본사 건물이지만 이날만큼은 융합적인 아트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무대로 변신했다. 이 공간 자체가 제냐가 밀라노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트리베로에 조성한 생태 공원 오아시 제냐(Oasi Zegna)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라 할 만했다. 비범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꽃 벽화의 주인공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산업 디자인의 거장 안토리오 치테리오이고, 섬세한 드로잉과 색채가 돋보이는 ‘꽃 접시’의 주인공은 자연과 음식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로 잘 알려진 아티스트 듀오 루시 + 호르헤 오르타(Lucy + Jorge Orta). 특히 이 듀오는 예술과 영양, 개인의 의식과도 같은 만찬을 다루는 ‘70X7 The Meal’이라는 행위 예술로도 유명한데, 이날 밤은 야생동물을 소재로 한 독특한 퍼포먼스를 선보여 게스트 수백 명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펠트 소재의 갈색 수트를 입고 동물 모양 가면을 쓴 남자들이 계단을 내려오는 퍼포먼스는 배경음악인 플루트 연주곡과 상당히 묘한 조화를 이뤘다. 19세기 중반 오아시 제냐에서 발견된 ‘카라부스(Carabus)’라는 희귀종 딱정벌레를 본뜬 가면이다. 자연에서 받은 영감으로 빚어내는 문명의 혜택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는 뜻에서 붙은 ‘야생동물의 부재에 대한 교향곡’이라는 제목은 미소를 절로 자아낼 정도로 재치 만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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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문화의 본질을 일깨우는 스타 셰프 다비데 올다니의 푸드 퍼포먼스

오라가 남다른 아트·뮤직 퍼포먼스가 끝나도 밤의 향연은 오래도록 역동감을 유지했다. 밀라노가 사랑해 마지않는 스타 셰프 다비데 올다니(Davide Oldani)를 비롯한 요리사들의 신나는 푸드 퍼포먼스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올다니는 이탈리아에서 수개월 전에 예약해야 자리를 구할 수 있는 인기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 인물. 이날 만찬으로 자신의 주특기인 리소토를 직접 만들어 게스트들에게 대접했다. 요리법도 간단하고 흰쌀에 사프란 소스를 뿌린, 모양새도 단순한 리소토지만 짭짤하면서도 상큼한 맛의 조화가 꽤 근사했는데, 그 안에 담긴 음식 철학이 무엇보다 신선했다. “저는 레시피(recipe)가 아니라 식재료의 맛을 끌어내는 것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별로 재료를 많이 넣지 않아요. 물과 쌀을 주로 하고, 단순하게 소스만 살짝 섞으면 끝납니다. 리소토에 버터나 향신료를 담뿍 넣기도 하는 이탈리아 가정의 요리법하고는 다르죠.” 그의 설명에 따르면 농부들이 땀 흘려 수확한 작물의 진정한 맛과 의미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란다. 올다니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성장을 하고 있는 ‘이탈리아 식문화’의 단면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듯하다. 제철 식재료를 잘 활용하면 누구나 쉽게 즐겁고 건강한 식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이탈리아 요리의 ‘기초’ 중심주의가 21세기 지구촌의 식탁에서 굉장한 설득력을 얻고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제냐의 창조적 DNA는 본질을 고민하고 그 사유의 결과물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기초의 힘’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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