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02, 2025
글 김수진(객원 에디터)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역사적 공간에 실제로 서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거나 기억의 불완전한 틈새가 메워지는 순간이 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사건의 틈, 회복을 꿈꾸는 자연의 작은 소리까지 담은 작가들의 전시를 소개한다. 최재은, 김아영, 이형구 등 지금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문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작가의 작품이야말로 이 봄에 꼭 경험해야 할 ‘슬기롭고도 영화로운 순간’이 아닐까.
알 마터 주택단지에 담긴 ‘세계의 모든 것’
#김아영 <Plot, Blop, Plop>
#김아영 <Plot, Blop, Plop>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 진화하며 현대미술의 지평이 더 넓어지고 있는 요즘,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시각예술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b. 1979)의 개인전 <플롯, 블롭, 플롭(Plot, Blop, Plop)>을 선보여 주목받고 있다. 국내외에서 활발한 행보를 보이는 김아영 작가는 최근 한국인 최초로 2025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설치미술과 퍼포먼스, 가상현실과 인공지능 등 첨단 기술을 자유자재로 접목하는 작업 방식도 인상적이지만 한국의 근현대사뿐 아니라 석유와 정치, 자본과 정보의 흐름 같은 이슈를 넘나드는 주제 의식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역사와 기억은 모두에게 불완전한 것이기에 리서치 자료를 원재료로 삼으며 이것을 마법 수프를 끓이듯 마구 뒤섞어 결과물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고.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선보인 신작 ‘알마터 플롯 1991(Al-Mather Plot 1991)’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 구조가 흥미로운데, 역사와 과학, 신화와 지정학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 리서치를 기반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알 마터 주택단지’와 걸프 전쟁이 있었던 1991년, 김아영의 어린 시절이 플래시백으로 왕복한다. 세계의 기원부터 다가올 미래를 광범위하게 아우르지만 역사의 순간을 함께한 작가의 내밀한 고백이 함께해 재미있는 단편영화를 보듯 작품을 볼 수 있다. 이번 신작은 석유의 기원과 신화 등 20세기의 역사를 석유 관점에서 재구성한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 쉘’이라는 작가의 제페트 연작을 10년 만에 시각적으로 구체화한 시도라고. 작품의 광범위한 배경은 그대로 가져오면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알 마터 주택단지’를 시대의 증인으로 내세워 전쟁의 악몽과 일상의 삶, 꿈과 기억까지 아스라하게 펼쳐낸다. 현재 김아영 작가는 독일 국립현대미술관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개인전 <Many Worlds Over>를 열고 있으며(7월 20일까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PS1에서도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전시명 <플롯, 블롭, 플롭(Plot, Blop, Plop)>
전시 기간 6월 1일까지
전시 장소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기간 6월 1일까지
전시 장소 아뜰리에 에르메스
1, 2 서울 도산의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선보인 김아영 작가의 신작 ‘알 마터 플롯 1991’(2025)스틸 이미지. 단편영화처럼 흥미로운 ‘알 마터 플롯 1991’ 영상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역사적 공간에 함께 있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실사 촬영에 더해 생성형 AI부터 3D 기법, 탈광학적 이미지를 과감히 혼합해 트랜스미디어의 실험을 추구한 이 영상에서는 김아영 작가가 그간 개발해온 새로운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
3 블랙 재킷을 좋아한다는 김아영 작가.
※ 1~3 ©에르메스 재단 제공
3 블랙 재킷을 좋아한다는 김아영 작가.
※ 1~3 ©에르메스 재단 제공
자연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유대
#최재은 <자연국가>
#최재은 <자연국가>
“자연은 인간을 원하지 않지만, 인간은 자연을 원하죠. 솔직히 ‘자연’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지금 자연과 공존하는 방식은 ‘관심’밖에 없습니다. 저는 지금 굉장히 절실하게 작업 중입니다.” 생명의 근원과 시간, 자연과 인간의 복합적 관계를 사유하는 작품을 다양한 매체로 선보이는 최재은 작가(b. 1953)는 자연에서 출발한 광범위한 예술 여정을 이렇게 압축했다. 국제갤러리에서 함께한 이번 개인전은 지난 50년간 생태계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잘 보여주는데, 오랜 관심사인 ‘숲’을 다양하게 해석한 작업도 선보였다. 작가가 현재 거주하는 교토의 동네 숲을 산책하며 발견한 낙엽과 꽃잎을 재료로 물감의 안료를 만들고 캔버스에 칠한 ‘숲으로부터’라는 회화 연작이다. 늦가을 숲속을 거닐며 들은 낙엽이 사르르 떨어지는 소리, 숲 너머 먼 산에서 들려오는 산울림 소리, 빗소리 등 다양한 소리를 작품 표면에 아름답게 적어갔는데, 이를 연달아 보면 마치 숲속의 음악당에서 펼쳐지는 음표 같다. 전시장 바닥에는 작가가 직접 쓴 시 ‘나무의 독백’을 설치하기도 했고, 거대한 고목의 밑동을 느리게 3백60도 회전하며 세계를 사유하게 하는 영상 작품 ‘Flows’도 있다. 지난 10년여간 진행해온 ‘DMZ 프로젝트’는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비무장지대가 생태계 보전 지역이라는 점에서 출발해 자연 복원을 위한 작가의 대안을 제시하는 대규모 국제 협업 프로젝트로, 여기에서 발전한 ‘자연국가’ 시리즈는 이번 전시의 주제이기도 하다. 작품이라기보다 DMZ 복원을 위한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DMZ 복원을 위한 엄청난 식재의 종류와 양을 정리해 이를 자그마한 ‘종자 볼’에 담아 드론으로 뿌린다는 방대한 계획이다. 이를 함께 수행할 수십만 명의 파트너를 모집 중이라고 하니(작가가 만든 웹사이트에서 DMZ 지도를 살펴보며 원하는 구역에 맞춰 ‘종자 볼 기부 약속’을 등록할 수 있다) 마치 ‘자연 국가’를 책임질 숭고한 리더처럼 느껴진다.
