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03, 2025
어린 시절 우리에게 책으로 만든 ‘비밀 기지’가 있었던 것처럼 작가들에게도 자신의 서사가 담긴 아지트 속 이야기가 있다.
<읽는 인간>의 저자 오에 겐자부로는 평생의 보물 같은 책들을 회고했는데, 그는 책들과 삶을 함께해왔다고 말했다. 그런 소중한 책들처럼 곁에 두고 싶은 ‘another 예술’이 있다. ‘키아프리즈’ 기간에 열리는 현대미술가들의 비밀 기지 같은 전시가 예술 애호가들을 기다리고 있다.
<읽는 인간>의 저자 오에 겐자부로는 평생의 보물 같은 책들을 회고했는데, 그는 책들과 삶을 함께해왔다고 말했다. 그런 소중한 책들처럼 곁에 두고 싶은 ‘another 예술’이 있다. ‘키아프리즈’ 기간에 열리는 현대미술가들의 비밀 기지 같은 전시가 예술 애호가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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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불안을 표현한 배윤환 작가의 전시 모습(2025).
이미지 제공 스페이스K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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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K 서울, 배윤환 개인전 <딥다이버(Deep Diver)>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전 좌석 안전벨트’는 계엄 상황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예요. 작업에 변화를 주고 싶던 때였는데, 계엄 상황 당시의 어지러움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시대는 재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상한 지점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재난에 저도 한몫하고 있겠죠.” 아직도 소년처럼 보이는 배윤환 작가(b. 1983)는 개인전 <딥다이버(Deep Diver)>에서 원래 그가 추구했던 본질적인 작업으로 돌아왔다. 다채색을 배제한 ‘검은’ 서사로 말이다. 그에게 검은색이란 본인의 생각을 빠르게 전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색이라고. 검은색 아크릴, 목탄 등 전시장에 설치된 그의 작품들은 바닷속 까만 심연 같다. 그 안에서 저마다 다양한 인간 군상과 동물이 섞여 세상을 향해 소리치며 얽혀 있다. 의인화된 동물과 사람이 함께 배에 올라타 파도를 맞고 있고 선원들이 오징어 먹물로 온통 뒤덮여 있다. 수많은 사건이 펼쳐지는 드라마틱한 세계에서 각자의 폭풍우에 휘말려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흥미롭다. 각자의 불안과 저항을 표현했는데, 특히 광부나 어부, 양봉업자 등 노동자가 많이 등장한다. “이 사람들이 끊임없이 세상과 마찰을 일으키는 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대신해 시대의 불안과 저항을 표현하는 작가는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영감받은 ‘서커스’ 연작도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였다. 바다 한가운데 온몸에 석탄이 묻어 있는 사람들이 한쪽에서 카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묘사한 작품 ‘우린 잘 지내고 있어’는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것 같다. 작가가 직접 조각한 인형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작업도 눈길을 끈다.
전시명 <딥다이버(Deep Diver)>
전시 기간 11월 9일까지
홈페이지 www.space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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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승철 개인전 <프로토타입> 설치 모습, 롯데뮤지엄(2025).
이미지 제공 롯데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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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뮤지엄, 옥승철 개인전 <옥승철: 프로토타입(Prototype)>
반복되고 복제되는 얼굴은 가짜일까? 디지털 세상에서 진짜는 누구일까? 혹시 당신도 무한히 복제된 자아를 지닌 건 아닌가? 이 물음을 지속적으로 던져온 옥승철 작가(b. 1988년)는 텅 빈 눈에 표정 없는 얼굴을 고집스럽게 사랑한다. 진위를 알 수 없는 똑같은 얼굴들이 3D 조각과 회화로 펼쳐지는데, 작가에게는 그저 ‘프로토타입-1’, ‘프로토타입-2’일 뿐이다. 인물을 추출하고 레이어로 분리하는 디지털 작업 과정을 정교한 회화로 되살린 프로토타입은 완전한 소년도, 소녀도 아니다. 그래서 오리지낼리티를 부여받기 힘든 존재 같지만, 이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더 솔직하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스스로 ‘복제된 존재’라고 인정하기에 오히려 순수하달까. 사실 우리도 원본 없는 복제의 무한 증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전시 공간은 소프트웨어 유통 방식인 ‘ESD(Electronic Software Distribution)’를 모델로 설계해 마치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차가운 가상공간으로 들어온 듯 연출했다. 만화나 영화, 게임 등에서 복제되고 변주되는 디지털 이미지가 주인공이기에 진지한 예술로 생각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그의 손을 하나 하나 거친 ‘프로토타입’의 얼굴은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는 존재다. 특히 3D로 만든 조각은 아프로디테의 목이 잘린 것처럼 거꾸로 툭 떨궈져 있는데, 그리스 신전 어느 공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작가는 메두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옥승철은 꾸준한 팬덤을 지닌 작가이기도 한데, 최근 <나의 충동구매 연대기>를 낸 영화평론가 김도훈의 가장 소중한 컬렉션 1위도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색상의 하나인 ‘크로마키 그린’ 색의 프로토타입 조각이다.
