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05, 2025
글 고성연(스페인 현지 취재)
‘솔로 하우스(SOLO HOUSES)’ 프로젝트: 새로운 건축을 향해
‘한쪽 끝은 스페인의 거친 바위에 닿아 있고, 다른 한쪽은 멀리 프랑스를 향하고 있는….’ 그리스 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스페인 기행>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하는 피레네산맥 중부의 내륙 지역 아라곤 지방. 바르셀로나에서는 자동차로 3시간가량, 그리고 마드리드에서도 고속 기차와 차로 비슷한 시간을 이동해야 다다를 수 있는 이 ‘중간 지대’의 한 마을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펼쳐질 흥미로운 건축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번잡한 도시 생활에 지친 많은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홀로움의 미학’을 누릴 수 있는 독채 숙소가 하나둘 들어서고 있는데, 이름하여 ‘솔로 하우스(Solo Houses)’ 프로젝트!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구조의 색다른 건축, 그리고 예술과 와인의 조화까지, 평생 한 번쯤은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여정을 떠났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홀로 있음을 겁내지 않는 자는 신의 축복을 받은 자다(Blessed are Those You Do Not Fear Solitude, Who are Not Afraid of Their Own Company)”
by 파울루 코엘류
아무도 없는 외딴 곳(In the Middle of Nowhere)! 창조성의 고삐를 되도록 옥죄지 않고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건축 프로젝트를 표방하는 ‘솔로 하우스(Solo Houses)’에 대해 처음 전해 들었을 때, 꽤 길고 먼 여정임에도 귀가 솔깃했던 건 그토록 외진 산속에 독채 형식으로 건물이 독특하게 솟아 있다는 ‘경치의 미학’이 밋밋한 사진만으로는 도저히 와닿지 않아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빽빽한 유럽 출장에서 지나치게 많은 여행지를 돌아다니고 숱한 사람들을 스치면서 쌓인 심신의 피로를 씻어내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기대를 품게 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동차 내비게이션 창에서 보이는 지도상의 큰 행선지는 피레네산맥 중부 내륙 지역에 있는 스페인 자치 지역인 아라곤 지방! 사라고사, 우에스카, 테루엘 등 3개의 주로 이뤄져 있는 이 고원지대를 향해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했을 때의 풍광은 뜨겁지만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경쾌했다. 그저 모든 햇살이 축복의 세레나데처럼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느낌이랄까. 한참을 달리노라니 어느새 상대적으로 단조로운 풍경이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온통 나무와 바위로 뒤덮인, 자못 메말라 보이는 산들의 파노라마. 카페인의 힘으로 졸음을 견디다 드디어 목적지 근처의 팻말을 보니 처음인데도 반가움이 치솟았다. 솔로 하우스 기행의 시작점인 벤타 도베르(Venta d’Aubert)라는 와이너리였다.
자연과 예술의 조화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와이너리
둥글고 완만한 아치를 그리는 작은 산이 멀리 보이는 배경에, 돌벽을 두른 아담한 농장 같은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앞뜰에는 하얀 조각이 커다란 수호신처럼 놓여 있었다. 1980년대부터 명맥을 이어온 이 와이너리의 라인업을 한번에 꿰뚫어볼 수 있는 2층짜리 ‘본부’다.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 제작업체를 이끄는 스페인 출신의 에바 알바란(Eva Albarra′n)과 그녀의 남편인 프랑스 출신의 크리스티앙 부르데(Christian Bourdais) 커플이 인수한 이 와이너리는 2022년부터 그들이 이끄는 솔로 하우스 프로젝트의 중요한 부분을 이뤄오고 있다. 해사한 공간에 와인과 곳곳에 설치된 예술 작품이 조화를 이루는 건물 내부는 더 사랑스럽다. 현대미술과 건축의 영역을 넘나드는 에바-크리스티앙 커플의 커플의 배경을 잘 살려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디자인한 한정판 와인 레이블이 눈길을 잡아끄는데, ‘솔로 100’에서 ‘솔로 500’에 이르는 지중해 감성의 와인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2013년부터 유기농 인증을 받아온 18ha(약 5만4천4백 평) 면적의 와이너리에서 내놓는 연간 생산량은 5만 병 수준이다. 나른한 오후 공기를 들이마시며 포도밭 주위를 잠시 거닐다가 여장을 풀러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절로 가벼워졌다. 그새 옷깃에 살짝 스며든 듯한 새콤달콤한 와인 향내는 기분 좋은 ‘덤’이었다