전시명 <자연국가>
전시 기간 5월 11일까지
전시 장소 국제갤러리 K2(1~2층), K3
전시 기간 5월 11일까지
전시 장소 국제갤러리 K2(1~2층), K3
1 최재은 작가.
2 최재은 작가의 영상 작품 ‘Flows’(2010), Video 17min 20Sec. 이 작품은 거대한 고목의 밑동을 느리게 회전하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자연을 사유하게 한다.
3 최재은 작가의 ‘숲으로부터(From the Forest)’(2025), Natural dyes and charcoal pencil on canvas, 100×72.7cm each, 2 sets. 이 작품은 분홍색과 황토색, 옅은 갈색을 오가며 재현 불가능한 자연의 색을 담아 작가가 거닐었던 숲의 가장 정직한 소리를 화폭에 담은 결과물이다.
※ 1~3 Photo by 최재은 스튜디오 이미지 제공_국제갤러리
2 최재은 작가의 영상 작품 ‘Flows’(2010), Video 17min 20Sec. 이 작품은 거대한 고목의 밑동을 느리게 회전하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자연을 사유하게 한다.
3 최재은 작가의 ‘숲으로부터(From the Forest)’(2025), Natural dyes and charcoal pencil on canvas, 100×72.7cm each, 2 sets. 이 작품은 분홍색과 황토색, 옅은 갈색을 오가며 재현 불가능한 자연의 색을 담아 작가가 거닐었던 숲의 가장 정직한 소리를 화폭에 담은 결과물이다.
※ 1~3 Photo by 최재은 스튜디오 이미지 제공_국제갤러리
예술로 연결되는 모두의 공간
#강건, 이은우, 이형구, 임선구, 최상아 <모두의 바다 Where the Line is Drawn>
#강건, 이은우, 이형구, 임선구, 최상아 <모두의 바다 Where the Line is Drawn>
작품은 정말 좋지만, 내 공간과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작품을 공간에서 더 빛나게 할까? 새로운 아트 신에서는 이런 질문이 더 중요해질 것 같다. 작품과 어울리는 공간과 가구 배치에 좋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듯한 ‘라니서울’이 최근 공간을 확장해 새롭게 문을 열었다. 한남동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한 라니서울은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집으로 초대받은 듯한 느낌을 주는 ‘하우스 갤러리’다. 요즘 미술계의 러브콜을 다수 받고 있는 맹지영 큐레이터가 함께한 이번 전시는 ‘드로잉’에 무게를 두고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확장된 형태로 작업을 만들어가는 다섯 작가(강건, 이은우, 이형구, 임선구, 최상아)의 작품을 각 작가의 생의 한 챕터처럼 펼쳤다. 특히 3차원 공간에 그려진 드로잉처럼 공간에 설치된 이형구 작가의 작품이 눈에 띄는데, 작가의 정교한 집도 과정으로 탄생한 설치 작품이 몸의 한 부분처럼 보이기도 하고, ‘소우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매일 일상을 기록하듯 그리고 오리며 붙이는 작업을 하며 한 분야의 숙련된 장인처럼 ‘기다림과 만남의 반복된 여정’을 보여주는 최상아 작가의 작업도 흥미롭다. 이렇게 작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서사로 시작했지만 모두의 공간과 서사로 확장해 결국 개개인이 밀도 높게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이 하나의 세계가 ‘모두의 바다’로 확장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하니, 모두 각자만의 ‘바다’로 떠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각각의 작품이 하우스 갤러리 분위기에 맞게 거실이나 서재, 계단 옆에서 불쑥불쑥 존재감을 드러내 예술 작품이 공간에 어떤 힘을 불어넣는지 다시금 느끼게 한다.
전시명 <모두의 바다 Where the Line is Drawn>
전시 기간 5월 2일까지
전시 장소 라니서울
전시 기간 5월 2일까지
전시 장소 라니서울
1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강건 작가의 ‘Bleu’(2025), Pastel on paper, 107×132cm.
2 행성에 불시착한 행성 같기도 하고,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형구 작가의 ‘Polar Docking’(2025), Papier-mâché, pigment, aluminum, magnets, 540×160×120(d)cm.
3 종이에 흑연을 주재료로 드로잉이나 설치 작업을 하는 임선구 작가의 ‘벽장 안의 뜰(The Garden in the Closet)’(2024), Drawing, relief, 63×61×5(d)cm. 임선구 작가는 최근 몇 년간 종이 파편을 으깨고 뭉쳐 작업의 바탕이 되는 종이를 직접 만드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고.
※ 1~3 이미지 제공_라니서울
2 행성에 불시착한 행성 같기도 하고,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형구 작가의 ‘Polar Docking’(2025), Papier-mâché, pigment, aluminum, magnets, 540×160×120(d)cm.
3 종이에 흑연을 주재료로 드로잉이나 설치 작업을 하는 임선구 작가의 ‘벽장 안의 뜰(The Garden in the Closet)’(2024), Drawing, relief, 63×61×5(d)cm. 임선구 작가는 최근 몇 년간 종이 파편을 으깨고 뭉쳐 작업의 바탕이 되는 종이를 직접 만드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고.
※ 1~3 이미지 제공_라니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