전시명 <옥승철: 프로토타입(Prototype)>
전시 기간 10월 26일까지
홈페이지 www.lottemuse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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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우 작가의 파편화된 신체와 인공 구조가 뒤섞인 작품(2025).
이미지 제공 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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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준 작가의 사운드스케이프 작업(2025).
Photo by SY Ko |
#송은, 한국 작가 그룹전 <파노라마>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한국작가 해외집중 프로모션’ 사업의 일환으로 송은과 함께 기획한 <파노라마>전은 동시대 한국 작가들의 다양한 비밀 기지를 엿보는 느낌을 선사한다. 권병준, 김민애, 박민하, 이끼바위쿠르르, 이주요, 최고은, 한선우, 아프로아시아 컬렉티브(최원준, 문선아) 등 8팀이 참여해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풀어냈다. 네델란드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2011년 귀국해 음악, 연극, 미술을 넘나들며 ‘소리’에 기반한 뉴미디어 퍼포먼스를 기획·연출하는 권병준 작가의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은 지하 전시장을 가장 압도적으로 수놓고 있다. 헤드폰을 착용한 채 작가가 채집한 다양한 소리를 전시장 곳곳을 옮겨 다니며 들을 수 있는데, 아이의 말, 자연에서 온 소리, 이방인의 대화 등이 세계 여행을 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소리의 편집만으로 시각적 현실의 이미지가 바뀌는 걸 경험할 수 있다. 설치, 사진, 영상 등을 아우르는 이끼바위쿠르르의 ‘미륵’ 시리즈는 존재에 대한 사유로 이끈다. 미륵의 손바닥을 조각한 ‘부처님의 하이파이브’는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미륵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는 것 같다. 사라진 사찰이나 마을 어귀와 들판에서 방치된 채 그저 돌로 존재하는 미륵들은 사진 작업에서 다시 한번 존재를 환기시킨다. 버려졌기에 자유로워진 미륵들은 우리에게 ‘버려지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한다. 디지털 도구와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혼용하며 작품을 제작하는 한선우 작가는 모공을 연상시키는 살점, 가닥진 머리카락 등 파편화된 신체와 인공 구조가 뒤섞인 초현실적 이미지 구성으로 자동화된 가사 노동에 대한 환상을 얘기한다. 아프로아시아 컬렉티브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청소년간의 교류를 상상하며 작품을 위한 ‘걸 그룹’을 만들기도 했는데, 어쩐지 마음이 짠해진다. 글 김수진(프리랜스 에디터)
전시명 <PANORAMA>
전시 기간 10월 16일까지
홈페이지 www.songeunartspa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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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브래드포드 전시 모습(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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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마크 브래드포드 대규모 회고전
30대에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뒤늦게 미술계에 입문한 마크 브래드포드(b. 1961)는 2021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작가다. 흑인, 퀴어, 도시 하층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작품에 녹인 대형 작품에는 그의 서사가 빼곡히 담겨 있다. 모친의 미용실에서 사용하던 반투명 파마 용지(end papers)를 작품의 주재료로 사용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이나 신문지 등을 쌓고 긁어내고 찢어낸다. 그래서 그의 여정과 역사가 반영되는 추상미술은 ‘사회적 추상화’로 불리기도 한다. “사람들은 ‘사회적 추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사회적 기억의 추상’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회적 역사를 언제나 유지하고 미술사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스튜디오 안으로 가져와 문을 걸어 잠그고 미술사와 한바탕 싸우며 작업한다. 모두 자신의 몸과 기억에서 온 것들이다. 사회적 불균형 속에서 ‘그저 나 자신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는 사실 억지로 평등을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냥 제 회화와 그걸 둘러싼 생각을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갔을 뿐이죠. 추상은 저에게 그럴 수 있는 공간을 주었어요. 애써 정면으로 말하지 않아도, 옆길로 비껴서 말할 수 있는 공간 말이죠.” 그 공간에 관람객이 자연스레 걸어 들어왔으면 하는 그의 바람은 전시의 서막을 여는 작품 ‘떠오르다’에 담겨 있다. L. A 작업실 주변 거리에서 수집한 부산물을 긴 띠 형태로 만들어 전시장 바닥 전체를 덮는 회화적 설치물은 관람객들에게 마음껏 거닐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의 서사는 이제 자연재해, 기후 위기, 젠트리피케이션, 자본 권력의 구조를 향하고 있다. 대다수 작품이 대형인 만큼 각각의 스토리도 진실을 밝히는 진중한 다큐멘터리 같다. 20여 년에 걸친 그의 작업 세계를 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독일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이 주최한 순회전의 일환이다.
전시명 <Mark Bradford: Keep Walking>
전시 기간 10월 26일까지
홈페이지 apma.amorepacif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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