옛 아라곤왕국의 고원지대에 ‘나 홀로’ 피어난 건축
동·서양의 선현들이 일찍이 찬양했던 ‘행복한 고독’을 갈망하는 나그네들의 이상적인 숙소로 여겨지는 솔로 하우스는 어둡거나 캄캄한 밤이라면 웬만해선 헤매지 않기가 더 힘들 듯한, 정말이지 인적도 없고 길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다 보니 수풀만 우거진 맨땅에 나 홀로 솟아오른 요새처럼 유유히 터를 잡고 있는 건축물의 윤곽이 드러났다. 아라곤 지역의 마타라냐를 수놓고 있는 무려 200ha(60만5천 평)의 광활한 땅을 토대로 2010년 시작된 솔로 하우스 프로젝트는 에바-크리스티앙 커플이 패기와 열정을 지닌 15개의 건축 스튜디오를 초청해 창작의 자유도를 한껏 끌어올린 휴가용 별장(임대용 독채)을 설계하는 과제를 골자로 한다. 현재로는 KGDVS(Office KGDVS)와 페조(Pezo von Ellrichshausen)의 건축물만 들어서 있는데, 전자는 도넛처럼 가운데가 뚫린 원형 구조를 따라 침실, 옷방, 샤워실 등의 시설이 직렬 형태의 동선으로 주욱 이어지는 대형 숙소이고, 후자는 마치 낭떠러지 같은 땅 위에 최소한의 받침대만으로 지지되는 듯한 인상적인 파빌리온이다. 얼마든지 단기로도 빌릴 수 있고 예약은 필수다(www.solo-houses.com, 1박당 5백 유로 수준에서 시작한다). 둘 다 천혜의 풍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을 뿐, 내부에는 TV 같은 오락 기기도 없고 벽에는 그림 하나 걸려 있지 않다(인터넷은 가능하다). “상업적 제약에서 벗어나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설계 지침을 담은 디자인 브리프가 없었죠. 물론 어느 정도 예산의 상한선은 정해져 있지만요.” 솔로 하우스 프로젝트를 주로 맡고 있는 크리스티앙 부르데는 “2028년께 칠레 건축가 스밀란 라딕(Smiljan Radic)이 설계를 맡은, 25개 원형 객실과 레스토랑 등을 갖춘 호텔도 들어설 예정”이라고 말했다.
건축가에겐 자유로운 창의성을, 여행자에겐 사유의 시간을
사실 현재의 두 숙소 공간은 언뜻 보기에는 느낌이 전혀 다를 수 있다. 매끈한 재질과 연결 고리를 강조하는 KGDVS의 ‘솔로 오피스’는 다분히 컨템퍼러리 감성이 엿보이고, 이에 반해 페조의 ‘솔로 페조’는 거친 표면과 직선적 디자인을 강조하는 브루탈리즘 요소가 강하게 묻어난다. 그러나 두 숙소는 일부러 짜기라도 한 듯 중요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는데, 여러 기능을 갖춘 작은 공간이 ‘열린 구조’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KGDVS의 탁 트인 원형 숙소야 당연히 ‘연결’을 특징으로 내세우고 있다지만, 외견상으로는 딱 떨어지는 사각의 단절된 공간처럼 보이는 페조의 숙소 역각 방(공간)이 서로 이어지도록 벽으로 막지 않고(문은 있지만) 결국은 다 통하도록 설계되어있다(가운데에는 수영장이 있다). 그래도 저마다 각자의 작은 공간에 있노라면 방해받지 않고 그저 자연을 바라보며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독립성을 품고 있다. 강강술래를 하듯 흥미로운 연결성을 바란다면 원형 공간이, 정제된 틀 속에서 ‘평온한 고립’을 즐기고자 한다면 사각 공간이 안성맞춤인 대조미가 재미나다. 확실한 건 두 유형 모두 ‘속세’와는 선을 확실히 그은 느낌의 공간과 주변 환경에 둘러싸인 만큼, 힐링을 추구하든, 일에 집중하길 원하든 순도 높은 고독을 누리면서 여전히 소소한 교류를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혹시라도 외부와의 호흡이 고프다면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닌 출중한 아티스트들의 조각 작품이 자연 속에 흩어져 있는 ‘조각 산책(Solo Sculpture Trail)’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자연만이 거주하는 듯한 넓은 지대에 서 있는 독특한 건축과 조각의 향연이 빚어내는 효과는 경치가 반드시 자연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영국의 전천후 크리에이터 토머스 헤더윅의 주장을 상기하게 만든다. ‘이곳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강력한 장소성을 갖춘 곳! 바로 이러한 면모 때문에 단 하룻밤의 체류를 위해서라도 여행자들은 길을 떠나는 게 아니겠는가.
