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5, 2020
글 심우찬(<프랑스 여자처럼> 저자) | Edited by 고성연 | 일러스트 하선경
‘아름다운 시대’의 가치를 돌아보다_ ❸
우리가 지금도 쉽게 일상에서 벨 에포크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매개체는 음악일 것이다. 베를리오즈, 구노, 비제 등 19세기를 수놓은 음악가들부터 생상스, 포레, 드뷔시, 라벨 등으로 이어지는 벨 에포크 시대는 프랑스 음악의 최전성기로 꼽힌다. 특히 벨 에포크는 우리에게는 서구 문명을 본격적으로 수용하던 근대기와 궤를 같이한다. 당연히 벨 에포크 음악이 처음 접한 서구 음악에 포함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시나 서정적인 가사를 붙여 주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프랑스 예술 가곡을 ‘멜로디(Me´lodie)’라고 하는데, 이 개념을 처음 적용한 작곡가는 베를리오즈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후에 펼쳐진 벨 에포크 시대에는 빼어난 가곡이 많이 나왔다. 벨 에포크라는 이름은 잘 알려졌다시피 후세에 붙여졌다.
두 번의 커다란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때가 바로 아름다운 시대, 벨 에포크(Belle E´poque)였다면서 그리워했다.
세계적으로 많은 시련과 희생을 겪고 있는 현 시점의 지구촌에도 벨 에포크 음악은 ‘치유’의 수단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아름다운 시나 서정적인 가사를 붙여 주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프랑스 예술 가곡을 ‘멜로디(Me´lodie)’라고 하는데, 이 개념을 처음 적용한 작곡가는 베를리오즈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후에 펼쳐진 벨 에포크 시대에는 빼어난 가곡이 많이 나왔다. 벨 에포크라는 이름은 잘 알려졌다시피 후세에 붙여졌다.
두 번의 커다란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때가 바로 아름다운 시대, 벨 에포크(Belle E´poque)였다면서 그리워했다.
세계적으로 많은 시련과 희생을 겪고 있는 현 시점의 지구촌에도 벨 에포크 음악은 ‘치유’의 수단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일찍이 중세의 종교음악에서 벗어나면서 이탈리아, 독일 같은 주변 음악 강국에서 나타난 흐름을 놓치지 않았던 프랑스 음악계는 고전, 낭만파 시대를 지나면서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 1803~1869)라는 선구자를 맞이한다. 다만 그는 당대 사람들에게는 크게 공감을 얻지 못했다. 19세기 중·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샤를 구노, 앙브루아즈 토마, 카미유 생상스, 쥘 마스네 같은 음악가들이 등장했고, 프랑스적인 스토리와 현대적 감각이 반영된 오페라의 주요 레퍼토리가 완성됐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시각적 화려함 이외에는 음악적 발전이 별로 엿보이지 않는다는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조르주 비제(George Bizet)의 오페라 <카르멘>이라는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18세기만 해도 유럽의 음악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압도하고 있었다. 독일-오스트리아 스타일의 소나타와 교향곡이 전 유럽에 걸쳐 유행했다. 또 뒤를 이어 등장한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넘사벽’ 거장 때문에 새로운 시도 자체가 힘든 시기였다. 그 와중에 프로이센과의 전쟁(1870∼1871)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민족적인 자존심을 회복할 계기가 필요했다. 음악계에서는 ‘국민음악협회(Socie´te´ Nationale de Musique)’가 창설돼 그 역할을 맡았다. 천재 음악가로 언어, 문학, 철학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생상스가 주도한 이 협회에는 쥘 마스네,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파르크, 가브리엘 포레 등의 작곡가가 참여했다. 이 음악가들은 프랑스 기악 음악의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한다. 그들은 관현악, 실내악, 피아노곡 등에 걸쳐 탁월한 걸작을 남겼으며, 중세 교회음악의 전통을 도입해 독일 낭만주의 음악과의 차이를 드러냈다. 올 초 현암사가 펴낸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에 따르면 생상스는 목표대로 젊은 음악가들을 육성했지만 취향은 다분히 전통적이었고, 초기에는 클로드 드뷔시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기존 형식이나 요소를 해체한 클로드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의 물꼬를 틔우면서 프랑스 음악사에 획을 그은 중요한 인물이다. 이후 모리스 라벨의 등장과 함께 프랑스는 명실상부한 근대음악의 최고점에 섰다. 물론 이 시기가 벨 에포크 시대와 겹친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프랑스 문화를 바꾼 ‘살롱’이라는 공간
