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ying Bound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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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 2022

글 고성연

Kiaf·Frieze Seoul 2022
The Women Who Inspire Us_15 가다 아메르(Ghada Amer)


프리즈 서울이 열린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반가움과 왠지 모르게 걱정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이제 공원에서 유유히 미술 산책을 하며 아트 페어를 즐길 수 있을까 하는 기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아트 페어 브랜드가 된 프리즈(Frieze)는 2003년 가을, 런던 리젠트 파크에서 출발했고,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형 전시장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텐트형 전시 공간을 무대로 동시대 미술을 선보이는 발상의 미학을 펼쳐냈기 때문이다. 적어도 올해는 그런 기대를 접어야 했지만, 그래도 도시 곳곳의 다채로운 공간을 수놓는 콘텐츠의 향연은 여전히 반가웠다. 그런데 ‘콘텐츠 폭증‘을 겪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지나치게 많은 이들이 별 의미 없이 스쳐 가니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시간을 할애하게 되는 존재가 간혹 등장하기도 한다. 얼마 전 서울 송원아트센터에서 열린 자신의 개인전을 위해 멀리 미국 뉴욕에서 찾아온 가다 아메르(Ghada Amer). 작업 세계는 어느 정도 낯익은 편이었지만 그녀와의 ‘대면‘은 처음이었는데, 폭풍 같은 일정 속에서도 잠시 숨을 고르고 유쾌하면서도 진정성이 담긴 대화를 나누게 된 행운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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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어떤 원칙이나 사상, 이념을 의도적으로 따르지 않더라도, 그저 자신에게 솔직하고 현실의 차별적인 상황에 주눅 들지 않고 맞서다가 자연스레 ‘행동가’ 비슷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더라도 ‘페미니스트’라고 공개적으로 선언까지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젠더 이슈가 심각한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성이라면 어떨까? ‘뉴요커’가 된 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르기는 했지만 가다 아메르(Ghada Amer)는 이집트 카이로 태생(1963년생)으로 젠더와 섹슈얼리티 같은 주제를 줄곧 다뤄온 작가다. ‘이슬람 여성 아티스트의 뉴욕 성공기’. 언뜻 이렇게 단어를 조합해놓고 보면 처음부터 잔다르크처럼 저항한 ‘페미니스트’ 투사 같은, 소위 ‘센캐(강한 캐릭터)’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실제로도 그녀는 에너지가 넘치고, 당당하며 솔직한 면모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섬세한 배려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닌, 어렵지 않게 대화를 풀어갈 수 있는 다분히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였다. 가정환경을 살펴봐도 ‘억압이나 ‘차별’을 많이 받았을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진보적인 외교관 아버지와 화학을 전공한 농경제학자 어머니를 뒀고, 부모님의 일과 학업 때문에 11세에 프랑스 니스로 이주했다. “전 부모님의 교육열 덕분에 그분들이 이집트로 돌아간 뒤에도 니스에 계속 남아 있었어요. 제가 프랑스에서 학업을 계속해나가기를 원하셨거든요.” 아무래도 당시 이집트는 여성이 자유롭게 교육받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런데 프랑스 땅이라고 해서 그녀에게 커다란 디딤돌이 되어주지는 못했다는 게 반전이라면 반전이다. 지금도 인종차별적 ‘시선’은 존재하겠지만 당시에는 아랍 문화권에서 온 이방인 소녀에게 훨씬 더 배타적인 분위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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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에서 ‘버텨낸’ 청소년 시절, 미국행을 꿈꾸다
남프랑스에서의 청소년 시절은 결코 녹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다 아메르에게는 여러모로 기회를 선사했다. 우선, 미술 입문의 길을 열어줬다. 사실 그녀의 부모는 미래의 생계가 심히 염려되는 ‘아티스트’라는 직업을 찬성하지 않았고, 당연히 미술 공부도 탐탁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그리기를 좋아했고, 미술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관심이 남달랐던지라 포기할 수가 없었다고. “스무 살 넘어서야 미술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대학은 일단 마치고 ‘건축’ 공부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마침 부모님이 귀국을 하셨고, 전 낮엔 학교를 가고 저녁엔 미술 입시를 준비했어요. 물론 부모님은 전혀 모르셨죠.” 그녀는 부모님의 부재 덕분에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해서 예술 학교 빌라 아르송에 다녔던 가다 아메르는 그렇게 배우고 싶었던, 순조롭지 않을 것도 없었던 ‘회화 공부’의 벽을 체감하게 된다. 일부 회화 수업을 남학생만 받을 수 있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그게 당시 엄연한 현실의 편견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창의적 나래를 보다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미국행’을 꿈꾸게 됐다. 