1, 2, 3 스페인 북동쪽 아라곤 지방의 크레타스(마타라냐)에 자리한 건축 스튜디오 페조의 건축물 내·외부. 단기 임대 가능한 별장이며 ‘솔로 하우스’ 프로젝트의 일부로 설계된 독채 별장이다. 건축 스튜디오 페조는 2인의 건축가가 2002년 창립한 스튜디오로 칠레에 기반을 두고 있다.
4, 5 솔로 하우스 프로젝트의 중요한 일부인 와이너리 벤타 도베르(Venta d’Aubert)의 건물과 포도밭. 2013년부터 유기농 인증을 받아온 와이너리에서 연간 5만 병의 와인을 생산한다.
6 ‘솔로 100’에서 ‘솔로 500’에 이르는 지중해 감성의 와인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7, 12, 13 벨기에 브뤼셀 기반의 건축 스튜디오 KGDVS(Office KGDVS)가 솔로 하우스 프로젝트로 선보인 독채 건물. 도넛처럼 생긴 원형 건물에 침실, 옷방, 휴식 공간 등 독립된 기능을 갖춘 공간이 일렬로 이어지는 식으로 설계된 ‘연결’의 감성이 흥미롭다. 가운데에는 수영장이 있다
8, 9, 10, 11 녹음 짙은 공원에 자리한 솔로 하우스 부지는 면적 200ha에 이르는데, 알바란 부르데 갤러리와 협업하는 다국적 작가들이 선보인 조각 작품을 곳곳에 설치해 아트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위에서 아래 순서대로 엑토르 자모라(He′ctor Zamora)의 ‘Truth always appears as something veiled’, 클라우디아 콤테(Claudia Comte)의 ‘Burning Sunset’, 모나 하툼(Mona Hatoum)의 ‘Orbital’, 수퍼플렉스(Superflex)의 ‘THERE IS AN ELEPHANT IN THE ROOM’ 등의 작품이 있다.
※ 1, 3~13이미지 Ⓒ Albarra´n Bourdais
4, 5 솔로 하우스 프로젝트의 중요한 일부인 와이너리 벤타 도베르(Venta d’Aubert)의 건물과 포도밭. 2013년부터 유기농 인증을 받아온 와이너리에서 연간 5만 병의 와인을 생산한다.
6 ‘솔로 100’에서 ‘솔로 500’에 이르는 지중해 감성의 와인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7, 12, 13 벨기에 브뤼셀 기반의 건축 스튜디오 KGDVS(Office KGDVS)가 솔로 하우스 프로젝트로 선보인 독채 건물. 도넛처럼 생긴 원형 건물에 침실, 옷방, 휴식 공간 등 독립된 기능을 갖춘 공간이 일렬로 이어지는 식으로 설계된 ‘연결’의 감성이 흥미롭다. 가운데에는 수영장이 있다
8, 9, 10, 11 녹음 짙은 공원에 자리한 솔로 하우스 부지는 면적 200ha에 이르는데, 알바란 부르데 갤러리와 협업하는 다국적 작가들이 선보인 조각 작품을 곳곳에 설치해 아트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위에서 아래 순서대로 엑토르 자모라(He′ctor Zamora)의 ‘Truth always appears as something veiled’, 클라우디아 콤테(Claudia Comte)의 ‘Burning Sunset’, 모나 하툼(Mona Hatoum)의 ‘Orbital’, 수퍼플렉스(Superflex)의 ‘THERE IS AN ELEPHANT IN THE ROOM’ 등의 작품이 있다.
※ 1, 3~13이미지 Ⓒ Albarra´n Bourdais
[알바란 부르데(Albarrán Bourdais)의 개성 넘치는 창조적 여정]
01. Blessed in Solitude_알바란 부르데(Albarrán Bourdais)의 솔로 하우스(Solo Houses) 건축 프로젝트 보러 가기
02. Interview with 에바 알바란(Eva Albarrán) & 크리스티앙 부르데(Christian Bourdais)_갤러리를 둘러싼 창조성의 경계를 묻다 보러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