대체로 프랑스 최초의 살롱을 연 인물은 랑부예(Rembouillet) 후작 부인으로 여겨진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 궁정을 연상시키는 예절과 품위가 넘치는 사람들의 지적 대화의 장을 만들었던 랑부예 후작 부인의 살롱이 커다란 인기를 모으고, 여러 살롱이 속속 생겨나면서 살롱이라는 공간은 프랑스의 문화를 이끄는 중요한 사회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살롱의 성공 뒤에는 각자의 자존심과 명예를 걸고 초대객, 토론, 공연, 식도락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교계의 여왕이 되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여주인들이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문물이 쏟아진 벨 에포크 시대에는 살롱 여주인들의 취향에 따라 문학· 음악·미술·과학·패션 살롱이 다양하게 열렸다. 인기 많은 살롱일수록 지식인은 물론 재능이 뛰어난 연주자와 작곡가, 그리고 미술가를 연결하는 지금의 화랑이나 아트 딜러 역할을 능숙하게 수행해냈다. 또 살롱에서는 사회적 직위나 가문보다 타인을 사로잡는 화술과 매력이 최고의 덕목이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남녀가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던 당시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대화와 토론을 통한 건전한 ‘사교 방식’에 사람들이 왜 열광했는지 수긍이 간다. 특히 살롱에 모인 사람들은 공통의 주제와 취향을 놓고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교양을 쌓으며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살롱은 여론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적 중요성을 갖추게 되었다. <살롱 문화>라는 책(살림 펴냄)에서 저자 서정복은 살롱이라는 공간이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계몽사상을 전파하면서 토론이라는 프랑스의 문화적 전통을 수립했다고 전한다. 직업 있는 여성이 드물던 시대에 여자들이 당당히 경영권을 행사했다는 점도 살롱 문화의 흥미로운 면모다. 당시 살롱은 단순한 사교장이 아니라 여성의 사회 진출을 돕고 신분, 남녀 간의 사회적 경계를 타파했으며, 새로운 지식사회를 형성한 문화와 지성의 산실이었던 셈이다.
레날도 안에게 보낸 마르셀 프루스트의 편지
살롱을 통해 싹을 틔우고 성장한 프랑스 특유의 대화와 사고의 정신은 벨 에포크 시대를 넘어 20세기를 통틀어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를 탄생시킨다. 그는 일찍이 당시 파리의 최고 살롱이던 마들렌 르메르 부인의 살롱, 스트로스 부인 살롱, 후에는 그르퓔(Greffulhe) 백작 부인의 살롱 등을 누비면서 문학적 소양을 보다 풍부하게 쌓고, 사교계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관찰하며 영감을 얻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이 회상과 현실을 오가는 자아를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생각의 흐름’에 대한 탐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프루스트는 특유의 비유와 은유적 표현으로 벨 에포크의 시대상과 사람들의 의식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덕분에 그는 이 작품으로 프랑스 문학계 최고 영예인 공쿠르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프루스트가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성장하고 활약한 인생 여정과는 별개로 2012년 프랑스에서 그의 또 다른 삶의 궤적이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생전에 프루스트가 굳이 숨기지 않았던 그의 친구이자 동성 파트너인 작곡가 레날도 안(Reynaldo Hahn)과 나눈 서신들이 책으로 재출간(갈리마르, 1956년 초판)됐기 때문이다.
사실 단지 프루스트의 후광에 머물기에는 레날도 안은 음악가로서도 존재감이 꽤 컸던 인물이다. 특히 그의 가곡들은 미려한 선율과 문학성 넘치는 가사로 유명한데, 프루스트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가 왜 아름다운 시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던 레날도 안은 파리 음악원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한 쥘 마스네에게 사사했다. 혈기왕성한 시절부터 프루스트처럼 파리의 유명 살롱을 섭렵하기도 했다. 그는 프루스트가 매번 새로운 원고를 써놓으면 가장 먼저 읽고 조언을 건넸다. 사실 처음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지나치게 난해하고 관념적이라는 이유로 파리 출판계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레날도 안은 이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성공한 작곡가로서의 명성과 인맥을 동원해 출판사를 설득함으로써 프루스트의 명작이 세상에 나오도록 애쓴 조력자 역할을 했다. 그는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25년 동안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펼쳤다. 6개의 오페라와 10여 개의 오페레타, 9개의 발레곡, 그리고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을 비롯한 수많은 가곡과 피아노곡, 협주곡을 쓴 그는 1945년에는 파리 오페라좌 단장 자리까지 오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가곡을 단 한 곡도 내놓지 않는다. 아마도 이미 작곡가로서의 영광과 기쁨을 맛본 레날도 안에게는 후대의 평가나 영광보다는 프루스트와 공유하던 자신의 세계가 더욱 소중했던 게 아닐까.
