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트와 럭셔리 브랜드의 유대는 진한 ‘공생 관계’ 로 발전하고 있다. 사실 소수이기는 해도 전통 있는 럭셔리 브랜드들은 예술성을 추구해왔다. 1세기도 더 전에 당시의 ‘아트’라고 할 수 있는 장인 정신 충만한 공예 예술이 그들의 뿌리이니 말이다. 영리한 브랜드들의 아트 경영을 살짝 들여다본다.
2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자리 잡은 메종 에르메스 도산공원. 사진 Masao Nishikawa
꽤 일찍부터 “돈은 사회의 언어이고, 럭셔리는 그 문법”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사람들이 흔히 럭셔리를 ‘돈’으로 한정 짓지만 실상 ‘가격’만으로 럭셔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뜻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럭셔리 이론가들이 자주 하는 비유를 빌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언어를 습득했다고 해도 문법이나 어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결코 풍부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럭셔리의 문법은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아트 사랑’이 지극하다. 아트 바젤 같은 대형 아트 페어에 가든, 베르사유 궁전 같은 찬란한 문화 유적지에 가든 럭셔리 브랜드들이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다. 전시를 후원하는 정도의 사례야 다반사고, 예술 분야의 상을 제정해 아티스트를 지원하기도 하고, 전통 있는 기업이라면 자사의 브랜드 아카이브를 소재로 꽤나 괜찮은 전시를 하기도 한다(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심지어 아예 아트를 관장하는 재단을 설립하기도 한다.
갈수록 끈끈해지는 럭셔리 브랜드와 예술의 ‘유대’는 어떤 성격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브랜드 미학을 정립하고 홍보하기 위한 마케팅 차원의 전략적 승부수? 기업의 메세나 활동? 럭셔리 기업을 소유한 억만장자들의 자선 행위? 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아마도 어느 정도는 맞는 해석일 것 같다. 하지만 요즘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아트에 대한 집념 어린 투자와 열정을 보노라면 그 둘의 관계에는 ‘공생(symbiosis)’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듯하다.
4 파리에 있는 까르띠에 현대미술 재단(Cartier 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 건축가 장 누벨의 작품.
6 루이 비통 라스베이거스 메종 시티 센터에 영구 설치된 제임스 터렐의 전시. 사진 Florian Holzherr 사진 제공 루이 비통.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미술관이나 전시 공간을 운영하는 럭셔리 브랜드들의 색깔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현대미술을 후원하는 최초의 프랑스 기업 까르띠에의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까르띠에 재단은 정통성이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위적’이라고 할 만큼 참신한 카리스마를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수학을 주제로 삼는다든지 장 폴 고티에의 파격적인 설치라든지, 최근에는 콩고 미술을 소개한다든지 하는 자유로운 시각과 풍부한 스토리텔링으로 가장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이 비통은 ‘제왕적 기개’가 돋보인다. 일찍이 무라카미 다카시와 구사마 야요이 등 작가들과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주도해온 브랜드답게 예술을 가장 대중적인 감각으로 화려하게 펼쳐 보이는 법을 아는 듯한 이 브랜드는 최근 루이 비통 재단미술관으로 그 위용을 제대로 뽐내고 있다.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경우에는 생태 공원 오아시 제냐를 조성한 브랜드답게 친환경적인 예술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또 구찌와 보테가 베네타 등을 거느린 케링 그룹의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은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원을 쏟아내고 있다. 마틴 스코세이즈 감독이 이끄는 필름 파운데이션과 손잡고 고전 영화가 남긴 문화 예술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도 발벗고 나설 정도.
에르메스는 미술관 같은 공간을 두고 소장품을 모으지 않는다. 예술 작품이나 공간을 사는 대신 ‘인적 자원’을 후원한다는 방침이다. 에르메스 코리아도 미술계에서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는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운영하지만 서울 도산공원에 위치한 메종 내에 전시 공간인 작은 아틀리에만 꾸리고 있다. 이 같은 ‘은근한’ 후원 방식은 브랜드나 로고를 눈에 띄게 강조하지 않는 ‘비과시적 브랜드’ 의 대표 주자인 에르메스의 이미지와도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올봄 밀라노에 문을 연 프라다 재단 미술관도 이 혁신적이고 반항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브랜드의 주인을 쏙 빼닮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미우치다 프라다는 젊은이들에게 문화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아이디어의 장을 강조해왔는데, 바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양조 공장 부지에 세운 이 미술관이 딱 그렇다. ‘아름다운 오브제’ 대신 ‘빠르고, 신선하고, 실험적인 곳’을 지향했다고. 몇몇 럭셔리 브랜드의 아트 경영은 영리하기도 하지만 진정성이라는 차원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저마다 확실한 색깔과 유연성을 보여주면서 단지 돈만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지점에 접근하고 있다. 아마도 그건 억지로 예술적인 덧칠을 해 포장하기보다는 브랜드 정체성에 이미 예술의 핵심인 창조성이 스며들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