그리고 실제로 추진을 거듭해봤지만 비자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아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공부를 이어나간다. 이렇듯 여성, 국적, 종교 등 여러 이슈가 발목을 잡자 내면에서 ‘저항 의지’가 생기고 점점 머리끝까지 차오를 수밖에 없던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지 않았을까. 그래도 외롭거나 분노로 점철된 일상을 보내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녀 곁에는 평생 지기로 남은 이란 출신의 ‘남사친’도 있었다. 훗날 뉴욕행도 함께 했을뿐더러 2000년대 초반부터 아메르와 실‘붓질’과 ‘자수’ 등으로 둘이서 하나의 시각 언어를 만드는 ‘공동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동갑내기 아티스트 레자 파르콘터(Reza Farkhondeh)다. 아메르는 팬데믹 시기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견뎌야 하기도 했는데(지금은 많이 회복해 건강한 상태다), 곁에서 돌봐주고 한결같이 응원해주며 원기를 북돋아준 영혼의 단짝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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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주제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다
다시 1990년대 중반으로 돌아가, 마침내 ‘아티스트 신분’으로 미국 땅에 정착하게 된 그녀는 여성에 관한 질문을 예술로 풀어내는 작업을 활발히 해나갔다. 그리고 여성의 활동으로 여겨지는 ‘자수(刺繡)’로 캔버스를 메우는 작업으로 차츰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남성적인 페인팅의 주재료인 물감과 붓 대신 실과 바늘을 꺼내 든 것이다. 사실 그녀는 초기부터 조각이든 회화든 자신의 어머니가 즐겨 하던 자수든 간에 매체를 가리지 않고 늘 다양한 시도를 해온 편이었는데, 단지 ‘자수’로 먼저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수채 물감과 더불어 실을 활용해 캔버스를 수놓은 아메르의 자수 회화는 그만큼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일방적인 남성의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포르노 잡지의 누드나 여러 여성의 삶에서 차용한 다양한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화폭에 담지만 관능성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데, 언뜻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인지도를 점차 얻으면서 장르와 매체 실험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선다. 도자기,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 브론즈(청동) 조각, 야외 공간을 근사하게 탈바꿈시키는 식물 설치(‘정원’ 시리즈) 등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다층적인 매력은 그렇게 영글어갔다. 필자가 처음 접했던 건 속은 뻥 뚫려 있으면서 둥그런 달걀 모양을 이루는 선의 미려한 율동이 인상적인 원형 조각 시리즈. 그녀가 ‘empty sculpture’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작업이었다. 정치와 성, 신체와 언어의 양면성을 ‘안팎’의 구조로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작품의 속을 비우는 조각 언어가 흥미로웠는데, 알고 보니 그중 실제 사람 크기로 조각한 ‘The Blue Bra Girls(파란 브래지어의 소녀들)’라는 작품은 이집트 독재 정권의 압제와 폭력에 당당히 맞서는 여성의 용기를 향한 ‘헌사’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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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 마르세유에서 열리는 ‘금의환향’ 회고전
이번 프리즈·키아프 서울 주간에 티나킴 갤러리가 송원아트센터에서 공개한 가다 아메르의 전시명은 <Paravent Girls / 파라벤트 걸>(8월 30일~9월 15일). 그녀와 뉴욕에서 오랜 호흡으로 창조적 협업을 해온 티나킴 갤러리는 앤드루 크랩스 갤러리, 보르톨라미 갤러리와 함께 개최하는 뉴욕 화랑들의 협력전 <The Cumulative Effect / 누적효과>와 더불어 아메르의 개인전도 준비했다. ‘paravent’라는 단어 뜻대로 스크린(병풍)의 형태를 한 커다란 청동 조각 작업을 선보인 전시다. 수많은 제작소가 문을 닫게 만든 팬데믹 사태를 계기로 티나킴 갤러리를 통해 소개받은 한국의 주물공장에서 완성된 작품 시리즈라고. 여성 인물들이 새겨진 조각 작품의 원본은 사실 길거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종이 박스다. 물건을 옮기는 박스 위에 작가는 붓 대신 무른 점토를 사용해 이 여성들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박스의 면면을 잇는 절개선이 있는 부분을 펼치면 마치 병풍처럼 세워놓을 수 있다. 긴 머리를 휘날리는 여성들의 안식처가 되는 셈이다. “형상과 배경,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적 위계는 사라지고, 이름 없는 씨앗이 땅에 내려앉아 자라는 정원의 섭리와 같이 껍데기만 남은 박스는 인물을 담아내는 주소가 되고, 여성의 이미지는 날아다니는 박스의 거주자가 된다”는 큐레이터의 설명이 와닿는다. 존재감이 남다른 이 청동 스크린 시리즈는 오는 12월 프랑스 남부 도시 마르세유에 있는 국립 미술관 Mucem에서 열릴 그녀의 개인전에도 전시될 예정이라고. 아픈 기억도, 즐거운 추억도 많은 그녀의 고향 같은 도시 니스와 가까운 ‘이웃’ 도시인 마르세유를 상징하는 국립 미술관에서의 전시라니, 무척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터. 정말 기쁘고 뜻깊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는 가다 아메르는 안 그래도 “프리즈 서울 개막을 보고는 전시 준비차 마르세유로 향할 예정”이라고 눈빛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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