사실 단지 프루스트의 후광에 머물기에는 레날도 안은 음악가로서도 존재감이 꽤 컸던 인물이다. 특히 그의 가곡들은 미려한 선율과 문학성 넘치는 가사로 유명한데, 프루스트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가 왜 아름다운 시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던 레날도 안은 파리 음악원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한 쥘 마스네에게 사사했다. 혈기왕성한 시절부터 프루스트처럼 파리의 유명 살롱을 섭렵하기도 했다. 그는 프루스트가 매번 새로운 원고를 써놓으면 가장 먼저 읽고 조언을 건넸다. 사실 처음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지나치게 난해하고 관념적이라는 이유로 파리 출판계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레날도 안은 이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성공한 작곡가로서의 명성과 인맥을 동원해 출판사를 설득함으로써 프루스트의 명작이 세상에 나오도록 애쓴 조력자 역할을 했다. 그는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25년 동안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펼쳤다. 6개의 오페라와 10여 개의 오페레타, 9개의 발레곡, 그리고 ‘내 노래에 날개가 있다면’을 비롯한 수많은 가곡과 피아노곡, 협주곡을 쓴 그는 1945년에는 파리 오페라좌 단장 자리까지 오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가곡을 단 한 곡도 내놓지 않는다. 아마도 이미 작곡가로서의 영광과 기쁨을 맛본 레날도 안에게는 후대의 평가나 영광보다는 프루스트와 공유하던 자신의 세계가 더욱 소중했던 게 아닐까.
시를 노래하다, 멜로디 프랑세즈(Me´lodie Franc¸aise)의 미학
흔히 ‘멜로디’라고 불리는 프랑스 예술 가곡(Me´ lodie Franc¸aise)은 문학과 음악의 결합이라는 특성 때문에 흔히 독일의 가곡, 리트(Lied)와 비교되곤 한다. 19세기 이후 낭만파 서정시의 자극을 받아 음악과 시의 이상적인 융합을 추구한 리트는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작곡가도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같은 쟁쟁한 이름을 꼽을 수 있다. 프랑스 가곡인 멜로디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다. 하지만 베를리오즈의 뒤를 이어 등장한 거의 모든 벨 에포크 시대 작곡가들이 멜로디를 남겼다. 이는 당시 문화 예술계의 허브이자 교류의 장소이던 살롱이라는 무대가 뒷받침된 덕분이다. 프랑스 문학의 최정점에 맞춰 빅토르 위고라든가 폴 베를렌, 스테판 말라르메, 샤를 보들레르 같은 불세출의 문학가가 지은 아름다운 시들이 당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줬고,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가곡이 여럿 탄생했다. 다시 말해 프랑스 예술 가곡은 벨 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빛난 살롱 문화와 프랑스 문학, 그리고 음악의 황금기라는 3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빚어진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멜로디는 음악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문학성이 매우 중요한 장르였기에 가수에게도 뛰어난 가창력은 물론이고 시에 대한 남다른 이해도와 감성, 전달력을 요구했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가창력이 뛰어난 오페라 가수라 해도 멜로디를 부를 때면 시를 낭송하듯, 속삭이듯, 노래가 지닌 스토리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진지 모드’로 돌입하게 된다.
“드뷔시를 정말 좋아하는데 ‘별이 빛나는 밤(Nuit d’e´toiles)’ 같은 곡은 음악적으로 코드 진행이 아주 절묘합니다. 가사와 음악의 조화도 대단하죠. 멜로디 프랑세즈를 부를 때는 작곡가의 성격, 성장 배경, 곡을 작곡할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하고, 악보에 적혀 있지 않은 것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수가 자신의 감동을 표현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런던의 로열 오페라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는 테너 김건우(Konu Kim)는 멜로디 프랑세즈에 대한 성악가로서의 관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동, 또 그 감동에 대한 추구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서양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대로 꼽히는 벨 에포크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 벨 에포크 시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추억하는 빼어난 전시를 선보여 일본에서 호평과 동시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온 도쿄 쇼토 미술관(The Shoto Museum of Art) 큐레이터 니시 미야코(西美子)는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벨 에포크를 향한 관심과 애정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벨 에포크 시대의 예술은 상징주의라든가 야수파, 큐비즘, 장식미술에 있어서의 아르누보 등 양식이 다양하죠. 그런데 작가들의 감정 표현이 정확하고 직접적이어서 보는 사람들의 감동이 더욱 극대화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처럼 작금의 ‘뉴트로’ 열풍 속에서 거듭 조명되고 있는 벨 에포크의 정수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감동, 그리고 그 미적 가치를 전하려 부단히 노력했던 창조적 영혼들의 행보가 아닐까 싶다. 초현실적인 재난 영화에서나 볼 법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가 이 ‘아름다운 시대’에 끌리는 이유이기도 할 테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